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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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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110>

유백온, 그 인물과 사적(史蹟)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 적천수(適天髓)란 제명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적천수란 제명은 하늘의 골수, 즉 천기를 누설한다는 뜻이다, 그런 적천수의 해설서인 '적천수징의'나 '적천수천미'를 100번 정독하면 음양오행과 명리의 심오한 이치를 어느 정도 깨우칠 수 있다.

그런 '적천수'를 저술한 이는 유백온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유백온이라는 사람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명리학 책을 지었다니, 그냥 강호의 술사(術士)가 아니었겠나 싶겠지만 실은 중국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일급 책사로서 인품이나 재주에 있어 당대 제일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더운 날씨이고 휴가철이라, 창 밖으로 차량소통이 평소보다 뜸해진 가로를 내려다보며 명사(明史)를 펼쳐놓고 유기(劉基)전을 중심으로 명의 창업주인 주원장전과 여타 무수한 인물들의 전기를 두루 읽고 있다가 소개하는 것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셈치고 읽어두시면 좋을 것 같다.

유백온의 백온(佰溫)은 자(字)고, 본명은 기(基)다. 원말 지순 연간의 청전(靑田, 오늘날 소주 항주로 유명한 중국 절강성)사람이다. 일찍이 고시에 붙어 현령 직을 했다. 유기는 경사(經史)에 박통했을 뿐만 아니라, 두루 섭렵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상위(象緯)의 학문(주역과 음양오행)에 대단히 정통한 바 있었다. 이에 당대의 명사인 조천택은 절강의 인물 중에는 유기가 으뜸이며 삼국지의 제갈량과 버금가는 인재라고 평하기도 했다.

당시 방국진이라는 자가 오늘날의 상해 앞 바다에서 해적 떼를 이끌고 연안의 고을들을 약탈하고 다녔지만 정부는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 이에 유기는 원수부도사(元帥府都事), 오늘날로 말하면 육군대장의 참모가 되어 각종 계책을 내어 마침내 방국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해적의 괴수 방국진은 곤경에 처하자 중앙에 뇌물을 바쳐서 타협책을 취하니 정부 또한 이에 응하여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게 된다. 해적의 괴수에게 관직을 주는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던 유기는 그 바람에 왕따가 되어 군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반 행정직으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이에 화가 난 유기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청전으로 낙향하였다.

당시 홍건의 무리를 이끌던 주원장은 유기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빙하였으나 당초 주원장을 홍건적, 즉 도적의 무리로 생각하던 유기는 응하지 않다가 여러 경로를 통해 간곡한 부탁을 받고서야 주원장의 참모로 일하게 된다.

유기가 십팔조(十八條)의 계책을 진언하니 주원장은 크게 기뻐하였고 예현관을 지어 그를 살게 하는 등의 각종 대우를 아끼지 않았다. 또 주원장이 대장 한림아를 왕으로 봉하는 대우를 해주자 '아니 겨우 목동에 불과한 자를 왕으로 해서 어쩌자는 거냐'며 뼈있는 말을 서슴치 않았으니 그의 기개를 엿보게 한다.

이에 주원장이 그러면 공은 무슨 계책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자 다음과 같이 천하의 정세를 답변했다고 한다.

"장사성(張士誠, 원말 군웅할거 당시 오늘날의 소주와 항주 일대를 지배하던 군벌)은 겨우 군사나 거느리고 가진 것이나 지키기에 급급한 자이니 근심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진우량(陳友諒, 원말에 오늘날 호남과 호북, 광동 일대에 할거하던 군벌)은 주군의 겨드랑이를 위협하고 있으며, 양자강 상류 일대를 점거하고 군선과 병력이 강대합니다.

마음에는 늘 주군을 멸하고자 생각으로 가득하니 응당 이 자를 먼저 쳐야 합니다. 진우량만 처리하면 장사성은 고립되어 한 번 거사로 족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북으로 중원을 탈취하면 왕업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주원장은 오늘날의 난징(南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서로는 장강 상류의 진우량, 동으로는 소주 일대의 장사성이 강대하여 자칫 협공 당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에 유기는 양면 전선을 펼치지 말고 군의 주력을 장강 상류의 진우량 쪽으로 집중하여 승부를 보면 저절로 장사성은 무너질 것이며, 그러면 양자강 이남이 평정되니 기회를 보아 북의 중원을 도모하면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계책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제갈량이 유비에게 먼저 형주에 근거를 잡고 서쪽으로 파촉을 도모하여 군세를 정비한 후에 손권과 연합전선을 펼치다가 중원의 위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 북벌하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말한 천하삼분책(天下三分策)과 일맥상통하는 전략과 버금간다.

당시 민초들로 구성된 홍건적의 영수로서 쓸만한 지식인 참모가 없어 원대한 전략적 식견이 없었던 주원장에게는 실로 귀가 번쩍 열리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훗날 주원장이 유기더러 '나의 장자방이다'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정작 진우량이 군세를 몰아 장강을 타고 내려오자 주원장의 막료들은 크게 겁에 질린 나머지 투항하자는 파와 대피하자는 파가 주류를 이뤘다. 이에 유기는 노한 눈을 부릅뜨고 일언반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주원장은 유기만을 자신의 침소로 불러들여 무슨 대책이 있는지 물어보게 된다.

이에 유기는 투항하거나 대피하자는 자는 모조리 참수에 처해야 한다고 초강경론을 펼치면서, 다음과 같이 계책을 낸다.

"적이 지금 강성하지만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적군이 깊숙이 들어오도록 기다렸다가 복병으로 일거에 들이치면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적은 도적 떼에 불과하니 명분은 우리 쪽에 있습니다. 위엄을 세워 적을 제압하고 왕업을 이룰 수 있느냐의 여부는 이번 거사에 달려있습니다."

과연 주원장은 적을 깊숙이 끌어들여 일시에 몰아치니 대승을 거두었다. 주원장이 크게 상을 내리자 유기는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논공행상이 아니라, 승세를 몰아 여전히 강대한 진우량의 기세를 완전히 꺾을 수 있는 호기라면서 장강 상류 쪽으로의 역공을 권유했다.

주원장은 헌책에 따라 진군했고, 이로서 호남 지역은 완전 평정되었고 주원장은 양자강 이남의 최대 세력으로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원장이 결국 명을 세우고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유기라는 불세출의 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리와 역술에 밝았던 유기에게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강 상류 쪽으로 역공을 도모한 주원장이 파양호에서 진우량과 수십 차례 수전(水戰)을 벌리고 있을 때였다. 주원장이 배위에서 독전을 하고 유기는 곁에 서서 시봉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기가 큰 소리를 내며 주원장에게 배를 갈아타라고 독촉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이에 황망히 주원장이 배를 갈아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이 쏜 비포(飛砲, 큰 불화살)가 조금 전의 배를 명중시켜 박살이 나는 일이 일어났다. 아마도 유기는 때와 장소가 주원장에게 살기(殺氣)로 가득하다는 것을 추산했었던 것 같다. 이는 야사나 전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명사(明史)에 기록된 실화다.

이처럼 주원장을 보좌하여 중국을 평정한 유기는 일 처리가 신의 경지(料事如神)였지만, 사람됨이 강직하고, 너무 엄정해서 사람들과 늘 부딪치는 모난 면이 있었다. 개국 공신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공로를 뽐내는 일도 없었고, 봉록도 많이 받기를 거부하니 겨우 240 석이었다. 같은 반열의 다른 공신이 4 천석 이상이었던 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

나중에 유기는 벼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술과 바둑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당시의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다. 낙향한 후 관원들과는 일체 접촉을 피하던 차, 그 마을의 군수가 유기를 보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만나게 되었다. 유기는 이 때 발을 씻고 있었는데, 군수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나는 소인이니 응대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어디론가 숨어서 관리가 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한다.

그런 유기도 그의 모난 성격 때문에 결국은 모함을 받고 독살로 생을 마치고 만다. 당시 명의 조정은 주원장의 고향 사람들인 회서(淮西)파가 득세하여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유기는 결국 이 회서파의 전횡을 가로막는 눈의 가시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입이 많으면 당하지 못하는 법이라, 유기는 모함을 당하게 되고 급기야는 반대파에게 독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알려지기로, 주원장은 나라를 세운 뒤 공신들을 가혹하게 처단한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그가 처단한 공신들은 대부분 회서파의 무리들이었다. 동향을 앞세워 모든 대소사에 끼리끼리 작당하여 농단을 일삼자 주원장이 강력히 맞선 것이었다.

유기는 이처럼 당대의 일류 재사였으며, 역술계에서는 적천수, 즉 '하늘의 비밀을 흘린다'라는 제명의 글을 남긴 것으로 더 유명하다. 하지만 정작 적천수를 유기가 저술했는지 그 여부는 명확하지가 않다. 다만 그가 음양오행에 대해 대단히 정통했었다는 것만은 사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명사 인물전을 읽다보니 당시의 상황이 오늘과도 일맥상통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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