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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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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33>

음양오행으로 살펴 본 고구려

음양오행으로 따져보아도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임이 분명하다. 오늘은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는 글로 마련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주몽에 의해서 건국되었다고 기록에 전해지고 있다. 그 해는 갑신(甲申)년으로서 올해가 갑신년이니 정확하게 2040년 전의 일이다. 참고로 백제의 건국을 보면 기원전 18년이니 계묘(癸卯)년-다음 해가 갑진(甲辰)년-의 일이고, 신라의 건국은 기원전 57년이니 갑자(甲子)년이다.

이 세 나라의 건국연대에 대해 삼국사기와 같은 사서에 전할 뿐 그를 고증할 연구 성과가 별 없는 까닭에 신빙도가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평소 우리가 갑(甲)목의 나라라고 얘기해오고 있는 필자로서 세 나라의 건국 연대가 모두 갑(甲)이라는 글자가 가까운 것은 기록의 신빙도를 방증하는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나 신라 모두 건국 당시의 모습은 인구 수천에서 수만에 불과한 부족 국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당시 중국은 유방이 세운 강력한 통일제국인 한(漢) 제국이 위세를 떨칠 무렵이었다.

음양오행은 세상이 600년을 하나의 큰 단위로 하여 변천해감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 멸망이 기원후 668년 무진(戊辰)년이니 전부하면 약 700백 역사이고, 따라서 668년 멸망으로부터 600년을 빼면 기원후 68년이 된다. 이는 대략 고구려 태조왕 재위 기간에 해당된다.

태조(太祖)란 용어는 그 뜻이 건국의 할아버지를 일컫는 것이니, 실질적으로 고구려가 나라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때는 이 당시부터라고 추정되며, 사서에도 이 때부터 고대국가체제의 완성을 보면서 정복국가로 등장했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처음 고구려가 도읍을 정한 곳을 졸본(卒本)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인들이 타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흔히 저지르는 못된 버릇이다. 졸개 내지는 ‘졸따구’의 본거지란 말이니 대단히 고구려를 비하하고 있는 명칭이다. 졸의 원 발음은 ‘홀’로서 고구려어에서 성(城)이나 마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다.

중국인들은 북방의 기마민족을 흉노(匈奴)라 불렀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 속에 흉(兇)한 마음을 품고((勹)있는 비천한 노비((奴)들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주변 민족을 무시하는 태도인가.

중국인들의 하는 짓을 보면 실로 미운 짓이 하나 둘이 아니다. 발해(渤海)란 명칭만 해도 그렇다. 원래 발해란 말에서 앞에 붙은 ‘발’은 우리말의 바다에 대한 고어 ‘’에서 온 것이다. 거기에 그들이 바다 해(海)를 붙여서 발해란 명칭이 된 것이다. 원래 발해 일대에 살던 사람들은 따라서 우리와 같은 말을 쓰던 민족이었으니 바로 고조선의 옛 강토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발(渤)이란 한자는 불쑥 일어난다는 뜻의 한자 발(勃)에다가 바다를 뜻하는 부수를 붙인 것이다. 문제는 발(勃)이란 한자 자체가 정당하지 않은 것이 난데없이 일어나니 마침내 다시 눌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발해 일대에서 일어나는 세력은 당연히 눌러서 진압해야 한다는 뜻을 중국인들은 발해(渤海)란 어휘 속에 담은 것이다.

정리하면 고구려의 도읍지는 졸스런 놈들의 본거지(卒本)이고, 발해 일대에서 세력이 발흥하면 골치 아프니 눌러야 한다는 것이니 이 얼마나 미운가!

다시 돌아가서 고구려는 사실상 태조왕 때에 이르러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으니, 이제부터 고구려의 역사흐름을 보기는 대단히 쉽다.

600년 흐름이니 최고의 전성기는 그로부터 대략 360년이 지난 시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후 68년에서 360년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427년 정묘(丁卯)에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일이 있었다.

갑목인 고구려가 정화(丁火) 불을 보니 발전의 해이고, 이 해가 고구려의 최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정복 사업으로 강역이 최대에 달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최고 강자의 지위로 그 위세를 떨쳤으며, 장수왕이 이를 이어 가장 문명된 국가를 운영했던 것이다.

이제 고구려의 역사흐름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우리가 갑목의 나라이기에 갑자(甲子)란 글자가 오는 해가 언제나 새로운 모멘텀이 된다. (밑에 있는 년도들은 처음의 갑신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갑자년이다.)

BC 37 갑신(甲申)년부터 AD 64 갑자(甲子)년까지 100년간은 고구려의 여명기

AD 64년부터 AD 184년까지 120년간은 고구려의 건설기
(179년 고국천왕이 즉위하여 왕권을 신장했다고 되어있다.)

AD 184년부터 AD 304년까지 120년간은 고구려의 발전기
(이 기간 중, 고구려는 漢四郡과 투쟁하고, 중국 魏의 침입을 받기도 하면서 성장)

AD 304년부터 AD 424년까지 120년간은 고구려의 전성기
(이 기간 중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등장하여 국력을 사방에 떨쳤다.)

AD 424년부터 AD 544년까지 120년간은 고구려의 안정기
(이 기간 중 신라가 성장하면서 왕을 칭하고, 율령을 반포했다.)

AD 544년부터 AD 664년까지 고구려의 쇠퇴기
( 이 기간 중 555년에 신라의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웠고, 고구려는 중국과 길고 긴 전쟁에 들어가 마침내 쇠하게 된다.)

AD 668년은 무진(戊辰)년으로서 토의 기운이니 중국이 힘을 쓰는 해라 멸망

이 표가 바로 고구려 700년사의 단락 구분이다.

백제는 고구려와 건국도 비슷하며, 그 지배 계층의 출신도 유사하다.

따라서 고구려에 이어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통일했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 있어 만주와 한강 중부에 이르는 활달했던 기마 세력이 퇴조하고, 한반도의 남부 농경 세력이 힘을 쓰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로서 우리 역사의 주 무대가 요동 반도와 북만주, 그리고 한반도의 북단에서 한강 이남으로 내려온 것이니 이는 우리 역사 활동의 위축을 뜻하는 것이고 실로 커다란 좌절이었다고 하겠다.

그 이후 우리 역사는 한강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이 이어지면서 그 무대가 한반도 안으로 국한되고 말았는데 여기에는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

그 근본 원인은 한 때 쇠락했던 중국 내부의 세력이 다시 흥기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진에 이어 유방이 세운 전한(前漢)이 무너진 후 후한(後漢)말에 이르러 주변 제 민족이 중국 내지로 진출하면서 소위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를 열게 된다. 이는 대략 AD 304년부터 시작해서 원래의 중국 한족과 때로는 투쟁하고 때로는 타협하면서 AD 600년대 중반까지 길고 긴 남북조 시대를 여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면 중국의 분열 시대였다.

위에 제시된 고구려의 역사구분을 보면 AD 304년부터 고구려의 전성기기 시작되는데, 이는 중국이 여러 주변 민족의 내지 진출로 인해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가 시작된 시기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구려는 중국 기존의 한족(漢族)이 주변 제 민족과 길고 긴 투쟁에 들어갔을 때, 요동과 북만주, 그리고 한반도에 생겨난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커다란 제국을 건설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결국 AD 581년에 수(隋)나라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면서 힘겨운 시련기로 들어선다. 수와는 한판 싸움을 벌려 통쾌하게 승리했지만, 결국 그 뒤를 이은 당(唐)제국과의 길고 긴 전쟁에서 기력을 소진하고 말았던 것이다.

신라는 신흥국으로서 강대한 당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꺾고 한반도의 패자로 등장했고, 나아가 당 제국에 대해 변방을 소란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서 평화를 구축할 수 있었다. 당 나라 역시 한반도가 친중세력이 되어 안정만 되면 더 이상 넘볼 이유가 없었기에 타협이 성립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구려와 수,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은 동북아시아,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거대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했더라면, 중국과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중국과 우리의 국경이 압록강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의 북경 근처에서 그어졌을 가능성도 있으며, 중국 역시 양자강을 경계로 북방 두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하겠다.

물론 역사에 있어 가정법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만, 아쉬운 것은 우리 역사에 있어 신라의 역할이다. 당시 삼국이 서로 생존을 위해 싸웠기에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전선을 구축한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애석한 바가 실로 크다고 하겠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를 들자면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 첫째는 한반도 북단보다는 남부의 기후가 온화하고 벼농사를 비롯한 물산이 풍부하다는 비교 우위가 장기간에 걸쳐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면서 생겨난 결과로 보여 진다. 다음으로 고구려나 백제는 신라에 비해 역사가 짧았던 탓에 시스템에서 오는 피로가 덜 쌓여있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AD 100년경에 왕조국가의 체제를 갖추었지만, 신라는 그보다 훨씬 늦어서 AD 300년경에 가서야 모습을 갖추었고 왕을 칭한 것도 AD 503년 지증왕 때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아무튼 우리 역사는 고구려의 좌절과 함께 한반도 안으로 위축되고 말았던 것이고, 오늘에 와서 중국인들이 고구려 사를 그들의 소수 민족사로 편입하려고 드니 천년도 넘은 원한을 새삼 일깨움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중국은 실수하고 있다.

(알리는 말씀: 음양오행과 명리학 강좌가 새롭게 클라스를 시작합니다. 강좌는 1월 27일, 화요일에 오리엔테이션을 가질 예정이오니 관심 있으신 분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강좌는 화, 목요일 저녁 8시부터 두 시간 씩이며, 3개월간입니다. 장소는 압구정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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