최종편집 2024년 11월 27일 05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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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4>
천관우(千寬宇) 선생
나는 천선생님을 모시고 1971년 대통령선거 때에 부정선거 방지를 위한 전국청년학생선거참관인단을 조직하여 투개표 과정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투표일 직전에 선생님과 이병린(李炳璘) 변호사를 모시고 전주와 광주 강연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무렵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3>
아우들
그 여름이 끝날 때, 가을의 초입에서 한 날 젊은 문인들이 모여 반유신 선언문을 발표하자고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다 그만 무산된 적이 있었다.답답했다.나는 그 길로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단골 술집으로 가 당시 재학중이던 여러 아우들을 만났다. 서중석(徐仲錫)·유인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2>
황성모(黃性模) 선생
그 여름에 주교님과 나는 잠깐 내설악(內雪獄)에 들어간 일이 있다. 주교님은 하루 주무시고 나서 속초쪽으로 넘어가고 나만 그대로 주저앉았는데 거기서 우연히 황성모(黃性模) 선생을 만났다.황선생은 본디 서울대 문리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셨고 소위 '민비'(民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1>
주석균(朱碩均) 선생
원주에 돌아온 직후 교구청에서 불러 올라갔더니 귀한 분이 와 게셨다. 한국 농민운동의 어버이이신 주석균(朱碩均) 선생이었다. 농림부 차관도 하셨고 동백림사건 때는 억울한 옥고도 치르셨다.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김병태 교수와 이우재 교수를 가르친 선생님이다.선생은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0>
포위
그 여름 참모들의 판단에 따라 지주교님은 일본대사와 미국대사를 차례로 만났다. 극비리에 장시간에 걸쳐. 그때 주교님은 명예와 목숨을 걸고 그 회견을 단행하는 듯했다. 그 이상은 역사에 묻어버리겠다. 다만 그것이 병법상으로 불가피한 포위의 일환이었다는 것만 말하고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9>
일본
내가 병법을 읽었다면 틀림없이 나무랄 사람이 있을 것이다."시인(詩人)이 무슨 병법(兵法)이람!" 그렇다. 그것은 옳은 소리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겐 그것이 백 번 옳다. 그러나 목숨을 걸었던 그때의 나에겐 그렇지도 않았으니, 이 역시 '시중'(時中)이 아닐까?우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8>
현장 다큐
운동의 현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우리는 이 즈음 모두 함께 한 가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자본주의 사회 구조 안에서 그것을 조직적으로 극복하려는 운동은 특정한 경우 이외엔 대체로 순수한 동기의 일정 자본의 밑받침 없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이런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7>
원주의 나날들
매일 새벽 눈을 떴을 때 곁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은 내게 기이할 정도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첫째, 안정감이었고 둘째, 겸손해야 된다는 생각이었고 셋째, 깊은 자기긍정이었다.재해대책위원회, 훗날의 사회개발위원회와 교구기획실에서 나는 열심히 일했다. 행복했고 더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6>
결혼
사르트르의 한 소설이 있다.올리비에와 이비치라는 남매의 부르주아적 삶과 실존적 결단을 그린 소설, 그 제목은 잊었다. 다만 누이 이비치가 좋아하는 날씨에 관한 묘사가 기억에 남는다.해는 있으되 안개에 가려 뿌우옇고 서늘한 대낮, 길가에 흰 수선화 화분들이 놓여 있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5>
약혼
마산에서 돌아온 내게,그 해 맵디매운 매화꽃 2월은 바로 약혼이었다. 명동성당 근처에서였다.약혼식을 위해 조선옷으로 갈아 입고 이발소에 가 이발을 했다.거울에 비친 나의 서른 세 살.그 위에 미당(未堂)의 싯귀 몇 줄이 어른거렸다.흰 모시옷 갈아입고 난 마음이끼 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