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2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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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4>
외로움
그무렵 왜 그리도 외로웠을까? 뼛속까지 스며드는 외로움 때문에 매일 술 없이는 살 수 없었으니 곁에서 보기에도 딱했으리라!윤배 형님을 몇번 만난 뒤, 내 스스로 만남을 피했다. 사나운 짐승도 상처를 받거나 사냥꾼에게 쫓기면 동굴에 깊이 숨어 얼굴을 내밀지 않는 법이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3>
원주사변
나는 그 사건을 감히 '원주사변'이라고 부르겠다. 허씨가 나에게 그런 집요함을 보이면서도 계속 원주를 두들기려고 눈독들이고 있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잘한 짓인가? 자기들이 변변하고 떳떳하다면 그럴 필요가 없을 일이었다. 왜냐하면 원주는 이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2>
허문도
이화여대 신인령 교수와 얘기하는 도중에 허문도 씨가 거론되었다. 신교수 왈,"아! 그 불패불굴의 사나이 말이죠!"그랬다.아마 그것이 5공 청문회 직후일 것이다. 그는 쏟아지는 칼날 질문과 화살 공격에 끄떡도 않고 자기네 패거리의 정당성과 전두환 장군에 대한 충성심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1>
대령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리스에서 파시스트들인 '대령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메리나 메르쿨리의 예술적 저항이 기억난다. 메르쿨리는 그것을 특별히 '대령들의 반란'이라고 명명했다.5 공 또한 대령들의 반란이었다. 대령들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0>
담론들
기억이 가능할 때 그 기억들을 정리해둬야 한다.조영래 아우와 함께 이미 민청학련 때부터 당기능을 가진 전선, 즉 전선당에 대해 논의해왔다고 했다. 그것은 종교계를 포함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해외 세력 및 대중적 민중을 포괄하는 넓은 전선이로되 그 중추기능은 전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9>
벗들, 아우들
출옥후 두 해인지 세 해인지 거의 매일같이 둘 혹은 세 패거리 정도씩 벗들, 아우들, 민주화운동 인사나 종교계 사람들, 그리고 대학생 간부들이 몰려와 밥이나 술을 먹고는 돌아갔다. 밥상, 술상을 눈코뜰새없이 날라야 했던 내 아내에게 지금도 참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8>
난초
나는 난초를 '그리지' 않는다. '친다.' '침'은 '그림'과 달리 몸으로 보자면 일종의 '기운갈이'다. 땅인 왼손은 방바닥을 짚고 하늘인 오른손은 허공에 자유롭게 놔두어 사람인 몸과 마음의 중심 기운이 종이의 공간 위에 '신중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7>
무릉계
아내로부터 들어 나의 불면과 번뇌를 조금은 알고 있는 영주 형님이 하루는 내게 며칠간 함께 동해안에 갔다 오자고 제안했다.동해안! 동해안! 큰 바다! 넓은 바다! 피묻은 흰 손! 불타는 노을바다!우리는 떠났다. 등에는 자그만 배낭 하나씩 메고. 배낭엔 감옥에서 내가 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6>
번뇌
이상한 일은 이때부터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짐을 방구석에 내던지고 그 길로 잠에 빠져 며칠을 내리 잤는지 모른다. 그 바람에 한창기 사장과 선암사의 지허(指墟)스님께는 큰 결례를 하게 되었으니 요 얼마전 아내와 함께 선암사에 갔을 때 지허스님과 옛얘기로 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45>
생명사상 세미나
누군가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아무개는 막무가내로 나에 대해서, 그리고 원주사람들에 대해서 모욕적인 발언을 계속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자리에 앉은 채로 목소리를 높여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바로 지금은 고인이 된 빈민운동가이며 개혁정치가인 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