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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싫다, 자유민주주의라야 한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⑧

식민지로부터 해방될 때 대다수 한국인들은 민주국가를 원했다. 이 염원의 성취에 대한 기대는 북한보다 남한에서 더 컸다. 북한을 지원한 소련이 스탈린 전체주의에 묶여 있는 나라인 반면 남한을 지원한 미국은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 후 40여 년 동안 남한도 북한과 큰 차이 없이 '민주주의'를 간판에만 내건 채 극심한 억압체제를 유지했다. 민주주의를 실행할 내부 역량도 미흡한 데다가 미국도 민주국가보다 반공국가의 역할을 한국에게 더 바랐기 때문이었다. 1987년 한국의 민주화가 궤도에 오른 것은 미국의 도움이 아니라 한국인의 노력이 쌓인 결과였다.

교과서포럼의 <대안 교과서>는 서론(1부 1장)에서 근·현대사 공부의 목표로 첫째로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다음에 경제 성장을 꼽았다. 그러나 4부에서 6부까지 대한민국 시기를 서술함에 있어서는 그 순서가 뒤집혀 있다. 이승만 시대를 다룬 4부의 3개 장 11개 절 중 민주주의를 다룬 것은 "민주주의의 진통"이란 제목의 3쪽짜리 절 하나뿐이다. 박정희 시대를 다룬 5부의 4개 장 16개 절 중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다. 1987년 이후를 다룬 6부에 와서야 민주주의 관계 서술이 제대로 나타난다.

뉴라이트가 물신을 숭배하는 유사종교임은 경제적 가치 이외의 모든 인간적·사회적 가치를 말살하려는 자세에서 알아볼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딱 하나 그들이 가볍게 내치지 못하고 받드는 시늉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것까지 우습게 보는 본색을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반발이 감당 못하게 클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 교과서>에서도 서론에서는 민주주의를 앞세워 놓았지만, 실제 서술에서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액세서리일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민주주의를 얘기해도 꼭 '자유'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냥 민주주의는 뭔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자유민주주의. <야후 국어사전>에는 "자유주의를 전제로 한 민주주의"라고 설명되어 있다. <위키피디아>의 설명("liberal democracy")은 조금 다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그 정부가 꼭 자유주의 이념을 따른다는 뜻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헌법을 통해 개인의 인권을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뜻이다." 현 정권의 자유민주주의 이해는 <위키피디아>보다 <야후 국어사전>을 따르는 모양이다. 아니면 <야후 국어사전>이 우리나라의 용례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의 뜻을 설명한 모양이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폭력성을 극복하는 '비폭력성'에 그 근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에나 많은 정치적 결정이 필요하고, 어느 결정에서나 상당수 구성원들의 욕구가 배제된다. 되도록 적은 욕구가 배제되게 하고, 배제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폭력성을 최소화하는 데 민주적 절차의 효용이 있다.

자유주의는 약자의 보호보다 개인이 권리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폭력 해소에 역점을 두기는커녕 힘을 존중하는 입장이며,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방향이다. 그래서 내 방종한 생활태도를 보고 마치 칭찬이라도 하듯이 "자유주의자" 딱지를 붙여주는 사람이 있을 때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다. <위키피디아> "liberal democracy" 필자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에 대해 나와 비슷한 이해를 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학술적으로 어떻게 정리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상식적으로 합당한 이해일 것이다.

뉴라이트의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자유주의를 전제로 한 민주주의"일 것이다. 자유주의를 민주주의에 앞세우는 것이다. 이승만 시대를 자유민주주의 시대로 보고 1987년 이후를 사회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 시대로 보는 시각은 자유주의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할 것이다.

▲ 17일 학생과 작별 인사를 하는 서울 유현초등학교 설은주 교사. "우리가 걸어온 민주화의 길은 그리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별별 꼴 다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30년을 꺾으라고? 일제고사 안 쳐도 된다는 얘기 했다고 파면, 해임? 그래, 좋다. 부형들이 표 잘못 찍어서 경제 파탄나고 사회 양극화되는 거 어쩌겠냐? 하지만 죄없는 너희들을 일제고사 앞에 한 줄로 다시 세우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다." ⓒ프레시안

폭력국가의 청산

인류의 모든 제도가 그렇듯 '국가'도 현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다음 그 의미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덧붙여지면서 표준적 형태를 갖추게 된 하나의 제도다. 중국에서는 근 3000년 전부터 '천명(天命)'에 입각한 국가론이 나타나 근세까지 동아시아지역에 통용되었다.

서양에서도 그리스와 로마에서 국가론이 나타났었다. 그러나 동양처럼 국가론이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있다가 근세에 들어와서야 새로운 국가론이 안정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국가론을 바탕으로 형성된 근대국가의 형태가 유럽인의 세력 팽창을 타고 전 세계로 확산되어 오늘날 세계가 200여 개 국가로 쪼개져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국가론의 존재는 사회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매우 요긴한 조건이다. 뚜렷한 국가론이 없던 중세유럽은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영토와 인민은 영주의 재산으로 인식되었고, 재산을 다투는 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왕이나 황제 칭호를 가진 대영주들의 영토는 교환, 탈취, 상속, 지참금 등의 경로를 통해 수시로 크기와 모습을 바꿨다.

중세 후기부터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실력을 갖춘 시민계층이 성장하면서 일방적 통치의 주체였던 국가가 국민에게 책임을 가지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제일 먼저 떠오른 책임은 질서 유지였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국가의 강제력을 합리화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상호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8세기부터는 민권과 인권의 보호라는 책임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와서는 국민의 복리 증진이라는 더 적극적인 책임도 복지국가의 이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45년 당시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는 경제 개발과 산업화의 수준 못지않게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이해수준에 큰 차이가 있었다. 선진국의 국가 개념이 민주국가에서 복지국가로 나아가고 있을 때, 후진국에서는 폭력에 근거한 권위주의 체제가 판을 치고 있었다.

"한국도 이런 신생국의 하나였을 뿐일까?"

1945년 가을 유엔 출범 때 회원국은 51개였다. 당시 존재하던 국가 중 패전 9개국과 중립 8개국 외의 거의 모든 나라가 참여한 것이었다. 중국과 타이완이 자리를 바꾼 1971년까지 회원국은 132개가 되었다. 16년 사이에 세계의 국가 수가 곱절로 늘어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생겨난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이었다. 대부분은 국가 경영이나 안정된 정치의 경험이 없고, 독립의 역량이 없는 채로 정세에 떠밀려 독립한 나라들이었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면서도 민주공화정 시행 여건을 갖추지 못한 나라들이 많았다. 그런 나라들은 독재와 혼란 사이에서 장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도 이런 신생국의 하나였을 뿐일까?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민족국가 규모의 국가 경영 경험을 유럽 국가들보다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식하는 국가론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지식층과 지도층의 정치·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도덕적 전통도 가지고 있었다. 대다수 신생국들에게 없던 정치 역량이었다. 그런데도 남한과 북한이 모두 오랫동안 권위주의적 독재정치에 빠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일본은 패전국이면서도 국체를 거의 그대로 지켰다. 동·서독의 분할만이 아니라 독일 민족의 많은 거주 지역을 떼어내야 했던 독일과도 대비되는 일이다. 이 차이는 일본이 섬나라라는 조건과 미국이 단독으로 관리했다는 상황도 작용한 것이지만, 일본이 뚜렷한 전통적 국체를 지켜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은 1911년 왕조체제 폐지 후 중화민국이 전통적 국체를 잘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시점에서는 국민당의 권위주의 체제로 낙착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 천명론에 보다 가까운 공산당의 도전이 국민당 정권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그 후 중국은 공산국가면서도 천명론이 가미된 독자노선을 따라 공산권 붕괴라는 충격을 뚫고 비교적 연속성 있는 발전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이웃 두 나라에 비해 한국의 전통적 국체가 잘 살아나지 못한 데는 두 가지 까닭이 있다. 하나는 35년간의 식민지 상태로 전통이 단절된 것이고, 또 하나는 냉전의 최전방에 묶여있던 상황이다. 두 가지 조건이 합쳐져 전통의 회복을 가로막아 왔지만 전통이 아주 말살되지는 않았다. 민족국가 전통의 회복 조짐이 냉전체제 해소 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일본인의 한국사 왜곡에는 두 개의 층위가 있었다"

일본은 한국을 지배한 35년 동안 한국을 식민지로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은 거의 수포로 돌아갔다. 해방 후 한국에서 일본 지배기를 그리워하며 반민족적 행태를 보인 사례는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른 극소수의 태도에 그쳤다.

일본 지배자들의 노력이 통합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민족국가 전통에는 많은 손상을 입혔다. 가장 대표적인 측면이 역사 왜곡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정치 무기로 개발된 근대 역사학을 들여와 민족 전통 훼손의 도구로 쓴 것이다.

일본인의 한국사 왜곡에는 두 개의 층위가 있었다. 쉽게 드러나 보이는 것은 얕은 층위의 '가치 훼손'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훼손은 보다 깊은 층위의 '가치관 훼손'이다.

조선의 '사대주의'에 대한 비방을 예로 들어 보자. 조선인의 독립성이 일본인보다 약하다는 비판이 가치 훼손이라면 사대·자소 관계 자체를 폄훼한 것은 가치관 훼손이다. 일본은 조선 개항 때부터 만국공법 체제를 조선에 강요하며 전통적 사대 관계를 부정했다. 만국공법 체제는 허구의 평등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가림으로써 제국주의 시대의 약육강식 정당화에 이용된 논리였다. 오늘날의 시장만능주의와 같은 틀이었다. 이 이질적인 논리의 강요로 인해 사대관계와 연결된 전통적 가치관은 연속적 발전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

해방 후 남한의 과거 청산이 부진했기 때문에 식민사관의 청산도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사관의 청산이 부진한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가 깊은 층위의 왜곡, 가치관 훼손에 특히 대응이 미약했던 것이다. 한국인, 특히 애국심을 자부하는 이들 중에 과거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일본을 내세우던 관점을 그대로 따라 한국을 내세우려 드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결과다. '거울에 비쳐진 오리엔탈리즘'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패퇴에 임해 한국 민중은 '조선'의 독립에 환호했다. 그러나 막상 민족국가 조선의 정치적 전통은 식민사관의 꾸준한 폄훼로 인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유교, 사대, 당쟁 등 전통의 중요한 내용들이 망국의 주범으로 누명을 쓰고 있었다. 해방된 민족의 새 국가는 전통의 원리 위에 서지 못하고 그때까지 일본인들이 가르쳐준 기준, 그리고 미국과 소련이 가르쳐주는 방향에 따라 만들어지게 되었다.

"충효 사상을 일방적 지배·복종 관계로 둔갑시킨 유신시대 이념 교육"

한국인들은 자신의 전통, 특히 정치적 전통에 부끄러움을 가진 채로 해방을 맞았다. 그러니 전통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 못지않게 절실한 과제로 여기며 미국과 소련의 지도를 받아들였다.

남한 사람들은 한국이 미국 같은 자유민주국가가 되기를 바랐고, 북한 사람들은 소련 같은 공산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느 쪽에도 미국과 소련 체제에 실제로 어떤 문제들이 내재되어 있는지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적었다. 믿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주의 차원의 낙관에 양쪽 사회가 들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한 일본도, 공산주의를 수용한 중국도, 정치적 전통을 현대국가 운영에 어느 정도 활용했다. 일본의 천황제나, 중국의 천명론이나, 전통의 완전한 회복도 아니고 현대세계 속에서 기형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 이념과 현실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나름대로 해온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전통의 활용이 적었고, 전통이 모습을 나타낼 때는 대개 부정적인 모습이었다. 충효 사상을 일방적 지배·복종 관계로 둔갑시킨 유신시대 이념 교육은 이 전통의 공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통의 부재 내지 역할 상실로 인해 수입된 이념이 절대성을 띠게 되었다. 정치 원리와 현실의 상호작용이 원활하게 일어날 수 없었다. 새 원리 실행의 핵심 장치인 선거는 너무나 많은 조작 방법에 가려져 민의 표출이라는 원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국가와 국민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정치의 의미가 약화되어 정권은 국민 통제를 위해 폭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경찰독재와 군사정권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신생국 중에는 경찰독재와 군사정권을 모면한 나라가 많지 않다. 대부분은 민족국가 운영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 따라 국가를 만들어 독립하고도 자체적 운영능력을 가지지 못한 나라들이다. 한국은 풍부한 경험과 전통을 가지고도 그 대열을 벗어나지 못한 특이한 사례다. 냉전에 얽힌 초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려있던 상황으로 인해 전통의 회복이 늦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개한 수준의 이승만 독재는 한 차례 소요 사태 앞에 무너졌다"

1910년에서 1945년 사이 일본의 한국 통치 방법에는 일본의 정치 분위기에 따라 얼마간 굴곡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억압적인 것이었다. 특히 마지막 10여 년간에는 군국주의 정치와 전쟁 상황을 배경으로 그 억압성이 매우 심했다. 한국인의 눈에는 모든 공무원이 권력자였고 순사와 군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한국의 남북에 국가가 들어선 뒤 정권 담당자들은 이 억압 체제를 물려받아 스스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권 운용의 여건이 여러 모로 미비한 상황에서 후원국인 미국과 소련이 원하는 특정한 방향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데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한국 민중이 해방을 반긴 데는 억압 체제에서 벗어나는 희망에 큰 몫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상황은 후원국의 신임이 국민의 지지보다 권력자들에게 더 중요하게 된 것이었다.

북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소련은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절정에 올라 있을 때였다. 6·25전쟁 때 나타난 북한의 모습은 스탈린 숭배를 비롯한 소련 분위기에 덮여 있었다. 전쟁 후 북한 사회의 모습은 외부에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근년 접촉의 증가 속에 얼마간 나타나는 모습은 경찰독재의 계속을 짐작케 해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산주의 발전의 정상적 단계로 보는 공산국가에서 어느 정도의 억압 체제는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남한은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 교류하며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주주의 원리가 오랫동안 사회에 통용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경찰과 테러조직을 이용해 독재를 행했고, 시민계층은 정치의식도 경제 여건도 미숙한 상태에서 정권을 견제할 효과적인 길을 찾지 못했다.

미개한 수준의 이승만 독재는 한 차례 소요 사태 앞에 무너졌다. 그 후 독재자가 없는 1년 남짓의 과도기가 있었지만, 민주주의가 숙성되어 나오지 못하고 군사독재가 그 뒤를 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비밀경찰로 활용해 사회 통제를 고도로 강화했다. 특히 1972-79년 유신시대의 남한은 피노체트 정권 하의 칠레와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전체주의 사회의 하나였다.

군사정권 아래 남한 시민계층은 성장을 계속했다. 경제적 위치가 안정된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준엄한 통제 밑에서도 정치사상이 꾸준히 자라났다. 사회의 확장된 민주 역량은 1979년 유신체제 붕괴의 기반 조건이 되었다. 그 후 8년간 전두환 정권은 유신체제를 복원하려 애썼으나 사회의 민주 역량은 계속 자라나 1987년 6월 그 울타리를 휩쓸어버렸다. 1960년에 나타난 가능성이 1987년에 실현된 것이다.

"2000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뚜렷한 긴장 완화가 시작됐다"

처음으로 폭력에 직접 좌우되지 않은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구성된 것이 1987년의 일이었다. 남한에서 민주국가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부가 민주주의 원리를 제대로 구현하는 데는 적지 않은 장애물이 널려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장애물은 북한과의 대결 상황이었다. 상대방의 위협은 내부 억압 체제의 핑계가 되어 왔다. 1990년대 초 공산권 붕괴, 한국과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남북한 유엔 가입 등 주변상황의 큰 변화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의 대결 자세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북풍(北風)'이란 유행어가 생길 만큼 대결상황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 드는 세력이 남한에 있었던 것도 이 상황의 연장에 한몫 했다.

2000년 김대중·김정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뚜렷한 긴장 완화가 시작됐다. 몇 해 후 보수파가 행정부와 의회 양쪽에서 모두 주도권을 내놓게 되는 남한 초유의 정치 상황도 다분히 이 긴장 완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보수파는 '상호주의'라는 명분으로 긴장 완화를 늦추려 애썼지만 2007년 노무현-김정일 회담에 이르는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모든 변화의 본질은 평형을 벗어나는 데 있다. 평형에 집착하는 상호주의는 변화에 대한 저항이며, 그 타당성은 변화의 필요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남북간 긴장보다 더 끈질긴 장애가 집단이기주의였다. 민주주의가 원래 이기심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므로 이기심은 민주주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효과적 조정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절충 과정이 필요하다. 1987년 이전 남한의 권위주의 체제는 구성원들의 이기심이 자발적으로 절충되는 길을 공권력으로 막았다. 공권력의 물리적 억압이 사라지자 각자의 이기심이 무절제하게 분출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가장 뚜렷한 집단이기주의의 사례가 이른바 '지역감정'이다. 지역감정은 독재정권에 의해 민의조작 수단으로 이용당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대규모로 나타났고, 군사독재가 종식되자 권력의 공백을 메우며 맹위를 떨쳤다.

남북 간 긴장 완화와 세계화 진행에 따라 국민의 시야가 넓어지면서 지역감정이 퇴조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쏟아져 나오던 불건강한 집단이기주의도 차츰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노동운동의 비정규직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비정규직 문제의 악화에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노동운동의 편협성이 한 몫 했다. 비정규직 문제의 부각은 노동운동의 성숙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7년 이후 20년간 남한의 민주주의는 순탄하지는 않더라도 꾸준한 발전을 쌓아 왔다. 앞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풀어나가고 민족사의 장래를 열어나가는 데 남한의 역할이 북한보다 크리라는 전망은 우월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앞서 이 민주 역량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8000만 민족 구성원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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