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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중 '평소 성격'·박근혜 옷 색깔…그렇게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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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중 '평소 성격'·박근혜 옷 색깔…그렇게 궁금해?

[프레시안 books] 조지프 엡스타인의 <성난 초콜릿>

'뒷담화' 정도로 옮겨질 가십이 언론에서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가 그랬다. 정당을 '1중대' '2중대'하던 시절이니 정치랄 게 없었다. 그래도 각 신문 2면엔 이런저런 이름의 정치 가십난이 고정 배치되어 있었다. 나름의 구실을 했고, 열독률도 높았기 때문이다. 보통은 시시콜콜하거나 읽으나마나한 이야기가 실렸지만, 뉴스로 다루지 못하는 사건의 '냄새'라도 풍기는 내용을 담기엔 가십이 딱이었다. 김영삼 총재가 자택에서 장기 단식을 한다는 소식은 그렇게 퍼져 나갔다. 낱말 하나에라도 비판 뉘앙스를 살리려 고심하는 기자들 덕에 욕하는 독자들은 욕하는 재미를 누릴 수도 있었다. 그 시절 정치 가십은 그랬다.

80년대 후반 어느 메이저 신문이 민주화 바람에 힘입어 더 이상 가십을 싣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모든 것이 공개된다고 믿어지던 그 때, 적어도 정치 가십의 '시대적 소명'은 다한 듯 보였다. 한데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 기사가 온통 가십화 된 것 같았다.

며칠째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윤창중 사태'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윤창중이 본인의 말과 달리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막 했으며 이남기 홍보수석을 우습게 보는 언행을 했다는 것은 사건의 본질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감기를 무릅쓰고 방미 일정을 강행했다든가 어떤 옷차림을 했다는 것은 뉴스인가, 가십인가. 가십이 나름 존재 이유가 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인터넷 덕분에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날 가능성이 만연한 요즘에도 뒷담화에나 적합한 이야기가 버젓이 제도권 언론의 전면으로 나서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정말.

▲ <성난 초콜릿>(조지프 엡스타인 지음, 박인용 옮김, 함께읽는책 펴냄). ⓒ함께읽는책
미국의 칼럼니스트가 가십에 관해 쓴 이 책 <성난 초콜릿>(조지프 엡스타인 지음, 박인용 옮김, 함께읽는책 펴냄)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만났다. "기자와 블로거, 가십과 뉴스를 구분하기가 모호해졌다." 맞다. 왜 그렇게 됐을까. 언론의 본래 속성 탓이란다.

지은이에 따르면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인쇄업의 융성과 함께 가십은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왔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뉴스에 대한 갈증이 생겼으며, 새로운 독자들이 가장 굶주린 뉴스가 바로 자기들보다 나은 사람들의 나쁜 행태에 대한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인쇄 매체든 방송 매체든 '끝없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유명 인사의 사생활을 계속 공급할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 스타들이 보통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읽고 듣는 즐거움을 준다면,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 축재나 무절제한 섹스, 폭음, 터무니없는 위선을 저지르다 몰락하는 걸 지켜보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 가십의 본질이란다.

이쯤 되면 지은이의 입을 빌지 않더라도 가십의 성격이 드러난다. 사생활, 당사자가 밝히고 싶지 않은 것, 그리고 상당 수준의 악의다.

<뉴욕 포스트>의 유명한 가십 칼럼니스트는 "가십이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무엇인가를 듣는 것"이라 했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다른 사람의 은밀한 장점에 대해 가십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보탰다. 그러니까 가십의 이면에는 간혹 그 가십을 말하는 사람의 (도덕적) 우월성이 담겼다는 것이다.

가십의 또 다른 특성은 "반드시 사실로 확인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책에 실린 예를 들자면, 영국의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의 이혼녀 월리스 심프슨 부인과 맺어지기 위해 왕위까지 내던진 것은 사실이며 '세기의 로맨스'로 불리기도 했다. 한데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회고록에서 심프슨 부인이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구강성교 전문가라고 밝혔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와 함께 에드워드 8세가 실은 동성애자였다는 소문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십이 역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현재 진행 중인 일에 대해 더 확실하게 지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 더 잘 어울리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빙햄턴 대학교 인류학 교수인 데이비드 슬론 윌슨은 "가십은 한 집단의 형태를 규제하고 그 집단의 구성원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매우 세련된 다기능적 상호 작용으로 보인다"고 했다. 어려운 말을 썼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다.

일체감을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십은 사람들의 악명을 높이거나 오명을 씌우는데 이는 공동체의 규범을 강요하는 작용을 한다. 드물긴 하지만 나쁜 행동을 자제시키는 잠재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반면 규정된 행위를 넘어서는 행위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예컨대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에서는 유명한 운동선수나 영화배우들이 혼외정사를 통해 자녀를 얻었다는 게 화제였다. 지은이는 이 같은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짐으로써 혼외정사로 태어난 일반인들의 자녀들도 좋든 싫든 차츰 불명예를 벗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책은 흥미로우면서도 예리하다. "21세기에도 가십이 널리 퍼지는 이유는 문화적·지적 생활의 빈곤 탓"이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십의 도움 없이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혁명은 상상하기 어렵다. (…) 불만이나 위기가 만연한 시대에는 소문도 가십도 무성해진다"는 지적이 그렇다. 또한 우리들 대부분이 진실 그 자체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인쇄 매체든 전자 매체든 현대 언론에는 진실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가십에 대한 욕구는 수그러들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편집되지 않은 정보(인터넷에 떠도는 정보)에 점점 더 익숙해질 것"이라 지은이의 전망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렇다 해도 책은 '가십의 문화 사회사'란 부제와 달리 가십(gossip)에 관한 가십으로 읽힌다. 가십을 곱씹어볼 '씨앗'은 제공하지만 뜯어볼 '분석틀'을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십의 역사며, 심리적 배경, 사회적 기능을 정색하고 파고든 것이 아니라 가십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한 칼럼집으로 읽으면 된다. 지은이는 가십을 "지적인 껌 씹기"라고 했는데, 이 책 또한 "지적인 가십 씹기"라 할까. 곳곳에 끼어든 가십들이 그야말로 미확인 뒷담화인데다 국내 독자들로선 낯선 이들이 툭툭 튀어나오니 이래저래 마음의 준비를 하고 펼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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