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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있어 위안이 됩니다"

석원정의 '우리 안의 아시아'<20>이주노동자를 돕는 평범한 한국인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아름답게 반짝이던 남산타워를 보고 한국을 동경했다는 네팔청년 미노드 씨는 한국에서의 첫 직장이 일식집이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그보다 나이 많은 여성종업원들이 다수였는데, 붙임성 좋은 미노드 씨와 다들 친근하게 지냈다고 한다. 지금이야 '신토불이'를 외칠 정도로 한국음식과 한국문화에 푹 젖어 있지만 한국생활 초기에는 미노드 씨도 고향과 가족이 그리워 향수에 젖어들곤 하던 이주노동자였다. 한가할 때 다른 종업원들과 술 한 잔 할 때면 한국인들이 그에게 '고향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묻고, 그 악의 없는 질문이 가슴에 파고들어 술김을 빙자해 눈물 방울 글썽이면 이번에는 물어보던 한국인들이 함께 울어주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미노드 씨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주노동자 상담을 하다보면, 우리 안에 똬리 틀고 있는 천박성과 폭력성에 화가 나다 못해 서글퍼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마 오로지 그런 일들만 겪는다면 정신이 온전하게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은 또 나름대로 균형추를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균형추가 대체로 한쪽으로 쏠려서 제 구실을 못하기는 하지만 아주 가끔씩 제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아주 가끔, 그리고 아주 조금 안겨주는 그 기쁨 덕택에 수백 수천 배의 균형이 무너진 순간들을 참고 살아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이주노동자 상담을 하다 보니 의외로 아무 계산 없이 이주노동자를 도와주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요란스레 매스컴을 타지도 않고 아무도 인권상 후보자로 거론하지도 않지만, 그저 일상에서 이주노동자들과 삶을 함께 나누고 있다.
  
  우리 단체를 찾지 못해 헤메는 파키스탄인을 위해 영업시간임에도 건물 4층까지 그를 데리고 와주었던 어떤 택시기사, '길가는 행인인데 어떤 외국인이 핸드폰을 바꿔주고 얘기 좀 해달라고 하는데요'라며 가는 길을 멈추었던 어떤 청년, 이전의 공장에서 임금을 못 받았다는데 어떻게 도와주면 되느냐고 하던 사업주, 그리고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경기도 광주시 모처에서 양품점을 하는 K라는 30대 중반의 여성도 있다.
  
  우리 단체가 K 씨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한국어를 잘 못하는 파키스탄인들 때문이었다. K 씨의 가게 근처에 파키스탄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K 씨는 그들을 포함하여 남성들에게 속옷류를 주로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들과 자연히 친해졌고, 네다섯 살 된 아기가 있는 K 씨를 이 외로운 파키스탄인들은 '누나, 누나'라고 하면서 따랐다. 선량한 한국인에 속하는 K도 그들에게 잘 대해주었고, 그러자 점차 파키스탄인들은 K 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하면서 정말 누나 동생들처럼 지냈다.
  
  그리고 사업장에서 생기는 여러 종류의 문제들을 K 씨에게 털어놓으면서 상의하기도 하고, 상담소를 찾아야 하는데 한국어가 미숙할 때에는 전화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K 씨는 여러 파키스탄인들을 우리 단체로 연결해주었다. 처음 K 씨의 전화를 받았을 때, 만약 K 씨가 남성이었다면 우리는 먼저 브로커가 아닐까 의심했을 것이다. 가끔 브로커들이 이주노동자와 인권단체 사이에 떡하니 자리 잡고서는, 문제가 생기면 인권단체까지 동행해주고 통역해주고, 그런 내막을 모르는 인권단체가 동분서주하면서 진심을 다해 문제를 해결해놓으면 그를 핑계로 이주노동자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일도 있고 해서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이나, 외국인을 도와준다는 한국인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경계심이 생겨난다. K 씨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우려를 일부 가시게 했는데, 그 이후 여러 차례 접촉하면서 보니까 정말 아무런 계산 없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동대문운동장 근처 어딘가에는 이란인들이 '엄마'라고 부르던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있었다. 가게를 하신다고 했는데, 짐작컨대 길가에서 음료, 담배 등을 파는 자그마한 가게인 것 같았다. '노루즈'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이란인은 산재를 당해 손가락 하나가 잘렸는데 일자리를 찾기는 어렵고 귀국하자니 '손가락 잘리게 한 한국사람 손가락을 잘라서 와야 한다'는 부인이 무서워서 갈 수 없다던 사람이었다. 노루즈 씨는 가끔 우리 단체로 전화해서 '혹시 어디 일할 자리 없는지'를 물으면서 신세한탄을 하곤 했었다. 한국어가 미숙한 노루즈 씨는 가끔 그 아주머니에게 부탁하곤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만이 아니라 여러 이란인들이 그 아주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화기를 타고 들리는 목소리도 푸근하니 엄마의 목소리 같은 분이었다.
  
  이들은 장삼이사(張三李四)라고, 말 그대로 그저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다. 그런 이들이 외국의 노동생활에 지친 이주노동자들과 지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느라 또 다시 지쳐버리는 한국인 지원활동가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어쩌면 이해관계가 섞이지 않아 따뜻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거나 '우리 친구 아이가!'에 해당사항 없고, 배려해줬다고 그 배려 돌려받을 기약도 없건만, 무상으로 베푸는 이런 이들과 만나는 날은 행운의 날이 된다. 그럴 때면 상처받은 '한국인의 마음'이 조금은 아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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