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2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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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4>
백일(百日)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 무렵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이는 반정부 인사 1,000여 명의 총살 리스트를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경찰청(치안본부)에서 그 리스트 작성에 참가한 경무관이던 한 중학 동창생으로부터 ‘김지하는 포기하게’라는 말을 듣고 원주의 장선생님은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3>
벽면증(壁面症)
저런 미물들도 생명이매 ‘무소부재’(無所不在)라! 못 가는 곳 없고, 없는 데 없으며 봄이 되어서는 자라고 꽃까지 피우는데 하물며 고등생명인 인간이 벽돌담과 시멘트 벽 하나의 안팎을 초월 못해 ‘쪼잔하게’ 발만 동동 구른다고 해서야 말이 되는가. 생명의 이치를 깨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2>
공부 2
나는 지금도 가톨릭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내가 그대로 가톨릭에 머물렀으면 아마도 지금쯤 유명짜한 원로가 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백면(白面)이 그대로 더 좋다. 나는 끊임없이 탐구하는 나그네인 까닭이다. 그래서 ‘선생님’이라는 거북한 호칭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1>
공부 1
그 길고 긴 시간, 나는 그저 책밖에 읽은 게 없는 듯싶다. 지금의 나의 지식은 거의 그 무렵의 수많은 독서의 결과다. 그러나 일반적인 독서 외에 내가 참으로 힘을 집중해 ‘공부’(工夫)한 것은 네 가지였으니 첫째가 생태학, 둘째가 선불교(仙佛敎), 셋째가 떼이야르 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30>
재판 소묘
또한 재판은 그동안 못 뵈었던 여러 벗들과 가족들을 접견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법정(法庭)은 그때 나의 한 소우주였다.진검승부의 절벽 위였지만, 나는 이미 내 목을 떼어 감방에 두고 왔으므로 별로 두려움은 없었다. 불쌍한 것은 아내.속을 태워 얼굴에 기미와 주근깨가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9>
성경
성경!그 '이스라엘 무협지'가 허가되어 들어오던 날 나는 재판이 곧 열리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읽고 또 읽었다. 강호의 영웅 소식인 듯, 소림사(少林寺)의 무슨 연단 하듯, 배고픈 놈이 밥 찾듯, 목마른 놈이 물 찾듯 그렇게 맛있게 맛있게 성경을 먹고 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8>
소리들
조용필 아우가 처음 만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왈, "저는 대중가수예요." 자기를 낮추어 겸손해 하는 말이었다. 내가 바로 대답하여 왈, "나는 대중시인일세." 그러나 내 말은 나를 낮추는 게 아니라 도리어 나를 한없이 높이는 말이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른바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7>
안팎
그러나 그런 지나치게 인간 냄새가 나는 따위들보다 훨씬 훨씬 재미나고 우주생태학적인 일과는 우선 나의 양심선언 운반자들인 참새·개미·까치들과 함께 쥐·파리·모기·빈대며 풀·돌·물·연기·구름·흙과 도둑님들 그리고 반골(反骨)들과 통방하고 통방하고 또 통방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6>
문세광의 방
구치소로 이송되어 며칠째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잠을 잤다.꿈에 박정희를 만났다.그는 배를 타고 멀리 도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자가 칼을 던져 돛줄을 끊어 버렸다. 배는 돛들이 제멋대로 놀며 뱅뱅뱅 돌다 드디어 구름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가까스로 깨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5>
양심선언
첫번째 글자 한 자는 우리 방에 단골로 드나들던 쥐가 물고나가 전했고, 그 다음번 글자 한 자는 우리방 바깥에서 늘 돌아다니는 도둑괭이가 물고나가 전했고, 세번째 글자 한 자는 우리방 철창 근처로 왕래하는 개미가 물고나가 전했고, 네번째 글자 한 자는 우리방 바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