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지지해온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이 그러했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 소식을 접하고 "평생 민주화 동지를 잃었다"며 침통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민주 정권 10년을 같이 했던 사람으로서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다"라고도 했다. 이 말씀은 지면과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전해져 많은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아마도 가슴에 큰 상처를 받으신 것이다. 여기에는 민주 정권의 동지를 잃은 슬픔과 애통함에 더해 한국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더해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원 직전까지 쓴 일기의 일부가 공개됐는데, 이는 사실상의 대국민 유언인 셈이다. 여기에는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 행태에 대한 분노, 그리고 위기에 처한 한국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에 대한 우려와 안타까움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서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했고,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적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해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통곡하였으며, 그 날 일기에는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며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 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강압적 국정운영과 민주주의 훼손에 대해 강력히 경고했다.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 행태와 공권력에 의존하는 강압적 국정운영은 많은 국민들에게 87년 6월 항쟁 이후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가 발전시켜온 '한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이 과정에서 나온 예기치 못한 불행인 셈이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곡, 그리고 현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담긴 그의 일기는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퇴보에 대한 분노이자 엄중한 경고인 셈이다.
작년의 촛불항쟁을 거치면서 드러난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와 강경일변도의 공권력 의존적 국정운영은 자연스럽게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조직적 대응으로서의 '반MB연대'를 강화시켰고, 더불어 이 연대의 성격을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가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연히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자양분으로 성장해온 민주당이 반MB연대의 주도권을 잡았고, 덕택에 민주당 지지율이 올랐다. 두 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반MB연대의 이러한 성격은 당분간 더 강화될 전망이다.
그런데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 이명박 정부의 일방적 국정운영이 낳은 현 정세의 주요 모순과 대립 구도는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대 민생민주주의'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도 현 정부는 신자유주의의 교조적 원칙인 부자감세와 규제완화를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 경제와 사회의 시장만능주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전망이며, 당장에 민생과 직결된 지방재정과 복지재정도 크게 축소될 위기에 처했다. 부자감세와 무리한 토건사업 등으로 인해 올해와 내년에 각각 52조 원과 50조 원의 재정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현 정부 들어 나라 살림이 거덜 나고 있는 것이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의 재정적자가 117조 원에 이르는데, 이는 참여정부 5년 동안의 누적 재정적자인 18조 3천억 원의 6배가 넘는 규모다. 이로 인해, 집권 당시 약 300조 원이던 국가부채가 이명박 정부 3년 만에 416조 원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세계적 경제위기 탓도 있겠으나, 역시 가장 큰 원인은 대다수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부자감세를 밀어붙인 데 있다. 기획재정부의 집계로도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감세정책으로 인한 누적감세 규모는 88조 원을 넘는다.
참여정부 말기에 청와대는 '비전 2030'이라는 한국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재원조달 대책도 없는 장밋빛 엉터리 계획이며, 재정건전성을 크게 해칠 것이라고 비판했었다. 그랬던 그들이 집권 후 가장 짧은 기간에 역사상 최악의 재정적자를 기록했다. 그것도 국가복지의 확충이나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청사진을 집행하느라 그런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교리인 부자감세를 철저하게 실천하느라 국내총생산의 10%가 넘는 대규모 재정적자를 낸 것이다. 이런 가운데, 당장에도 민생을 위한 복지재정이 축소되고 있는 바, 재정건전성을 교조로 삼고 있는 현 정부에서 나머지 집권기간에도 복지재정의 확대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국 국가복지의 퇴보가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고 현 정부 하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일반민주주의의 퇴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명백하게 민주주의가 손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이는 부분적인 현상이며, 일반민주주의의 본질적인 훼손과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이 정부 하에서 정말로 훼손되고 있는 것은 사회정의와 민생민주주의다. 현 정부 들어, 신자유주의가 광폭하게 실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회양극화는 심화되고, 민생은 고통과 불안에 깊이 빠져들고 있다. 민생민주주의를 의미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크게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기본적으로 중요한 대립구도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민생, 즉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다.
현대 사회복지의 이론적 기초로서의 시민권(Citizenship) 개념을 확립한 저명한 사회학자 마샬(T.H. Marshall, 1893-1981)은 시민권을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에서 파악하였는데, 이를 사회구성원들이 국가에 대해 누리는 세 가지의 권리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공민권(Civil rights)으로 언론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계약의 자유, 신체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의 자유권이고, 둘째는 정치적 권리(Political rights)로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이고, 셋째는 사회권(Social rights)으로 복지국가에서 보편적, 적극적 복지를 통해 인간적 삶을 보장 받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민권이 완성되는 최고의 단계는 사회권의 제도적 보장인데, 북유럽을 포함한 유럽 선진국들은 그 구성에서 더러 차이는 있겠으나 이미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초까지 대부분 이를 달성하였다.
즉, 유럽 선진국들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197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 달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정권이라는 기나긴 압제의 어두운 시기를 보냈다. 이에 대항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민주주의의 거목이 탄생했으며,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지난한 투쟁이 87년 6월 항쟁과 이후 20년에 걸친 일반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을 거치게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민주주의, 일반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서거하신 두 분 전 대통령은 중대한 기여를 하셨고, 이제 한국의 이러한 민주주의는 특정 정권이나 일부 정치세력의 반동적 노력으로 되돌려지는 그런 단계를 충분히 경과하였다.
문제는 시민권의 세 번째 단계인 사회권의 확보다.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진입을 통해서만 달성이 가능한 '사회경제 민주주의'의 쟁취다.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 시기에 대대적으로 확충되고 제도화된 우리나라의 국가복지는 이전에 비해서는 패러다임 전환적 사건이라 해도 좋을 만큼 양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적극적 복지국가에는 질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며, 신자유주의에 충실한 경제사회정책은 복지국가에 역행적인 것이었으며, 결국, 부분적인 사회권의 확충에 그치고 만 것이었다. 참여정부 시기에도 온정적 복지 확충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권의 답보 상태가 지속되었으며, 경제사회의 신자유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명백하게 민주주의 훼손의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퇴보와는 다른 것이며, 절차적 민주주의의 위기와는 무관한 것이다. 정작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생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 사회권의 제도화를 통한 시민권의 완성, 즉 역동적 복지국가가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우리 국민들은 지금 실체적 민주주의의 퇴보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 지난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때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그의 눈물, 그리고 현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담긴 그의 일기는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퇴보에 대한 분노이자 엄중한 경고였다. ⓒ사진공동취재단 |
한국 민주주의의 거목 또는 가장 존경할만한 두 분의 정치 지도자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두 민주주의 정치 지도자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면서 장차 이 땅에서 살아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분들이 이루어 놓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과를 이어받아 이를 더욱 심화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 길은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 극복을 통한 사회경제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시민권을 높은 단계에서 완성하는 것이다.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한 번 주변을 둘러보자
민주당은 두 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어버이를 잃은 고아 처지에 놓였다. 당분간 동정표를 더러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에서나 제 역할을 할 줄 아는, 전체적으로는 '시장만능주의자들을 상당 수 포함하는' 중도보수 성향의 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불과하다. 민주당의 주류는 역사적 뿌리는 다르겠으나 현재에 이르러 본질적으로는 한나라당의 주류와 큰 차이가 없다. 결국, 현재의 민주당이 주도하는 정치 지형에서는 사회적 시민권의 완성체인 '역동적 복지국가'를 이룰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진보정치세력으로 눈을 돌려보자. 현재 민주당이 주도하는 반MB연대에서 진보정당들은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여있다. 당분간 추모 분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반MB연대의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가 더욱 도드라지면서 진보정당들은 더 어려운 시기를 보낼 개연성이 크다. 그런데 이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과연 지금의 진보정당들이 '신자유주의 극복을 통한 사회경제 민주주의'의 달성을 주도할 능력이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국민들, 심지어는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마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매우 회의적이다. 시민사회는 진보정치 자체에 대해 무기력하거나 또는 냉소적이다. 특별한 입장과 대응이 없다.
단언컨대, 민주당의 중도보수 자유주의나 친노정치세력의 사회자유주의는 사회적 시민권의 제도적 완성을 의미하는 '역동적 복지국가'를 향한 우리 사회의 대안이 되기 어렵다. 이유와 경과야 어찌되었든, 이들 두 정치세력의 성격은 이미 지난 정부 1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공고화로 모두 드러났다. 특히, 친노정치 세력이 주장하는 사회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가 진보의 탈을 쓴 것에 다름 아니었다. 사회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장관 재임 시기에 신자유주의 보건복지정책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당시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들로부터 최악의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선정되었다. 특히, 그가 추진하였던 의료민영화 입법은 이명박 정부가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의료선진화 방안의 하나다.
결국, 그래도 믿을 곳은 진보정치다. 진보정치가 한국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에 대한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기존 진보정당들은 낡고 편협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환골탈태를 해야 한다. 사회경제 민주주의를 달성해가는 투쟁의 과정에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걸출한 민주주의 정치 지도자들이 생겨나야 한다. 사회적 시민권을 완성해 가는 새로운 민주주의, 역동적 복지국가를 여는 진보정치 세력, 그리고 걸출한 정치 지도자, 희망을 버리지 않고 진보정치를 지지하는 노동자와 서민을 포함한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 진보정치의 혁신과 개혁에 대한 시민사회의 지도자, 활동가,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들의 실천적 참여가 절실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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