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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진실…완전한 사랑은 '개'와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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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진실…완전한 사랑은 '개'와만 가능!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⑤

슬픔 속의 행복, 종말 직전의 찰나

카레닌은 토마시와 테레자의 애완견이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프라하에서도 못 견디고 시골로 살러 온 후 카레닌은 암에 걸린다. 그들은 생각한다. 암에 걸려 세 발로 걸을 수밖에 없는 카레닌이 "지나온 십 년의 삶을 몸으로 구현"(476쪽)한다고.

깊이 사랑했음에도,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랑은 절름발이와 다름없었다. 토마시의 바람기로,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상처 받는 테레자의 몰이해로, 그들의 사랑은 균열과 부정을 내장한 불완전한 것이었다. (하기야 어느 누구의 사랑인들 안 그렇겠냐마는!)

카레닌의 죽음을 앞에 두고 테레자는 깨닫는다. 카레닌과의 사랑이 토마시와의 사랑보다 낫다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되었다"(481쪽)고. 개와 인간의 사랑은 이해관계를 초월한 사랑이다.

남녀 관계에 수반되는 당연한 질문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테레자는 이런 질문들을 카레닌에게 해 본 적이 없다.

테레자는 깨닫는다.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482쪽) 이런 질문들로 일생을 괴로워했던 그녀는 단지 상대의 존재만이 아니라 사랑과는 다른 무엇을 원했던 것이라고.

사랑과는 다른 무엇이라니, 무슨 뜻일까. 소설에 자세히 서술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유추할 수 있다. 테레자는 토마스 자체를 원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자기 판타지를 실현하려고 했거나 자기 영향력을 확인하려고 했거나 자존감을 확립하려고 했음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이는 비단 테레자만의 불찰이 아니다. 미숙한 연인에게 상대의 존재 자체가 투명하게 스며들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는 거의 신공에 가까운 묘기이다. 많은 경우 연인은 상대를 자기의 ~를 위해서 이용한다. 나르시시즘을 충족하기 위해, 사랑하고 싶은 자기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랑에 대한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 외에도 많다.

또한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지 자기 방식대로 바꾸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반성했을 것이다. 토마시를 자기 방식대로 바꾸려들었던 지난 세월을.

게다가 개에 대한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인 사랑이다. 테레자는 어머니를 사랑하라는 지엄한 명령에 짓눌려서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었다. 사랑의 당위는 종종 사랑의 의욕을 꺾어 버린다. 이런 면에서 개와 나눈 사랑이 인간끼리의 사랑보다 낫다고 테레자는 생각한 것이다.

테레자의 깨달음. 상대의 존재만을 기꺼워하고 그밖에 다른 것을 원하지 않기, 상대를 자신의 틀에 끼워 맞추지 않기. 이는 수많은 연애 지침서들이 남녀 간의 고전적 딜레마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한 것들이다. 이론상으로 이 말은 맞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도 이 경지는 개와 인간 사이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개와 인간의 관계가 아무리 목가적이고 평화롭다 하더라도, 엄연한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에는 부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개에게 전 존재를 의탁할 수 있는가?

바꾸어 말하면 인간관계, 특히 남녀 관계는 상기 사랑의 지혜를 실천하기 몹시 어려운 지뢰밭이다. 인간인 이상, 사랑할 때 도덕적으로 훌륭하기는,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지혜롭게 처신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쿤데라도 말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사람에게 전원시를 선물할 수 없다. 오로지 동물만이 할 수 있는데, 동물만이 천국에서 추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483쪽)

항상 그녀는 토마시가 늙기를 바랐다. 힘을 잃으면 그녀를 괴롭힌 엽색 행각도 그만 둘 것이라 생각했을 터이다. 그런데 막상 노쇠하고 허약해진 토마시를 보자 테레자는 슬픔을 느낀다.

힘을 잃어야 평화가 온다니. 슬픈 일이다. 남녀 간의 평화는 종종 두 사람의 성숙이라기 보다는 노쇠를 증빙한다. 테레자의 슬픔은 기묘한 행복을 동반하기도 했다. "우리가 종착역에 있"기에, 그리고 "우리가 함께 있"기에(506쪽).

카레닌의 죽음을 겪고 또 갑자기 토마시의 노쇠를 발견하고서 테레자는 다시 중대한 각성에 이른다. 토마시가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테레자는 늘 비난해 왔다.

이제 그녀는 깨닫는다. 그의 사랑이 흠잡을 데 없는 것이었다고, 그녀가 진정으로 그를 사랑했다면 취리히에 남아 있어야 했다고, 명성 드높은 외과 의사였던 토마시를 유리창 청소부에서 트럭 운전사까지 점점 더 낮은 곳으로 끌어 내린 장본인이 그녀였다고,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그를 위험에 빠뜨리고 점점 더 허약하게 만들었다고, 그녀의 허약성을 무기 삼아서 그를 이용해 먹고 망가뜨렸다고.

그녀는 탄식한다. "하느님 맙소사,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정말 여기까지 와야만 했을까!"(502) 일평생 피해자임을 자처했던 테레자는 자기 역시 가해자였음을 깨닫는다. 진정한 역지사지를 행한 것이다. 그녀는 비로소 일평생의 무게를 담은 사과 한 마디를 그에게 건넨다.

테레자는 다 늙어서야 바람둥이 토마시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 사랑을 불신했던 자신을 반성한다. 처음으로 토마시의 자리에서 관계를 바라 본 것이다. 토마시의 반성보다 테레자의 반성을 부각한 결말에는 남성 작가의 판타지가 투영되었을까? 그것만은 아니다.

분명히 사랑하는 남녀는 기적을 행한다. (기적은, 기적이기에 드물게 온다는 점이 문제지만.) 남들이 보기에 도저히 용서 불가능한 과오까지 수용하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기 스스로를 반성한다.

사랑하는 남녀에 관한 한,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수용하는 문제에서 시비의 법칙은 무의미하다. 시정의 판관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남들이 보기에 명백한 가해자라도 일면 피해자이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문제는 '객관적으로 누가 더 잘못했냐'가 아니다. 때로 명백한 가해자인 '너'를 피해자로 봐 주는 '나'의 시선. 명백한 가해자인 '너'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끊임없이 '나'의 허물을 찾는 시선.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 전도된 시선, 시정의 법률을 벗어나 고유한 사랑의 격률만을 따르는 판단 착오가 겹치고 겹칠수록 사랑은 깊어진다. 사랑의 깊이는 전도된 시선과 판단 착오의 두께에 비례한다.

일생 동안 서로 사랑하면서도 삐그덕거렸던 토마시와 테레자는 드디어 화해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 옛말이 있다. 옛말 그르지 않게, 화해의 순간, 행복의 찰나는 너무나 짧았다.

테레자의 깨달음으로 전원시처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은 곧바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 앞두고야 잠깐 섬광처럼 깃들인 깨달음이라니. 이러니 대부분의 남녀는 평생 관계의 균열 요인을 초월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터이다.

조화로운 관계는 개하고의 관계에서나 가능하고, 아니면 죽기 전 이례적으로 찾아드는 각성의 순간에만 가능하다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슬픔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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