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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감소가 걱정? 입양 적은 사회가 더 바람직"

[해외입양인, 말걸기]<47>입양특례법 재개정 찬성 어려운 이유 ②

지난해 8월 5일, 개정된 입양특례법이 시행된 이후, 방송과 신문을 망라한 언론 매체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양 아동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염려 가득한 인터뷰 기사나 기고문들을 내보내고 있다. 이 보도들은 이러한 상황을 일으킨 한 주범으로 예외 없이 입양특례법을 지목하면서, 입양특례법이 재개정한다고 역설한다. 심지어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위원은 지난달 21일 '책상머리 입양특례법'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입양특례법 개정에 앞장섰던 최영희 당시 국회의원과 이 법의 집행에 책임이 있는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면, 최소한 아기 한 명씩 입양해 키우면 어떨까"란 비난 어린 주장까지 내놨다. 김 논설위원이 지목한 최 전 의원과 진 장관은 모두 1950년생이다. 예순넷. 모르긴 하거니와 거의 손자 손녀들을 두고 계시는 분들이시리라. 이 두 분에게 입양을 하라는 말은 많이 거칠어 보인다. 사회적 난제에 대한 면밀한 검토 끝에 사려 깃든 해법을 제안하는 일이 논설위원의 직무일진데, 격조 있어야 할 보수 신문의 논설위원의 발언치고는 거의 막말 수준이다. 비록 이 땅 요(要)보호 아동에게 가정을 찾아 줘야 한다는 선의로 가득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입양 아동의 감소 추세에 대한 이 선의로 가득한 염려의 관념적 전제는 무엇일까? 입양은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여기는 마음일 것이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진작될수록 좋은 것인데 그게 잘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가정을 상실한 아동에게 가정이 되어 주는 일이란 곤경에 처한 이웃을 내 삶의 품으로 안아내는 일이니, 얼핏 보면 이런 관념적 전제는 자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필자가 보기에는 이는 어디까지나 입양을 개인적 삶의 여정에만 관련짓는 미시적이고 단편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회나 국가가 재생산 체계의 일부로서 아동 양육 시스템을 어떻게 구성할 것이냐는 큰 그림에서 보면, 친생 가족에 의한 아동 양육 방식이 보편적이고, 입양 보호나 시설 보호는 특수하고 예외적인 아동 양육 방식이다. 그리고 사회나 국가는 친생 가족 중심의 보편적 아동 양육 방식을 강화해서 입양 보호나 시설 보호에 노출되는 아동의 감소 내지 최소화를 정책 목표로 삼는 것이 한결 자연스러워 보인다.

지구 위를 걷는 누구든지 지구가 평면인 것처럼 느끼는 것은 감각의 차원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런 자신의 감각에 의존해서 지구를 평면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갈릴레오나 코페르니쿠스 이전 사람과 다를 바 없고, 결국 진실을 왜곡하는 자리에 서게 되리라. 정책 층위에서 볼 때 특수한 아동 양육의 한 방식에 불과한 입양에 보편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입양 아동의 숫자가 감소하는 일에 진정성 깃든 염려를 토로하는 것은, 그 무사려의 수준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 이전 상황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입양이라고 일컫는 '친생 가족과의 완전 결별 형식의 입양'은 장구한 인류사에서 극히 최근의 일이다. 1851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처음으로 법제화된 것이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 의해서 대륙 간 아동의 입양이라는 형태로 광범위하게 실천된 일이다.

혹자는 로마 시대의 황제들이 입양을 통해서 황위를 계승한 것을 들어, 입양이 마치 보편적이고 장구한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마제국에서 실천된 입양은 영아 입양이 아닌 성인 입양이며, 입양은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 혹은 왕위를 계승할 사람을 발탁하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입양 당사자에게는 능력을 인정받는 일이었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입양 당사자는 종종 친생모를 비롯한 자기 식솔을 전부 이끌고 입양 가족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거기에는 오늘날 입양에 깃든 친생 가족과의 완전 결별이라는 잔혹한 심리적·사회적·문화적·지리적 격리에 따른 심연이나 나락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입양 아동에 대한 자비와 온정 혹은 생명 구원이라는 비대칭적 시혜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가족적 삶의 방식과 마을 공동체적 삶의 방식이 산업혁명과 도시문명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융단폭격을 받아 파탄이 나버린 오늘, 우리 시대의 삶의 현실을 외면한 채로 마냥 입양 무용론을 강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종종 환상에 빠져 있는 입양의 관념을 조금은 낯선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중후반 미국과 남미와 유럽을 종횡단하며 서구 근대문명이 떠 있는 관념적 기반에 날카로운 비판을 던졌던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라는 거울에 비추어 서구 근대라고 하는 현재가 얼마나 낯설고 기이한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친생가족과의 완전 결별에 따른 입양'이야 말로, 장구한 인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낯설고 또 선뜻 가슴에 품고 환상에 찬 노래를 부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서구 근대가 발명한 삶의 구성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입양 아동의 증가는 자명한 선(善)도, 우리 사회가 추구하고 성취해야 할 사회적 목표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 다시 말하면 입양이란 결국 '친생 가족과의 결별'에 기초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입양 아동의 최소화가 성취해가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언론과 방송들은 만약 우리 사회에서 국내 입양이 증가한다면 오히려 그것을 염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 7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언론들이 해외 입양의 증가를 걱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왜 그 아이들은 친생 가족의 품에서 자라지 못한단 말인가 하고.

긴 이야기를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가지다. 입양이 증가해야 한다는 이 기이한 전제를 내려놓자는 것이다. 사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덴마크나 네덜란드 혹은 벨기에 같은 인구 500만에서 1000만 수준의 유럽 나라들에서는 연간 국내 입양 아동의 숫자가 10명 내외에 불과하다. 이 나라들의 상황에 비추어서 생각해보면, 인구가 5~10배 되는 우리나라는 국내외입양을 합해 이들 나라에 비해 근 300배나 많은 아이들이 입양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지난 13년 동안 한국에서 국내외로 입양 보내어진 아동은 4만1320명, 연평균 3178명이다.

이런 수치를 단순한 숫자로 생각할 수는 없다. 4만 명이 넘는 아동들과 그 만한 숫자의 어머니들이 이별의 아픔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4만'이란 이 이별과 더불어 시작된 원초적 상처의 아픔과 일생을 관통하는 정체성 혼란과 번민의 질곡에 내몰려야 하는 일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라는 것을 말해주는 숫자이다.

산업생산 시설은 물품 생산과 함께 부수적 효과로 공해를 유발한다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적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화학비료농업을 하면 처음 5년 정도는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 결국 흙에 독성을 축적하고 토양을 착취할 뿐 아니라 농부의 건강을 해치는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이런 부정적 부수 효과는 결국 반(反)생산성으로 바뀌고 마는 변곡점을 지닌다고 경고한다. 입양도 개별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제도의 층위에서 보면, 이런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일견 보기에는 입양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 부수적 효과를 남기는 일일 뿐 아니라, 결국에는 한 사회와 국가의 보편적 아동 양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는 일종의 반생산성으로 작동할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일로 보인다.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회 안전망도 제대로 안 갖추어진 상태에서 아동들이 유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입양 아동의 숫자가 줄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탁상공론이 아니냐고. 당장 이 아동들이 입양이 안 되면 결국 시설로 가서 거기서 자라게 될 것이 아니냐고. 이는 아동을 위한 최선의 사회 안전망이 입양 가족 안전망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빼고는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친생 가족 안전망을 더 시급하게 구축해야 할 우리 사회의 과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주장이다.

"시설엔 105만원, 미혼모에겐 7만원 지원…'친생 가족 안전망'부터 강화해야"

지금까지 좀 당위론적인 얘기를 했다. 그렇다면 실제 우리나라에서 1년에 발생하는 요(要)보호아동 수는 얼마나 되고, 입양이 증가하면 그 이 요보호아동 문제가 해결 가능한지를 통계 지표들을 사용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아래 왼쪽 도표는 지난해 발생한 요보호아동의 수와 발생 원인에 관한 것이다. 오른쪽 도표는 그렇게 발생한 요보호아동들이 어디로 배치되어 보호받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도표는 국가통계포털의 자료를 갈무리한 것이다.

ⓒ김도현

ⓒ김도현

표에서 볼 수 있듯, 지난해 발생한 요보호아동이 6926명이며, 그 중에서 입양된 아동이 전체의 약 11퍼센트(%)인 772명인 것을 알 수 있다. 가정 위탁과 시설로 대부분의 아동이 배치되었는데, 그 수치는 63%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앙입양원 통계에 의하면 같은해 국내로 입양된 아동 총수는 1115명이다. 이는 2012년 이전에 발생한 요보호아동들이 양육 시설이나 일시 보호 시설에 배치되었다가 입양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 5년간 발생한 요보호아동 총수와 입양 신청자(가정)수와 국내 가정으로 입양된 아동의 수를 나타내는 도표를 보자.

ⓒ김도현

ⓒ김도현

이 도표가 보여주는 바는 지난 5년간 매년 발생한 요보호아동 5분의 1이 조금 못 되는 아동들이 입양으로 배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입양을 통해서 요보호 상황에 내어 몰린 아동을 우리 사회가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은 사실상 엄청나게 미미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입양 신청자 수 추이가 바로 입양을 통한 해결 가능성을 나타내주는 지표라고 할 것인데, 그 수 역시 입양 아동수를 조금 웃도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가 입양을 열심히 하면 시설로 배치되는 모든 아동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요보호아동의 문제를 입양을 통해서 풀려고 하기보다는 친생 가족 안전망의 강화를 통해서 풀고자 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절실하다. 지난 5년간 미혼모에게서 발생한 요보호아동의 수와 국내 입양 아동수의 추이를 보여주는 아래의 도표가 그것을 말해준다.

입양은 사실상 영유아 입양인 바, 입양되는 아동 대부분이 미혼모로부터 발생한 아동들이다. 그러나 위의 표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입양은 사실상 미혼모로부터 발생한 요보호 아동의 절반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물론 이 표에서 해외 입양 아동의 숫자는 원천적으로 제외했다. 해외 입양은 어디까지나 아동 양육에 관한 우리 사회의 능력이라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입양이 늘어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미혼모의 아동을 다 보호할 만큼 급격하게 입양 가정들이 늘어나리라고 기대해도 될까? 입양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펼치기 전에 미혼모 가정의 사회 안전망을 강화해서 입양으로 노출되는 아동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입양특례법 재개정이라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출구전략을 위해서 입양특례법이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졌느니, 입양특례법을 입법한 의원이나 그 집행에 책임 있는 장관이 아이를 입양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오히려 요보호아동이 출현하는 자리, 특히 미혼모 가정으로부터의 요보호 아동이 출현하고 있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범국가적인 지혜를 모으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출구전략이 아닐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몇 해를 거듭해서 혼외출산 1만 명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반면에 미혼모로부터 발생하는 요보호 아동의 수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2009년에 3070명, 2010년에 2804명, 2011년에 2515명, 그리고 지난해에 1989명으로 4년 사이에 1000명 이상 떨어졌다. 이 지표는 양육 미혼모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또한 친생 가족 사회 안전망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아동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지난 몇 해 사이에 우리 사회의 미혼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미미하게나마 누그러져 가고 있음을 드러내어 주는 것이고, 또 우리 사회 일각에서 미혼모의 양육에 대해 경제적 지원 체계에 미미하게나마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결과로 보인다.

물론 아직도 요보호아동이 보육 시설에 배치되면 한 아동 당 월 105만 원의 국가예산이 배정이 되고, 가정 위탁에 배치되면 한 아동 당 월 최소 42만 원 이상이, 입양 가정에 배치되면 아동이 13세가 되기까지 월 15만 원의 양육 수당에다 의료보험 자기부담분이 면제되거나 환급받는 데 비해, 미혼모가 자기 아이를 키울 때는 미혼모의 가계수입이 최저생계비 130% 이하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월 7만 원이 지원된다. 우리 사회는 아직 아이가 엄마로부터 멀어질수록, 즉, 직접 양육, 입양, 위탁, 시설 순으로 국가 예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투여되는 사회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시설에 주는 105만 원의 반만이라도 미혼모에게 주면 그들이 스스로 아이를 키우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되면 바로 그 숫자만큼 입양 대상 아동, 가정위탁 대상 아동, 시설입소 대상 아동이 줄고 따라서 거기에 투여되는 국가 예산이 절감되지 않겠느냐고.

이런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8월 개정된 입양특례법이 시행되고 난 후 미혼모 시설들에서 양육 미혼모들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또 국회에서는 미혼부양육비이행법안이 제출되어 논의 중이라고 한다. 이제 입양 아동 감소 추세를 막연히 염려하는 관념적 전제에 기초해서 잘 개정된 입양특례법을 역진시키기 위해 갑론을박하는 일을 접고 친생 가족 안전망 확충을 위한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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