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TV 판을 말할 땐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 판을 말할 땐 각각의 개봉제를, 시리즈를 통칭해서 말할 땐 <에반게리온>(때로는 '에바'라고만 약칭되기도 합니다)으로 표기하였습니다. |
그러니까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실망의 바다, 허약한 마음, 꾸며진 미소, 병적인 피사체, 자아의 붕괴, 잔혹한 타인, 대리의 이성, 찰나적인 위안, 만연하는 허탈, 무(無)를 원하는 마음, 폐쇄해버린 자신, 분리에 대한 불안, 일방적인 착각, 타인이라는 공포, 위험한 사고, 타인에 대한 거절, 동조에 대한 혐오, 오만한 파악, 약한 자에 대한 동정심, 불쾌한 사진, 과거의 상처, 애매한 경계, 상식의 일탈, 고독한 사람들, 가치에 대한 의문, 욕정과의 융합, 태내로의 회귀, 허무한 시간, 파멸에 대한 동경, 필요 없는 나, 허구의 시작, 현실의 계속, 그것은 꿈의 끝남.
그럼,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여기에 있어도 괜찮니?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 Air/진심을 너에게> 포스터 카피 (영화 월간지
고백하자. 나는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키타무라 마사히로 지음, 곽형준 옮김, 영상노트 펴냄)의 시시콜콜한 서평을 쓰려는 게 아니다. 홍대 앞 한양문고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구입한 이 책을 핑계 삼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4월 25일에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 Q>를 향한 벅찬 마음을 쓰고 싶은 것이다.
1.
애니메이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하물며 어떤 시리즈를 특별히 챙겨본 기억도 없다. 그런데 유독, 안노 히데아키의 TV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달랐다. 그건 내가 이 시리즈와 동시대에 살았고, 동시대에 봤으며, 동시대에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팬덤에 있어 이 구체적인 동질성이라는 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내게 있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영원히 10대의 이야기이고, 타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는 거듭된 실패의 시작이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한가하고 게으른 여름, 종말론의 예감에 사로잡힌 어떤 풍요의 시대의 상징이었다.
▲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키타무라 마사히로 지음, 곽형준 옮김, 영상노트 펴냄). ⓒ영상노트 |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미증유의 재난 '세컨드 임팩트'가 일어난다. 해수면의 상승, 천재지변, 경제 붕괴, 민족분쟁, 내란, 인구수의 격감…가까스로 그 상처를 회복하던 시점에 또 다른 위기가 닥쳐온다. 사도(使徒),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정체불명의 거대 전투병기 군단. 사해문서의 예언대로 등장한 사도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불러올 '써드 임팩트'를 막기 위해 인류는 생체 전투병기 '에반게리온'을 개발한다. 그중 에바 0호기, 에바 초호기, 에바 2호기가 개시되고, 이를 조종할 파일럿으로 14살 소년 소녀 이카리 신지, 아야나미 레이, 아스카 소류 랑그레이가 선발된다.
위 내용은 TV판 1~3화 정도까지의 전제에 불과하다. 신지, 레이, 아스카가 제3사도부터 제16사도까지 쉬지 않고 몰려드는 사도들과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는 사이, 에반게리온 계획의 주도자였던 UN 산하기관 네르프와 그 뒤의 비밀스러운 조직 제레 사이의 숨 막히는 두뇌 싸움이 펼쳐진다. 왜 하필이면 14살에 불과한 신지, 레이, 아스카가 파일럿으로 채택되었는가의 이유, 네르프의 총지휘자이자 신지의 아버지 이카리 겐도가 감춘 끔찍한 비밀, 세컨드 임팩트를 일으켰던 제1사도 아담과 네르프 지하에 숨겨진 채 에바 초호기의 모델이 된 수수께끼의 거인 리리스, 인류 보완 계획의 미스터리 등이 차례로 등장하며 이야기는 한층 복잡해진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일본에서 처음 방영되던 당시를 상상해보자면, 안노 히데아키는 미드 <로스트>의 J. J. 에이브럼스보다 10년 일찍 등장하여 매 화가 끝날 때마다 시청자들을 미쳐버리기 직전까지 몰아가는 '낚시질'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것이다.(아, 깜빡 잊고 있었는데 데이빗 린치의 1992년 작 TV 시리즈 <트윈 픽스>가 낚시질 부문에선 한발 앞섰다.)
TV 방영 마지막 화는 그야말로 미증유의 엔딩이었다. 26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다 말고 카메라가 갑자기 신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 화 내내 신지의 1인칭 독백으로 처리해 버리는, 신지의 마음속 전투만 보여준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엔딩. 26화가 방영된 다음 일본에선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왕가위의 <아비정전> 한국 개봉 날 장국영, 유덕화, 양조위, 장학우, 장만옥, 유가령 등의 당대 톱스타 총출연이라는 화려한 홍보 문구에 이끌려 왔다가, '홍콩 느와르 액션'은 단 한 컷도 나오지 않은 느리디 느린 카메라에 격분한 관객들이 매표소로 몰려가 환불 소동을 벌였다는 문제의 그날에 비견하지 않았을까 싶다.
2012년, 일본에선 신 극장판 시리즈 중 3편 <에반게리온 : Q>가 개봉했다.(2편에 이어 3년만의 귀환이었다) 그런데 한국에는 개봉 기약이 없었다. 앞서 <에반게리온 : 서>와 <에반게리온 : 파>의 흥행 성적이 기대만큼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들 마음을 졸였다. 그러다 마침내 한국 개봉일이 잡혔다. '에바' 팬들에게는 성스러운 날짜다. 4월 25일.
▲ <에반게리온 Q> 중 한 장면. ⓒkhara |
2.
그 날을 기다리며 미뤄왔던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을 읽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몇 번을 다시 봐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너무 많았고, 그 점이 신비의 아우라를 더하면서 더 많은 팬들을 끌어들였다. 키타무라 마사히로는 1990년대 말부터 무수한 해독본, 독분, 해석론 등 '에바책'이 대량 쏟아져 나아왔다고 썼다.
예를 들어 이가라시 타로編 <에반게리온 쾌락원칙>(다이산쇼칸, 1997년)의 권말 자료에 '서적=비공식 고찰본'으로 거론된 것만도 14점에 이른다(관련서적은 더욱 다수). 개중에는 카부토기 레이고著 <에반게리온 연구서론>(KK베스트셀러즈, 1997년)처럼 <아사히신문>에 '베스트셀러'로 소개된 것도 있어서, <에반게리온> 해석론 붐은 일종의 사회현상이라고까지 일컬어질 정도였다.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은 철저하게,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보았고 그것을 좋아했던 사람들을 위한 동인지의 일종이다. 동인지의 진지함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그 세계를 나의 현실로 선택했고 그 세계 안에서 나만의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것은 결코 비웃거나, 내가 모르는 세계라고 해서 무시해버릴 대상이 아니다. 오타쿠는(심지어 나 같은 일반적인 수준의 팬마저도), 정말 사력을 다해 그 세계 안의 모순을 고민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마사히로는 이 책에서 심지어 제작진 스스로가 비디오를 제작할 때 TV 판에 없던 장면이 몇 군데 들어가거나 혹은 대사가 조금씩 바뀌었음을 자세하게 지적한다. 그는 "리츠코는 0호기 코어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까? 에바 파일럿의 선정 기준은? 미사토가 죽기 직전 '카펫' 발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수께끼의 즐거움은 물론 풀이에 있다. 일찍이 셜록 홈즈는 "불가능한 수수께끼란 없다"라고 단언했고, 수수께끼는 복잡할수록 그 가치가 올라간다. <에반게리온>의 팬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 수많은 수수께끼의 구멍에 자신들을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마치 원작 속 인류 보완 계획처럼, <에반게리온> 시리즈라는 하나의 거대한 몸체 안에 우리들이 속속들이 합류하여 새로운 인류-(어쩌면)사도로 재탄생하는 그 과정 자체를 우리가 경험한 건지도 모른다(엔딩에 이르러서는 그같은 열렬한 마음을 감독이 내팽개쳐버리는 것 같은 연출을 감행하여 팬들을 실망시켰지만).
▲ 신극장판 1편 <에반게리온 : 서> 포스터 ⓒkhara |
예를 들어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을 만든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아사히신문>의 인터뷰에서 "<에바>의 소년은 성장을 거부하고 있잖아요? 그건 병에 걸린 거나 다름없다는 걸 제작자도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1998년 3월 2일 자 석간)라며 <에바>를 비판하고 있다.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이 전하듯, <에반게리온>이 1990년대 말 일본에서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해석되던 시절 비판자들의 입장은 대개 이러했다. 요즘 같으면 '중2병'라 불렀을, 타인에 대한 공포감과 경멸감과 거꾸로 강력한 인정욕구가 뒤섞인 불안정한 마음, 성장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지 못하는 망설임(<에반게리온>에선 인류 보완에 동의할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의 최종 선택)을 경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완벽하게, <에반게리온>의 편이었다. 신극장판 4번째 작품에선 엔딩이 어떻게 달라질지 몰라도, TV판 26화와 구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Air/진심을 너에게>의 마지막 선언이 준 감동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네르프의 일원이자 정신적 보호자였던 미사토가 신지에게 "자신이 상처 입는 게 싫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죽어!"라고 과격한 제안을 하고, 신지는 마침내 결정한다. 그 모든 폭력적 행위들을 감당하고서라도, 혹은 그 폭력에 감응하여 스스로도 폭력을 저질렀더라도, 결국엔 '모두가 하나 되고 상처도 받지 않는 영원한 낙원' 대신 다시 한 번 나와 타인으로 분리된 세상을 선택한다. '천사라는 이름의 괴물'보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괜히 덧붙여보자면, 저 제목은 SF 작가 할란 엘리슨의 1969년 작
"나는 내가 싫어. 하지만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 나는 여기 있어도 좋을지 몰라. 그래, 나는 나일 수밖에 없어. 나는 나야. 나로 있고 싶어. 나는 여기 있고 싶어. 나는 여기 있어도 좋다고!"
3.
2012년 10월, 연희동 SF&판타지 도서관에서 TV판 <신세기 에반게리온> 총 26화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 Air/진심을 너에게><에반게리온 : 서><에반게리온 : 파>의 밤샘 상영회가 열렸다. 12월 25일, 무려 크리스마스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에반게리온 : 서>와 <에반게리온 : 파>를 상영했다. 두 번 모두 <에반게리온 : Q>의 한국 개봉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바깥에선 다들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고 있었지만, 극장에 모인 우리는 <잔혹한 천사의 테제>와
지난 겨울 내내, 도쿄의 백화점 전광판에서 <에반게리온 : Q> 예고편을 처음 공개하던 당시, 그 앞에 운집한 팬들이 다 같이 환호하던 풍경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올린 조악한 동영상을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돌려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이제 4월 25일 극장에서, 얼굴도 모르지만 그때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와 다시 한 번 함께 <에반게리온 : Q>를 볼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행복해진다.
▲ 신극장판 2편 <에반게리온 : 파> 포스터. ⓒkhara |
2013년 현재 마에다건설 판타지 영업부는 <우주전함 야마토>의 우주전함을 건조하는 지하터널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경기불황에도 이 프로젝트가 계속된다면, 혹시 몇 년 안에 마에다건설의 지휘 하에 에반게리온 초호기(건설회사니까 사실 네르프 본부나 본부가 위치한 지오프론트 지하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게 맞겠지만…) 제작 준비라는 소식이 들려올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여한이 없겠다.
PS 2. 사도나 에반게리온의 형태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김동욱 옮김, 미우 펴냄)에 수록된 '그림자의 거리'의 괴물,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거신병 등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PS 3.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을 넘어서는 (한국어로 해석된) 자세한 설정을 알고 싶은 분들은 아쉬운 대로 '엔하위키 미러'의 '에반게리온' 항목을 검색해서 링크를 거듭하시면 된다(바로가기☞) 한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빠져나오기까지 몇 시간이 걸릴지는 장담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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