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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납치사건에서 `남는 의문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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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납치사건에서 `남는 의문점'들

[DJ상보 1] 중정과 박정희는 개입했을까?

5일 외교문서 공개로 김대중(金大中. DJ) 납치사건의 일각이 드러났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남아 있다.

특히 외교문서는 한일 양국이 김대중 씨 납치사건을 진상규명이 아닌 정치적으로 해결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던 사실만을 `웅변'하고 있어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1973년 11월2일 도쿄(東京) 수상관저에서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 간의 회담으로 일본내 특별수사본부가 해체되면서 국내 정보기관의 개입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중앙정보부 소속의 김동운 1등서기관에 대한 수사는 중단됐다.

회담에서 DJ 납치사건 수사는 우리측에 일임했지만 유야무야되면서 김 서기관의 사건 연루와 공권력의 개입 여부에 대한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못했다.

우선 첫 번째로 중정과 나아가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개입했느냐의 여부가 가장 큰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일단 이와 관련해 외교문서 상에서 관련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직후 우리 정부는 일관되게 `정부와는 관련없음'을 주장했다.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사전절차 격인 1973년 11월1일 김용식 외무부 장관이 "김동운 서기관의 김대중 납치사건 혐의와 관련, 정부는 김 서기관의 직을 면하고 수사를 계속하기로 하며 그 결과에 따라 의법처리하겠다"고 발표하고 나서도 우리 정부는 공권력 개입을 부인했다.

다음 날 김종필 총리가 다나카 수상과의 회담에서 "이 사건에서 공권력의 개입은 절대로 없었다"고 재차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씨 납치에 우리 정부의 공권력, 특히 중정이 개입한 듯한 `심증'은 짙다.

아무리 타국의 사법기관이 자국의 외교관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는 게 외교관례라고 하더라도 "거리낄 게 없다"고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김 서기관에 대한 일본 사법당국의 조사는 허락했어야 하지만 우리 정부가 이를 불허한 게 우선 미심쩍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공권력의 개입 여부를 밝히기 위해 김 서기관이 납치사건 발생 한 달 전인 7월 중순 흥신소에 김대중 씨의 소재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점과 김대중 씨 납치 도중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목격된 점, 그리고 사건 장소인 도쿄(東京) 그랜드 팔레스 호텔 2210호에서 그의 지문이 발견된 점을 들어 용의자로 지목하고 그에 대한 출두 조사를 요청했다.

김 서기관은 사건 직후 임의로 귀국해 국내에 체류중이었다.

김 서기관에 대한 조사 불응은 우리 정부가 윗선으로 조사가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배어 있지 않았느냐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직 문건의 진위 여부가 정부 당국에 의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1998년 일부 언론에 의해 공개된 국가안전기획부의 극비문건인 `KT 공작요원 실태 조사보고'에는 박 대통령의 개입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거기에는 DJ를 도쿄에서 서울까지 납치했던 경로와 납치에 가담했던 중정 요원 25명과 오사카 부두에서 부산까지 실어나른 용금호 선원 21명의 명단 및 그들의 역할, 나아가 납치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이후락(李厚洛) 당시 중앙정보부장, 그리고 이철희(李哲熙) 정보차장보-하태준(河泰俊) 해외공작국장(8국)-윤진원(尹鎭遠) 8국 공작단장-김기완(金基完) 주일대사관 공사 등의 지휘선이 적혀 있으며, 문서 하단에 `대통령 각하 보고필'이라고도 써 있다. 박 대통령에게 보고를 마쳤다는 얘기다.

두 번째로는 당시 범인들이 김대중 씨를 단순히 납치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살해하려고 했는지가 궁금한 대목이다.

DJ는 생환 후 당시 정명래 부장검사를 본부장으로 하는 피랍사건 특별수사본부에서 쓴 진술서에서 "범인들이 얼굴에서 포장용 테이프를 떼고 눈에는 붕대를 감고 스카치 테이프를 3중으로 감았으며 입에는 나무로 재갈을 물린 채 손발을 결박한 후 오른쪽 손발에 각각 50㎏ 정도의 물체를 매달고 물속에 내던질 듯한 준비를 하다가 중지하므로 잠시 졸다 깨는 순간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고 적고 있다.

말하자면 DJ를 피랍해 오던 용금호 선상에서 바다로 빠뜨려 죽일 의도였다는 얘기인데, 이와 관련해 당시 용금호 선원들은 국내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행기는 없었다. 죽이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상반된 주장이었던 셈이다.

DJ는 훗날 당시 범인들이 자신을 수장하려 했으나 미국의 항공기가 출연해 수장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당시 중정 정보차장보였던 이철희 씨는 만약 DJ를 죽이고자 했다면 해외공작팀이 아닌 다른 팀이 투입됐을 것이라며 부인하고 있다.

세 번째로 DJ 주장대로 미국이 DJ가 오사카에서 용금호에 태워져 부산으로 오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인지하고 비행기를 띄워 수장을 막았느냐는 점도 의문이다.

우선 특별수사본부에서의 DJ 진술서에는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고만 적혀 있다. 그러나 이는 배안에서 눈을 가린 채 있었던 DJ가 귀로 듣었던 소리를 근거로 추정했던 진술이라는 점에서 용금호의 엔진소리를 비행기 소리로 인식했을 수도 있어 사실 판단의 근거로는 미약해 보인다.

외교문서상에 나타난 미국의 `DJ 구하기' 액션은 많지 않다.

외교문서 1973년 8월22일자 보고서에 나타난 윌리엄 로저스 당시 미 국무장관의 "미국 정부는 김 씨 건강이나 구금경위에 대한 관심을 한국 정부에 전하고 있다", 8월31일자 보고서의 포터 미 국무부 차관이 주미 대사에게 "김대중 사건이 복잡하게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게 전부다.

그러나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 씨가 1998년 2월 동아일보와의 회견에서 "사건 발생 다음 날 하비브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박 대통령을 찾아가 김 씨를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렇듯 `본심'을 숨길 수밖에 없는 외교문서로는 DJ 납치사건의 의문점은 물론 전모를 알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의문점 해소를 위해서는 사건 수사가 중정과의 연결고리인 김동운 서기관에서 멈췄다는 점에서 조사는 여기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래야 중정의 개입 여부, 그리고 중정의 직계 보고 라인인 박 대통령의 관여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월 중에 발표될 것으로 보이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DJ 납치사건 조사 결과가 기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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