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7일 05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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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4>
창녕할배
퇴원이 결정되었다. 몸도 나았고 정세도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짐을 꾸려 들고 인사를 마친 뒤 병원문을 향해 가고 있을 때다."김선생! 김선생!"헐떡거리며 뒤쫓아온 사람은 한 병실에서 같이 요양하던 창녕할배였다. 영감님은 도수 높은 안경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3>
병실
희망이 넘칠 땐 매일매일 삶의 기쁨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이 가득할 때에도 매일매일의 삶 자체가 곧 희망을 대신하는 즐거움일 수 있다.기흉수술 직후 병실로 옮겼을 때 공기와 피를 뽑아내며 누워 소리없는 미소와 함께 앓고 있는 내 곁에 앉아 하마리아, 즉 마리아 하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2>
사랑
사랑은 그때 안개 자욱한 새벽 가포 바다로부터 왔는가? 사랑은 그때 잃어버린 민주주의에 대한 쓰라린 회한으로부터 왔는가? 사랑은 그때 빛을 잃고 머언 바다로 얼굴을 숨기던 나의 삶, 우리의 그 불행한 세계로부터 소리 없는 눈물처럼, 새벽 무렵 희미해지는 고깃불처럼,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1>
회귀(回歸)
몇 발자욱에 한 번씩 기침이 터졌다. 쿨룩거리며 쿨룩거리며 가래를 뱉고 또 가래를 뱉고 숨을 크게 내쉬며 쉬며, 원주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두 가지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박경리 선생과 따님이 집에 와 계셨던 것이다. 나를 그냥 떠나보낸 게 마음에 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80>
야설본사
친구 집에서 끼어자고 잠에서 깬 나는 이른 아침 이종찬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겠습니까?""아직은 괜찮아! 그러나 피신하는 게 좋아! 어디 산에 가서 캠핑을 하거나 상황이 좀 더 나빠질 때는 병원에 장기입원도 좋은 방법이야! 이번에 만약 잡혀가면 좀 맞아야 할게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9>
정릉
내가 정릉의 처가집, 장모님 박경리 선생을 처음 뵌 것은 오적 사건과 비어 사건 사이의 어느 해 겨울밤이었다. '현대문학'의 김국태(金國泰) 형과 소설가 유현종(劉賢鍾) 씨가 동행했다. 그 동기는 술이 마시고 싶은데 돈은 없어, 김국태 형의 제안에 따라 한밤중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8>
그 사람
나는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滎) 선생의 동생 이회영(李會榮) 선생의 손자로 유명한 이종찬 선배를 세 번 직접 만났다. 한 번은 채현국, 박윤배 형님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단 둘이 수유리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별장앞 잔디밭에서 장시간, 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7>
결별
청강 선생과 지주교님이 합의(合意)하여 나를 원주로 반이시키기로 했다. 주교관 밑에 마침 주교관 부지의 조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비어 있어 그 집을 사서 내게 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짐을 옮겨 친지들 집에 맡겨놓고 집을 더 크게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목포(木浦)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6>
남북회담(南北會談)
남북 간의 밀사 왕래 소식이 터지고 남북회담의 시작이 보도되고 있었다. 김동길 교수님이 내려왔다. 석방(釋放) 소식을 갖고 오셨다. 그리고 남북회담의 내밀한 소식도. 솔직하게 말하자. 그 회담의 장래에 대한 내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5>
츠루미 순스케(鶴見俊輔) 선생
'베헤렝'(베트남에 평화를!)이라는 반전(反戰)단체를 이끌고 있는 교토(京都)대학 철학 교수인 츠루미 순스케(鶴見俊輔) 선생은 일본의 양심(良心)으로서 수많은 일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모으고 있는 당대 희유(稀有)의 철학자요, 사상가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