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의 지지율이 3주 연속 상승해 30% 중반대로 올라섰단다. 과연 믿을 수 있는 여론조사인가 차치하고라도 참으로 불가사의한 나라다.
국민주권이 위협당하고 '선진화'란 감언이설로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겠다는데도 지지율 상승이라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어쨌든 이명박을 뽑은 국민이니까,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고난과 고통은 일정기간 지나야만 할 것 같다. 이 시간의 길고 짧음도 온전히 국민이 시민으로의 자기 각성에 달린 문제이니만큼 말이다.
오늘부터 잠시 시국 얘긴 접고, 내가 관계하는 우리나라 예술 문화 계통의 얘기를 연속으로 나눠서 하고자 한다.
문화 예술은 21세기 국가 정체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만큼 중대한 사안이다. 일찍이 김구 선생이 '문화의 나라'를 주창한 혜안에서 보듯이 문화발전의 DNA가 예술이고 국력의 내외연이 문화의 힘에서 온다는 사실은 너무나 절박한 명제가 됐다.
이번 올림픽에서 보듯 중국은 세계를 목표로 중국 예술 문화의 자부심과 전파에 국력을 동원하고, 일본은 오래전부터 일본 문화를 하나의 세계문화 체제로 국제화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만 틈새에서 문화 예술의 정체성 혼란을 계속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 예술의 체계적 집적으로부터 국력의 구심과 원심이 펼쳐지는 세계 추세에서 대한민국 스스로 네트워크를 만들어 창의의 시대 전환의 선두로, 예술의 기능과 가치를 적극 고찰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문화부 장관을 맡고 있는 유인촌이 과연 예술 문화의 중요성과 가치를 체현하고 있으며 정책의 실현에 전력을 다 하고 있는가는 큰 의문이다.
주지하다시피 21세기 문화와 예술은 국제 소통능력(global literacy)으로의 역할과 기능이 주어진다. 세계 언어로서의 문화 예술로 세계에 말을 걸 수 있는 능력과 세계와 같이 새로운 삶의 문화 양식을 만들 수 있는 것에 예술 기능의 중요성이 확대되는 현실에서 유인촌에게는 문화부의 수장으로 구체적인 설계와 정책 실현은 안 들리고 안 보인다. 이명박 집단 자체가 큰 걱정이듯 21세기 국가 문화 발전의 지체에 큰 시름이 아닐 수가 없다.
우리나라 예술 문화 계통의 얘기 중에서 먼저 국립현대미술관에 관한 문제부터 제기하고자 한다. 살아있는 현대미술이라면 우리는 이를 통해 현 시대의 여러 단서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안테나'로의 감지 기능을 보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바로 그런 기능의 첨단기지(尖端基地)이자 발신(發信)의 장소로 국가의 예술기구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과연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미술관은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따져보겠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3차례에 걸쳐서 얘기한다.
이 글은 문화부 산하 단체장에 대한 자진사퇴를 요구해 온 유인촌의 사퇴공세나 특정 정권의 코드인사 운운과는 전혀 무관한 논지의 글이며 오직 21세기 국가 진로에 있어서 문화 예술의 중요성을 일깨우고자하는 의도에 글의 참뜻이 있음을 미리 밝힌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 기념관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 기념관이 아니다. 백남준의 거대한 '동상'은 이제 한쪽으로 치워야 한다. 필자가 12년 전인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도록에도 발표했고, 2000년에는 필자의 졸저 <착한 사람들의 분노>(사회문화비평집, 생각의 나무 간행)에도 전재하여 문제를 지적했지만, 여전히 백남준의 거대한 멀티미디어 작품 '다다익선(多多益善)'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실 입구에 '동상'처럼 30년이나 전시되면서 다른 작품 전시를 방해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전 영역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재벌 삼성의 능력과 힘은 국립현대미술관이라 해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정말 미술전시란 무엇일까? 우리나라 현대미술 전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의 잘못된 대표적인 사례가 재벌 삼성이 협찬한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이다.
먼저, 국립현대미술관은 위대한 예술가를 기념하는 '기념 공간'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민 대중이 노동으로 지샌 일상을 달래고 꿈과 희망의 시간을 지니며 삶에 자극을 받는,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일반 대중의 민주적인 장소다. 우대(優大)하고 놀라운 존경스런 작가들만의 대작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경험과 나이가 일천해도 자신의 목소리로 분명하게 자기 얘기를 들려주는 작가들의 역할이 전시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장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보라. 재벌 삼성이 협찬한 어마어마한 텔레비전 모니터 덩어리가 미술관 입구를 수직으로 틀어막고, 갖가지 온갖 그림들을 조각조각으로 눈부시게 반사한지 30년째다.
다다익선. 많을수록 좋다고 했는데, 너무 많아서 이미 넘치고 있다. 너무 많아서 넘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道)는 영원불멸의 도가 아니며, 이름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불멸의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생전에 백남준은 아마 이 뜻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세계적인 작가이고, 올바르고 존경할 만한 작가라면 그는 당연히 겸손한 인간이었음에 틀림없다. 나의 생각대로라면, 그는 이미 도인(道人)이 됐어야 옳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고 흰 수염을 기르고 지팡이로 공중을 짚는 도인이 아니고, 한 나라의, 자기가 태어난 조국에 대한 사랑과 한없는 겸손을 보여 줄 수 있는 예술가로서 도인 말이다.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백남준이 살아 있을 때 내 얘기를 들었다면 금세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자신의 비디오 작품 '다다익선'을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른 공간으로 옮기자고 먼저 제안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없었고,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재벌 삼성의 위세 때문인지 입 한번 뻥긋 못하고 30년이다.
한마디로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은 어지럽다. 멀쩡한 인간의 시지각으로 볼 때 작품 '다다익선'은 대단히 혼란스럽고 요란한 물질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백남준의 장난에 즐거움을 나눠 가질 수는 있지만, 그 장난은 한쪽에서 즐기고 느낄 일이지, 국립현대미술관 건물 전체를 흔들고 박살내면서 만끽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공간의 테러리즘이고 백남준에 대한 이 땅의 콤플렉스가 아직까지 일방으로 통한다는 것이며 그 작품 제작을 후원한 재벌 삼성의 무지막지한 힘이 여전히 무소불위(無所不爲)임을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30년이 넘도록 같은 장소에 언제까지 그 혼란 덩어리의 물질을 방치할 것인가.
다시 얘기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특정 재벌이 협찬한 개인 작품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아니다. 설사 상설(常設)의 의미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 위치에 놓여져서는 안 된다. 세 가지 이유를 들겠다.
첫째, 돌아가신 우리의 예술가 백남준을 아주 무례한 무뢰한(無賴漢)으로, 일정한 직업 없이 돌아다니며 불량한 짓을 일삼는 사람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가로막고 있는 장소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회랑(回廊)이다. 회랑은 마루의 개념으로 '공간'이다. 너도나도 들러서 가고, 만나고, 기다리고, 쉬는 장소다. 그 마루를 한 사람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 마루는 모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마루는 시각적·심리적으로 무미(無味)해야 하며 편안해야 한다. 갖가지 색깔로 요란을 떠는 장소가 아니다. 백남준의 작품이 만인 대중이 생각하고 거니는 공공의 장소를 독점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런 무뢰한이 아니잖는가.
둘째, 전시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 공간으로서의 역할이다. 무엇이든 쓰임에 맞게, 용도를 바르게 해야 가치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여러 가지 전시가 1년에도 수없이 많이 열리는 장소다. 각 전시는 그 나름대로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다. 다른 전시물에 의해 전시된 작품이 방해를 받거나 훼손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다익선'은 엄청난 열량과 빛을 발하는 굉장한 물체다. 그 앞에 서서 쳐다보면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핑핑거린다. 하물며 그 물체의 덩어리가 내쏘는 빛의 세기란. 게다가 그 소리는 굉장한 소음이며 자칫 시청각적인 공해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는 '다다익선'이란 작품을 깎아 내리고 백남준의 작업을 폄하하려는 의도와는 상관없다. '다다익선'은 독립된 하나의 전시물로 그 가치가 있다. 올바른 전시 공간에 놓여졌을 때, 다른 미술 전시물에 방해가 되지 않고 위해(危害)가 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전시물로 고유한 것이라는 의미다.
셋째, 국립현대미술관은 대한민국의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공공의 전시 건물이다. 전시 기획은 마땅히 주체적인 예술 안목을 지닌 전문가들에 의해 엄정하게 진행될 것이다. 국민 대중이 어떤 미술을 예술로 접할 것인가는 오로지 이들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져 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우리 국민 대중들은 그들 전문가들에게 일을 제대로 해 달라고 월급을 주는 것이고, 이름 그대로 '전문가'이기를 바라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나라 어느 유명한 현대 미술관을 가 보더라도 전시관 입구를 사시사철 30년이나 틀어막고, 다른 전시물에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빛과 소음을 내는 거대 물체를 전시해 놓은 경우란 없다. 기획 전시의 개념으로 한정된 시간 동안 거대한 구조물이 전시되는 경우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정된 기간에 일시적인 설치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전시물에 영향을 끼치면서까지 설치된 미술작품을 다른 나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본 기억이 나는 없다.
왜 유독 백남준만은 우리나라 현대 미술관에서 이런 기념비적인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그건 백남준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가였고, 앞으로도 뒤로도 백남준 같은 유명하고 위대한 한국인 예술가는 더 이상 나타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일까.
이 나라 국민들은 현재의 자신을 알아보는 정당한 힘을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됐다. 긴 시간에 걸쳐 남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해야 안심하는 특이 체질의 국민들이 되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스스로의 눈으로 인정하고 확인하는 건강한 눈과 정신을 잃어버렸다. 왠지 나라 바깥에서 설치고 안으로 치고 들어와야 그럴듯해 보이고, 진짜일 거라는 아주 몹쓸 자기 비하에 걸리고 말았다.
백남준이 뛰어나고 대단한 것은, 백남준이 뛰어나고 대단한 것이다. 일찍이 우리 스스로 백남준을 알아 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독일 국적이었던 그가 독일이나 일본에서 미국에서, 백남준이 하나의 미술경향으로 이해되고 있을 때, 우리는 갑자기 그를 아주 어마어마한 선반 위로 떠밀어 올려놓기 시작했다. 이는 신식민지적 사고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어처구니없는 자가당착이다. 이 사고의 굴레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할 때,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미술관은 허울 뿐인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남게 된다.
백남준은 훌륭한 예술가지만 국가 대표 선수가 아니다. 그는 예술가일 뿐, 유명하지 못한 국가가 유명한 사람을 데려다가 유명을 달래는 것으로 이용되는 허울이 아니다. 우리는 백남준을 과공(過恭)할 이유도 없고, 함부로 깎아 내릴 이유 또한 없다. 우리는 한 예술가를 정당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백남준을 기념하는 장소가 아님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백남준 기념관이 아니라는 것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곳은 백남준의 작품이 전시될 수도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백남준의 작품에 미술관 공간이 점령당해서는 안 된다. 백남준을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백남준의 작품이 제대로 전시되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미술관 회랑을 차지하고 있는 '다다익선'은 제자리를 찾아 제대로 전시되어야 한다.
많고 많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가 있어야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백남준의 영상과 소리를 무조건 거쳐서 지나가야만 한다.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 전시 설치가 근본에서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 보여준다. 공간과 전시물의 배치가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다. 이제라도 백남준을 통한 한국현대미술의 동상은 다른 장소로 이전되어야 옳다. 재벌 삼성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의논하여 백남준 '동상'을 옮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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