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이 6일 오전 민주당 탈당을 공식 천명함에 따라 양대 선거를 앞둔 정국은 큰 변화를 맞게 됐다.
국정 전념과 양대선거의 중립적 관리를 표명했으나 이날 김 대통령의 전격 탈당은 세 아들 문제를 조기에 수습해 노무현 후보의 부담을 털어버리려는 정치적 판단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3홍 의혹을 매개로 형성된 김 대통령과 노 후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려는 정치적 결단이라는 해석이다.
민주당은 김 대통령의 탈당이 '반DJ' 정서를 무마시켜 노무현 체제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면서도 DJ지지층 등의 반발을 고려,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 자민련 등은 김 대통령의 탈당 카드를 정권 재창출을 위한 '위장 탈당'이라고 주장하며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또한 김 대통령의 탈당을 전후해 검찰이 홍업, 홍걸씨의 소환을 서두르며 월드컵 전에 수사를 마무리하겠다는 입장까지 전해져 청와대가 권력비리 수사를 조기에 매듭지을 것을 검찰에 요청했다는 의혹도 불거진 상태다.
***노무현 캠프, DJ탈당 환영**
김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 발표를 통해 월드컵과 경제 등 국정에 전념하고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중립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민주당 탈당을 공식 선언했다. 또한 각종 게이트 의혹과 홍업, 홍걸씨 등 아들 문제로 물의를 빚고 있는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법과 원칙에 따른 엄중 처리 방침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아들 문제에 대한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내고, 미국에 머물고 있는 홍걸씨도 조만간 자진귀국해 조사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현 내각에서 민주당 당적을 갖고 있는 김동신 국방, 이근식 행자, 김동태 농림, 방용석 노동, 한명숙 여성, 유삼남 해양수산부 장관 등도 조만간 당적을 정리하거나, 당적 유지를 희망하는 각료들에 대해선 중립내각 구성을 위한 개각이 단행될 전망이다.
김 대통령 탈당 소식이 알려진 5일 노무현 후보는 "어떻든 한국 정치에서 끊임없이 차별화 문제를 고심해야 하고 탈당 문제에 대해 논평해야 하는 한국정치의 현실을 불행하게 생각하며 이런 정치문화가 이 다음에는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탈당을 막지는 않겠다고 밝혀, 사실상 수용의사를 밝혔다.
한화갑 대표의 경우 이날 오후 김 대통령의 탈당 이후의 당 운영 변화 방향에 대해 "대표가 현재 최고위원의 9분의 1밖에 안되니 내가 섣불리 얘기할 게 아니라 다른 최고위원들과 상의해야 한다"며 말을 아꼈다.
민주당은 김 대통령의 탈당으로 김 대통령과 노 후보가 분리돼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가 반영하듯이 잇따른 게이트 시리즈로 인해 노 후보의 지지도는 물론 민주당의 지지도도 잠식당하는 상황이다. 이 점에서 김 대통령의 탈당이 노 후보의 '3홍 의혹'부담을 덜어 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한 한나라당의 주요 대선전략인 '노무현=DJ 후계자' 공세도 설득력이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김 대통령의 탈당이 영남권 '반DJ 정서'에 발목잡혀 있는 민주당의 지방선거 전략에도 보탬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성호 의원은 "최근 노 후보와 민주당의 지지도 하락이 대통령 아들 문제에 기인한 측면이 있는데 당과 노 후보의 부담을 대통령이 모두 짊어지고 가겠다는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 당직자도 "역대 대통령은 대선 직전에 탈당했지만 김 대통령은 조기에 탈당한 차이가 있다"면서 "대선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당의 `탈 DJ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며 야당의 공세도 무력화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노무현 정당화' 가속화 예상**
DJ의 탈당은 이같은 위기탈출 측면외에 민주당내 역학구도의 큰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요약해 'DJ 정당'에서 '노무현 정당'으로의 권력이동의 가속화를 의미한다.
민주당은 이미 얼마 전부터 DJ를 정점으로 하던 권력체제가 빠른 속도로 붕괴하고 있었다. 지난주말 권노갑 전고문의 구속은 동교동계로 대표되던 구질서의 해체를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에 앞서 최고위원 선출과정에서도 친DJ세력의 쇠락이 뚜렷히 읽혔다.
한화갑 대표의 경우 동교동계 신파를 대표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친 노무현 컬러로 분류되고 있어 앞으로 민주당은 당권과 대선후보를 분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하는 소리없는 신 권력질서 구축 작업이 빠른 속도로 가시화할 전망이다.
이번 DJ탈당은 과거 92년의 노태우 대통령 탈당이나, 97년의 김영삼 대통령 탈당과는 상당 부분 성격을 달리한다. 노 전 대통령이나 김 전 대통령의 탈당은 상당 부분 당시 현직 대통령과 여권의 대통령후보와 상당한 갈등 국면 속에 진행된 것으로, 당시 여권의 대통령후보로부터 강한 불만과 저항을 샀었다.
그러나 이번 탈당은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진행돼 왔다.
이번 탈당도 근원적으로는 '3홍 비리'가 노무현 후보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노 후보측의 상황인식에서 비롯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 탈당을 바라보는 노후보 진영의 대응은 역대 대선후보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역대 대선후보들이 현역대통령의 탈당에 적잖은 배신감을 표명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내심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는 현역 대통령 지원없이 혼자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노후보측의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며, 이번 여권의 선거 전술이 역대 선거와는 달리 조직보다는 '바람'에 의존하고 있다는 대목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 노 후보 입장에서 보면 DJ 탈당은 '낭보'인 것이다.
***야, '노무현 보호를 위한 위장탈당' 비난**
반면에 야당은 김 대통령의 탈당을 국면 전환용 '위장 탈당'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나라당 남경필 대변인은 5일 김 대통령의 탈당 계획에 대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데 대한 자성과 중립적 위치에서 나라를 이끌겠다는 진심어린 뜻이라면 환영하지만 잠깐의 위기를 넘기고 아들 비리문제를 덮어 민주당의 재집권을 위한 위장탈당이라면 용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 대변인은 또 "김 대통령이 우리가 요구해 온 국회 국정조사와 특별검사제, TV청문회, 비상중립내각 구성을 수용하고 공작정치의 배후로 꼽히는 박지원, 신건, 이기호, 임동원 씨 등 청와대와 국정원의 배후세력을 물러나게 하지 않으면 진정한 탈당으로 볼 수 없다"면서 "현재로서는 대통령의 탈당이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 보호를 위한 위장탈당, 위장절연이라고 판단한다"고 주장했다.
이재오 총무는 "탈당한다고 아들 비리가 숨겨지고 민주당이 책임을 면할 수는 없으며 '리틀 DJ(한화갑 대표)'가 당수이고 '스몰 DJ(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후보인 만큼 달라질게 없다"면서 "탈당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민주당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대통령 탈당을 계기로 민주당과 노 후보가 `탈(脫) DJ' 이미지 메이킹을 가속화할 것으로 보고 6일부터 시작되는 임시국회에서 권력형 비리공세를 계속하고 규탄대회를 통해 '노무현=DJ 후계자'론을 계속 부각시킬 방침이다.
자민련 정진석 대변인도 "이 시점에서 탈당은 공적인 책임을 저버리는 무책임한 발상"이라며 "친인척 및 핵심 측근의 비리 연루의혹 등으로 조성된 불리한 국면을 미봉하기 위한 국면 전환용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정 대변인은 이어 "한마디로 탈당 명분이 미약하다"며 "대통령이 주변 비리의혹을 철저히 규명하고 공정한 선거관리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야권의 이같이 신경질적 반응은 DJ탈당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한마디로 말해 야권에게 DJ탈당은 낭보가 아닌 '흉보'인 셈이다.
***'권력형 비리' 조기진화 여부가 관건**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과연 DJ탈당으로 인해, 현재 정부여권이 당면한 위기상황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질 수 있는가이다.
이와 관련, 우선 주목되는 대목은 '3홍 비리'의 깔끔한 처리 여부이다. 검찰은 김 대통령 탈당으로 3홍 의혹 수사에 따르는 정치적 부담을 덜게 됐다. 그 대신 3홍 비리 수사를 가급적 신속히 매듭지어 달라는 정부여권의 주문을 받고 내심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주말 여권 핵심부가 대통령 세 아들과 관련한 검찰 수사를 가급적 빨리 끝내줄 것을 검찰측에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검찰측에서도 가능한 한 5월31일 월드컵 개최 전에 수사를 마무리 짓겠다는 방침 하에 홍걸, 홍업씨에 대한 조사를 서두르고 있다. 검찰은 이번주 중에 홍업씨를 소환할 예정이며 15일께 홍걸씨도 소환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의 조기 마무리 방침에 대한 불신과 회의의 시각이 적지 않다. 권노갑 전 고문의 구속과 대통령 두 아들의 소환으로 각종 권력형 비리 사건을 상징적 차원에서 마무리지으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심이다. 아울러 아무리 신속히 수사를 마무리지으려 해도 사건의 속성상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회의도 제기되고 있다.
한 예로 권 전 고문은 재작년 7월 금감원 조사무마 댓가로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을 통해 진승현씨의 돈 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현재 구속수감 된 상태지만 추가 의혹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정치자금의 출처와 사용 내역에 관한 문제로 이어질 경우 파장은 간단치 않다.
또한 김성환씨나 최규선씨의 주변 의혹들을 파헤쳐 오면서 검찰 스스로 홍업, 홍걸씨를 수사의 최종점으로 지목한 만큼 이들에 대한 조사의 폭과 깊이에도 관심이 쏠려 있다.
여기에 최근 분당아파트 특혜분양 과정에 민주당 고위층인 김옥두 의원 등 다수의 권력층 인사들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새로운 초대형 비리의혹이 제기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 과연 대선을 앞두고 권력형 비리의 조기 봉합이 가능하겠냐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따라서 권 전 고문과 홍업, 홍걸씨에 대한 속전속결식 수사에는 곱지 않은 시각이 지배적이다. 월드컵과 지방선거가 국가적 대사라고 해도 이들에 대한 조사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요컨대 DJ탈당은 야권보다 여권에게 많은 이득이 돌아가는 결정이다. 그러나 DJ탈당에 따른 레임덕(권력누수) 본격화로 새로운 권력형 비리 의혹이 계속 터져나올 경우, 과연 이것이 누구에게 더욱 유리한 결정이었는지는 아무도 속단할 수 없는 엄중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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