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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민권이 골프장 회원권인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값비싼 국적

값비싼 國籍

외국인의 아이라도 한국 땅에서 출생하면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을 속지권(屬地權)이라 한다. 한편 한국인의 아이는 외국 땅에서 태어나더라도 역시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을 속인권(屬人權)이라 한다. 이 두 가지는 국적 취득 요건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또 하나 중요한 요건은 귀화(歸化)다. 속지권과 속인권이 출생 때 정해지는 조건인 데 반해 귀화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현대사회에서 점점 비중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귀화를 통해 떠나는 사람이 들어오는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지만, 근래에는 '독일제 한국인' 이한우 씨를 비롯해 귀화 입국자도 늘어나고 있으며 해외동포의 국적 취득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50여 년 만에 크메르에서 돌아온 이남이(훈) 할머니는 귀화가 아니라 '국적 회복' 절차를 통해 한국인이 됐다. 우리나라 귀화 기준은 너무 까다롭다. 5년 이상 합법적 체류를 한 뒤에야 귀화 신청이 된다. 李 할머니처럼 원래 한국인인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국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귀화보다 손쉬운 방법으로 국적 회복을 시켜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국적 회복의 길은 넓고 쉬워야 한다. 해외동포 중에는 좋아서 떠나간 것이 아니라 나라가 나라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떠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많다. 이들 중에 국적회복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회-경제적으로 웬만큼 부담이 되더라도 최대한 받아들여야 한다. 해외동포의 포용은 민족통일의 첫 발짝이기도 하다.

해외동포 정책을 보면 우리 정부는 통일의 자세가 돼 있지 않다. 법무부는 내규를 통해 독립유공자의 자손이나 직계 존비속이 생존해 있는 경우 등 극히 제한된 경우에만 국적 회복 신청을 받아주고 있다. 이남이 할머니도 원칙대로라면 신청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분 못지않게 고국을 그리는 동포들을 우리 정부와 우리 사회는 외면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이중국적 허용을 얘기하고 있다. 이중국적은 국제법상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국적 부여에 관대한 나라라도 다른 나라 국적을 얻는 사람에게는 국적을 정지시켰다가 그 국적을 포기할 때 자동적으로 회복시켜주는 것이 통례다. '우수한' 사람들에게는 외국 국적 위에 한국 국적을 보태 주려 하면서 한국인이 되고 싶어 하는 동포들은 못 본 체하다니, 시민권을 골프장 회원권 같은 것으로 아는 모양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미국 비자 받는 사람들은 줄을 섰다. 필자는 꼭 한 번, 1986년 이 줄에 서 봤고, 그 끝의 인터뷰는 군대 제대 후 최악의 치욕감을 느낀 경험이었다. 이태 후 미국에서 다시 초청이 있을 때 이 줄 서기 싫어 안 가려고 했더니 마침 그 때 만난 대구 미국문화원장이 비자를 대신 받아주었다. 개인의 치욕 대신 국가의 치욕을 느낀 경험이었다. ⓒ연합뉴스

10년 전 나오던 이중국적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있다. 정부가 해외 우수 인력 유치를 위해 이중국적을 허용할 방침이라는 것이다.

"해외 우수 인력"이라 하지만 진짜 외국인 얘기가 아니다. 외국 국적을 딴 한국인과 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의 자손, 즉 해외 한민족을 염두에 두고 추진하는 정책이다. 그리고 해외 한민족이 많이 분포한 나라 중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미국뿐이다. 이중국적은 양쪽 나라에서 인정해야 성립하는 것이니, 이 정책은 한국산 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해외 한민족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바로 6자회담 참여국들이다. 그런데 중국, 일본, 러시아의 세 나라에는 해방 전부터 많은 한민족이 거주하고 있었고, 지금 거주하는 한민족의 대다수가 그 후손들이다. 미국에는 이와 달리 해방 후 한국인 이주가 시작되어 새로 만들어진 교민사회가 자리 잡았다.

해방 전 한민족의 이주는 영세민 위주였다. 농토 개간할 곳을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몰래 넘은 사람들, 막노동이라도 나은 임금을 받고자 현해탄을 건넌 사람들, 만척(滿拓)의 모집에 응해 가재도구를 이고 지고 만주 땅 곳곳으로 퍼져 나간 사람들이 식민지시대 한민족 해외이민의 주축이었다. 그들의 이주가 나라를 못 가진 설움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해방에 임해 절반이 넘는 200여만 명이 귀국한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다. 국내 형편도 막막한 시절이었지만 그들은 일본 통치가 종식되었다는 사실에만 의지해 그 동안 현지에 내렸던 뿌리를 거두고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미국으로의 길은 유학생들이 열었다. 초기 유학생들의 고생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접시닦이를 비롯한 그 고생담은 차원 높은 고생담이었다. 괜찮게 사는 집의 1류 대학 나온 자제들이 좋은 직장 들어가는 대신 미국까지 가서 궂은 일 하는 것이 중류 이상의 국내 가족들에겐 눈물겨운 일이었지만, 당시 한국의 대다수 인구가 처해 있던 상황에 비겨 보면 배부른 투정이었다. 귀국한 유학생이 시내 나갔다가 볼일이 급하자 택시를 집어타고 반도호텔 화장실로 달려가더란 이야기도 나돌던 시절이었다.

미국으로의 대거 이주는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 이민은 해방 전의 이민과 성격이 크게 다른 것이었다. 미국은 땅 없는 농민도 막벌이 노동자도 한국으로부터 이민을 허용하지 않았다. 세탁소 하나라도 경영할 자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이민을 허락했고, 한국에서는 제법 사는 편의 사람들이 이민 길에 올랐다. 그들은 한국에서 살아갈 길이 없어 미국으로 내몰린 것이 아니었다. 더 나은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나은 자녀 교육을 위해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1~2세대로 구성된 재미 한민족은 보통 이주 후 4세대가 넘는 일본, 중국, 러시아의 동포사회에 비해 재산과 교육의 평균 수준이 비교가 안 될 만큼 높다. 거기에 미국의 뛰어난 학술과 기술 수준, 그리고 한국을 최근에 떠났기 때문에 한국과의 연결이 튼튼하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우수 인력"으로 활용할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개연성의 차이가 기본권에 있어서의 배타적 특권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일까? 똑같은 활용 가치를 가진 조선족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면서 미국 귀화인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특권이다.

21세기 초 한민족의 과제는 '통일'이다. 더 실질적인 표현으로는 '통합'이다. '통일'이란 민족이 막 분단되던 시점에서 이에 저항하는 표현으로 나온 것인데, 분단이 60년간 엄연한 현실로 계속되어 온 이제 이 말에서는 현실을 뒤집어엎는다는 폭력성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보다는 민족정체성을 자연스럽게 키워낸다는 '통합'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고, 통일은 통합이 어느 수준 이상 이뤄질 때 기회가 저절로 생길 것을 바라봐야겠다.

남북의 주민 집단만이 아니라 해외 한민족도 뭉쳐질 주체에 포함된다고 생각할 때 '통합'이란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통일'은 두 개 주민 집단만을 염두에 두고 써 온 말이다. 그런데 두 집단 사이에는 많은 모순이 쌓여 있고, 양자 간의 절충으로 이 모순들을 극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두 집단에게 제삼자라 할 수 있는 해외 한민족이 '통합'의 흐름을 함께 만들어줄 때 모순의 해소도 훨씬 쉽게 될 것이다.

해외 한민족을 민족 통합의 흐름으로 불러들여야 할 지금, 정부의 이중국적 정책은 해외 한민족 집단들을 서열화함으로써 모순과 갈등을 키우는 짓이다. 지금 국내에 수십만 명의 조선족이 들어와 있고, 그 대부분이 밑바닥 일자리를 맡고 있다. 한국 국적을 가지지 못한 설움을 일상적으로 느끼며 지낸다. 고급 직종이 아니라서 "우수 인력" 대접을 못 받는 그들 중 소수의 전문기술 인력조차 국적 정책에서 미국 국적자들에게 차별을 당한다면 그들은 한국을 어떤 나라로 볼 것인가?

현 정권의 미국과 일본에 대한 짝사랑 정책의 문제점은 여러 각도에서 비판을 받아 왔다. 이중국적 정책은 두 가지 이유로 그중에서도 특히 엄혹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첫째 이유는 국적 부여의 기준이 바로 국가 정체성의 근거라는 사실에 있고, 둘째 이유는 민족 통합의 과제를 등지는 정책이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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