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2시 05분
홈
오피니언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문화
Books
전국
스페셜
협동조합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4>
노란 책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는 결국 나를 가지고 장난질을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라는 제목으로 나의 마지막 진술서를 5개 국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 배포했다. 국제적으로 완전히 매장하자는 것이었다.매장…?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3>
제7국
지하실! 지하실! 빙빙 돌아 몇 층을 내려가 있는 그 무시무시한 지하실! 그 지하실에서 벗어나 서대문으로 이송되는 차 속에서 느낀 해방감! 지하실에서 감옥으로의 이동에 불과한 데도 그처럼 화안한 해방감을 느꼈으니 참으로 인간의 자유란 무엇이며 억압과 파시즘이란 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2>
민주회복국민회의
장모님만 하동에 그대로 머무르고 김상현 씨와 아내, 그리고 아기와 함께 부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부산의 한 호텔에서의 일이다. 김상현 씨가 하도 이끌어 나, 아내, 아기가 다 함께 호텔의 한 싸이키델릭 클럽에 들어갔다.귀가 찢어지는 듯한 전기음악에 어른도 정신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1>
하동
거의 까무라쳤다.밤이고 낮이고 간에 며칠을 내리 잤다.그집 주인장에게 정보부에서 전한 말은 "고맙다"였고 "오래만 있어 달라"였다고 한다. 며칠 동안 먹고자고 했다.며칠이 지나 식구대로 지금은 공원이 돼 있는 섬진강변의 너른 백사장으로 놀러 나갔다. 이곳! 이 백사장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20>
서울역
나는 그 이튿날 장모님을 모시고 아기와 아내와 함께 장모의 S언니가 되시는 분의 하동(河東) 집으로 쉬러 내려가고자 서울역으로 나갔다.<사진>서울역에서 마침 마산 옛집으로 내려가시는 박형규 목사님 부처를 우연히 만났다. 같은 열차를 타고 내려가면서 목사님에게 귓속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9>
동교동
국회의원 김상현 씨는 요사이에는 나와 격조하지만 본디 아주 가까울 뿐 아니라 내가 존경하는 행동가의 한 사람이다. 이론이나 셈보다 발과 몸이 더 빠른 사람이니 그것으로 그는 신의와 예절의 탑을 쌓은 이었다.그이가 기별하여 원주에서 서울로 갔다. 그이를 만나 그이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8>
원주에서의 며칠
지주교님은 나보다 며칠 뒤에 출옥하셨다. 그날, 지주교님이 원주에 도착하던 날은 원주 시민 거의 반이상이 거리로 뛰쳐나와 환영하는 인파로 북적댔다.주교님은 차에서 내려 여러 신부님들, 여러 평신도 지도자들 그리고 나와 함께 원동성당으로 행진하였다.<사진>지금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7>
기독교회관
기독교회관 1층 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날 함석헌(咸錫憲) 선생님을 비롯해 기독교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민청학련과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 전원을 초대하고 환영하는 자리였다. 한마디씩 하라는 자리인데 내가 한 말은 대강 이런 것으로 기억된다."그들은 내게 이런 말을 했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6>
일본의 여론
나는 재판 도중 이 철·유인태 부분에서 재일교포 조직휘와 일본인 다찌가와·하야카와 두 사람의 진술 녹음을 들었다. 민청학련의 두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발언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세 사람의 일본 관계자들에게 몹시 분개해 있었다. 그 분노가 일본 언론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5>
사제단
내 발은 명동성당의 아침미사를 목표로 가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 창으로 흘러드는 햇빛과 조명에 빛나는 새하얀 미사. 그 미사는 만원이었다. 입구쪽에서 뒷전에 서서 바라본 성당 내부는, 그리고 미사는 참으로 숭고하고 장엄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내 생전 처음으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