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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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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93>

아우들

그 여름이 끝날 때, 가을의 초입에서 한 날 젊은 문인들이 모여 반유신 선언문을 발표하자고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다 그만 무산된 적이 있었다.

답답했다.
나는 그 길로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단골 술집으로 가 당시 재학중이던 여러 아우들을 만났다.

서중석(徐仲錫)·유인태(柳寅泰)·안양로(安亮老) 등이었다.
반유신투쟁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문리대 쪽에서 먼저 불을 붙이라고 권유하자, 한 사람도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다.

서중석 아우는 그 느리데한 말투로 왈,
"너무 급하십니다. 좀더 돼가는 꼴을 봐야지유."

더 느리데한 안양로 아우는 한술 더 떠 가라사대,
"멋이 그렇게 급하시데유? 할 때가 되면 오죽 잘 할라구유!"

재빠른 유인태 아우가 말을 마감했다.
"검토하겠습니다. 잘 되겠지요. 안심하십시오. 다 죽은 건 아닙니다."

"그럼 됐다. 난 간다."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앞에 나서지는 않겠다. 비효과적이다. 누군가를 중간에 세워야겠다. 누가 좋을까? 조영래가 이런 때 있으면 참으로 좋을 텐데….

<사진>

그 길로 나는 문화운동하는 아우들, 김민기(金敏基)·김석만(金錫滿)·이상우(李祥雨)·김영동(金永東)·임진택(林鎭澤)·이종구(李鍾求)·이애주(李愛珠) 등이 모여 기다리고 있는 동숭동 문리대 건너편의 '타박네'라는 카페로 갔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예술 하는 패거리들이 비교적 훨씬 화통한 데가 있어 좋았다.
주로 화제가 된 것은 '진오귀'의 양식 문제였다.'마당''판'에 대한 해석의 문제였는데, 그것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민감한 상황적 공간의 의미로 해석해야 옳다는 쪽으로 얘기가 되었다. 제일교회에서 '진오귀' 공연이 가능하다는 것과, 농어촌 계몽이 아닌 일반적인 사회정치 상황극으로 보다 짧은 음악극 같은 것이 시도되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 양식의 명칭도 '음악극'보다 차라리 '소리굿'이라고 부르는 쪽이 더 좋겠다고들 했다. 민비사건 직전의 소리굿 '아구'와 그 직후의 춤굿 '땅끝'이 태어나는 마당이었으니 그 최초의 씨알을 의논한 셈이었다.

늘 그렇듯 함께 마시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추고 떠들었다. 그리고는 헤어지기가 아쉬워 싸구려 여관에 들어 함께 뒹굴었다. 문학판에서 소위 '3박4일'이라고 부르는 행사다. 그렇게 몰려다니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떠들어대다 보면 희한한 얘기들, 깜짝 놀랄 아이디어들이 속출하고 서로 닮아가는 자연스러운 수렴(收斂)현상이 일어났으니 참으로 나와 그들의 관계는 친형과 친아우 이상이었다.

그들 모두 이제는 한국문화의 중견이요, 중견 이상이다. 한 일도 많고 고생도 심했으나 한국의 소위 민족문화운동, 민중문화운동의 제1세대로서 길이 그 영광을 누릴 것이다.

허나, 지나친 욕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을 것 같다. 청년학생이 아닌 바로 그 중견층에서 아주 성숙한 그리고 매우 신중한 새 문화운동, 이른바 생명문화운동이 사이버세계와의 적극적 역학관계 속에서 싹트고, 싹만이 아닌 잎새와 꽃과 열매까지 맺어야만 나와 그들의 시대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아아, 그러나 여보게들! 불편해하지 말게나! 내 나이 이제 예순 둘, 아다시피 환갑을 지났어도 이리 다시금 새 일을 제안하는 것은 내가 잘나서도 내가 엉뚱나서도 아니라네.

가만히 기억해 보시게들!
낙원동이며 문화촌 입구며 신촌 근처의 싸구려 여관과 설악산 등지의 산막에서 우리가 이미 다 우리 머리와 우리 입으로 뱉어낸 이야기들이요, 그 씨알이나마 합의를 본 것들일세.

내가 조금 기억력이 좋은 것뿐이라네! 언어와 표현에 속지 마시게! 우리는 결국 그 길을, 그 새로운 일을 갈 수밖에 없고 또 할 수밖에 없다네! 쉽게 말해 운명이고 어렵게 말해 천명이지! 그러나 반드시 새로운 젊은이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만은 부디 잊지 마시게! 그것이 또한 우리의 숙명이네!

아아암!―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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