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4권을 펼쳤다. 김성남(金聖男, 1942~) 항목의 부제가 눈을 잡아끌었다.
"고문조작 이근안의 출세길을 닦아준 서해안 납북어부 조작 간첩사건의 담당 검사."
그리고 그 옆에는 이런 문구가 덧붙어 있었다.
"공안검사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경실련 등 활동하며 검찰·사법 개혁에 진보적 의견 피력."
같은 사람이다. 이근안의 고문으로 조작된 납북어부들을 기소해 징역 15년과 사형을 구형한 검사가, 나중에 경실련 의장이 되고 사법개혁을 외쳤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고,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김대중(1924~2009) 정부의 초대 부패방지위원장에 내정됐다. 이 두 얼굴이 하나의 인생 안에 들어 있다. 이것이 이 인물을 다른 반헌법행위자들과 다르게, 그러나 더 복잡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1942년 평남 개천 출생, 제1회 사법시험의 엘리트
김성남은 1942년 4월 8일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어나 월남 후 전북 군산에 정착했다. 1959년 군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서울법대를 나와 같은 해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제1회 사법시험. 지금의 사법시험과 전혀 다른 시대의 엘리트 코스다. 사시 동기로는 서성(훗날 대법관), 손진곤(훗날 안기부 차장), 정경식 등이 있는데 이 중 세 명이 나란히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1965년 공군 법무관으로 시작해 1968년 부산지검 진주지청 검사로 발령받았다. 1972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버클리) 법과대학원에서 연수를 받았다. 그리고 1975년 9월 서울지검 인천지청 검사로 발령받은 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문제적인 시간의 시작이었다.
세계사 속의 동류, 선의의 협력자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김성남과 비슷한 구조의 인물이 떠오른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말한 "악의 평범성"의 다른 버전이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처럼 괴물이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직업인으로서 맡은 일을 했을 뿐이라는 구조.
미국에서는 매카시즘(1950년대) 시기 평범한 검사와 판사들이 공산주의자 색출이라는 시대의 압력 앞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기소하고 유죄를 선고했다. 그들 중 일부는 나중에 그 시대를 반성하며 민권운동에 참여했다. 김성남은 이 유형에 가깝다. 다만 반성의 말을 피해자들에게 직접 건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반성은 불완전했다.
이근안의 고문, 김성남의 공소장, 그리고 징역 15년
1975년 9월부터 1978년 2월까지 서울지검 인천지청 검사로 재직하는 동안 김성남은 '고문기술자' 이근안(1941~2026)이 경기도경 대공분실에서 조작한 세 사건을 맡았다. 정규용 사건(1976년), 안장영 사건(1977년), 안희천 사건(1977년).
정규용은 1968년 소연평도 근해에서 조기잡이 중 북한에 납치됐다가 귀환한 어부였다. 8년간 조용히 어부로 살던 그는 1976년 7월 영문도 모른 채 경기도경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이근안이 몽둥이로, 무릎으로 짓밟으며 고문했다. 정규용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증언했다.
"길이 1미터 정도 되는 둥근 몽둥이로 머리고 몸이고 가리지 않고 구타했다. 80킬로그램의 이근안이 허벅지를 밟았다. 나중에 온 몸이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정규용은 이근안이 적어준 대로 자술서를 베꼈다.
검사 김성남은 정규용이 고문에 의해 허위로 자백했을 가능성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구속 기소했다. 1976년 10월 인천지법 1심은 정규용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정규용은 12년 11개월 만에 모범수로 감형돼 풀려났다. 2012년 12월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36년 만이었다.
안장영 사건은 더 가혹했다. 안장영은 같은 해 조개잡이 중 세 차례 납북됐다가 돌아온 어부였다. 이근안은 "고춧가루를 물에 타서 코, 입, 눈에 붓고, 꿇어 앉혀 무릎을 밟고, 펜치로 머리카락을 뽑고, 굶기고, 이빨 두 대가 부러지는 자백을 강요했다"는 내용의 탄원서가 법원에 제출됐다. 그런데 검사 김성남은 공소시효가 이미 지난 사실까지 끌어들여 안장영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으로 줄었지만 안장영은 오랜 옥살이를 해야 했다. 2014년 서울고법 재심에서 무죄, 2015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확정. 사건 발생 38년 만이었다.
안희천은 무려 185일 동안 불법 구금된 채 고문을 당했다. 김성남은 안희천이 185일간 불법 구금상태에서 조사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이다. 연행날짜와 구속영장 청구날짜 사이의 차이는 일반인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기소했다. 2013년 재심에서 무죄확정.
이 세 사건은 이근안이 경기도경 대공분실에서 조작한 대표적인 납북어부 간첩 조작사건들이다. 이근안은 이 사건들을 "적발한 공로"로 1979년 청룡봉사상을 수상하고 특진했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어부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동안, 고문수사관은 포상과 승진을 누렸다. 그리고 그 출세길에 김성남의 공소장이 깔려 있었다.
검찰을 떠나 사법개혁을 외치다, 진정성인가, 면죄부인가?
1984년 검찰을 떠난 김성남은 이후 놀랍도록 다른 사람이 됐다. 경실련 시민입법위원장과 중앙위 의장,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 대한변협 사무총장, 국가보안법 폐지론 주장, 검찰독립 요구. 1989년 국회공청회에서 그는 "국가보안법은 너무나 많은 반인권적 상황과 결부돼 왔기 때문에 당연히 폐지 또는 대폭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기소한 사건들이 바로 그 '반인권적 상황'의 산물이었는데도.
2001년 김대중 정부의 초대 부패방지위원장에 내정됐다. 그런데 살인죄로 기소된 윤태식의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그 회사의 주식 스톡옵션을 받기로 한 것이 드러나 자진 사퇴했다. "평생 비난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부패방지위원장 내정자가 살인 피의자 변호 대가로 주식을 받기로 했던 것이 '비난받을 만한 짓'이 아니라는 감각 또한 그의 자화상의 일부였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의 역사에서도 냉전시기 무고한 사람들을 스파이로 기소한 검사나 판사들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이후 공식사과와 배상을 했다. 그러나 당시 기소를 담당했던 법률가들이 나중에 인권 운동의 주역이 됐다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그것은 좋게 보면 반성이고, 나쁘게 보면 면죄부다.
김성남은 피해자들에게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정규용이 36년 만에 재심무죄를 받던 날, 재판장은 법원을 대표해 눈물로 사과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인생을 망친 검사 김성남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가 경실련의장으로 사법개혁을 외칠 때, 납북어부들은 아직 감옥 안에 있거나 이미 삶이 산산조각 난 뒤였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반헌법 행위의 가장 교묘한 형태는 폭력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기소장을 작성하는 것. 김성남은 그 무관심의 구조 안에서 움직였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이 그의 이름을 기록한 이유는 그가 악인이어서가 아니다. 악의 평범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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