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들으면 어린 시절 TV에서 온통 잘린 버전으로 보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라고 생각했던 다리오 아르젠토의 <써스페리아>나 <페노미나>가 떠오른다. 하지만 총천연색의 조명과 양식화된 사운드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아르젠토의 영화에서 온갖 화려함을 제거하고 나야지만 비로소 헬렌 매클로이의 <어두운 거울 속에>(권영주 옮김, 엘릭시르 펴냄)가 부상할 것이다.
<어두운 거울 속에>를 처음 읽은 건 1986년 출간된 자유시대사 판을 친구로부터 선물 받았던 2005년의 일이었다. 으스스한 괴담으로 시작하여 합리적인 추리로 끝나는 결말이 그리고 그 트릭 역시 매우 간단하면서도 꽤 그럴 듯했기 때문에 1950년 작품치고는 꽤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다시 읽게 된 <어두운 거울 속에>의 느낌은 좀 달랐다.
이 소설의 제목은 신약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따왔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원전의 경건하고 성실한 분위기와 달리, 이 구절 'Through a Glass, Darkly'를 제목으로 떼어온 작품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모호하고 어둡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동명의 영화(매클로이의 소설과는 상관없는 작품이다) 역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여주인공의 파멸을 그렸다. 헬렌 매클로이의 소설의 경우 도플갱어(doppelgänger) 현상을 내세우며 독특한 심리 범죄를 이끌어간다.
유서 깊은 브리어턴 여학교에 숨 막히는 공포가 감돈다. 이번 학기부터 새롭게 미술 교사로 부임한 포스티나 크레일은 아무런 이유 없이 해고 통보를 받는다. 부임한 직후부터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주위 시선을 감지하고 있던 포스티나는 유일하게 친했던 동료 교사 기젤라에게 이 상황을 의논한다. 기젤라는 다시 연인 배질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뛰어난 정신과 의사인 배질인 이 사건 뒤에 숨어있는 모종의 악의를 감지하고 진상 조사에 나선다.
"악의가 은밀하고 승리감에 차 있을 땐 아주 고약하단 말이지."
▲ <어두운 거울 속에>(헬렌 매클로이 지음, 권영주 옮김, 엘릭시르 펴냄). ⓒ엘렉시르 |
"예컨대 이런 거죠. 당신이 방에 들어갔는데, 또는 거리나 시골길을 걷는데 저 앞에 웬 사람이 보입니다. 실체가 있고, 입체적이고, 색채도 있어요. 움직이고 있고, 시각과 관련된 모든 법칙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복장과 자태가 어쩐지 낯이 익은 것도 같습니다.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서둘러 다가가니 그 사람이 고개를 돌려요. 그런데 그게 자기 얼굴인 겁니다. 아니, 자기의 완벽한 거울상이에요. 다만 거울이 없어서 그렇죠. 즉, 자기 생령인 겁니다. 당신은 겁에 질립니다. 전설에선 자기 생령을 보면 죽음이 머지않았다고 하니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선 학부모를 초청한 교내 파티를 열고 그 자리에서 연극 지도 교사 앨리스 애이치슨이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된다. 앨리스는 마음 약한 포스티나를 노골적으로 경멸하며 생령 소문까지 비웃었던 바 있다. 배질은 포스티나에 대한 원한 관계를 추적하다가 그녀의 부모에 대한 뜻밖의 정보를 알게 된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어두운 거울 속에>는 추리소설사에 길이 남을 만한 걸작은 아니다. 하지만 70년이 지나도록 이 작품이 못내 흥미로운 여운을 길게 남기는 이유도 분명 존재한다. 고딕 공포 소설처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으로 음험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전반부에, 탐정 배질의 현실적인 이성이 강하게 반박하며 벌어지는 충돌들 때문이다. 엄격하고 냉정한 라이트풋 교장조차 포스티나 크레일을 둘러싼 공포가 "현대 심리학이 연구는 고사하고 인정조차 않으려고 하는 그런 특수한 사례"가 아닐까 두려워할 때, 배질은 단호하게 반문한다. "포스티나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 있지 않겠어요?"라고.
"생령은 전통적으로 죽음과 연관됩니다. 자기가 보건, 타인이 보건 말이죠. 그러니 크레일 선생님의 생령이 출현했다는 건, 비록 꾸며 낸 일일지언정 크레일 선생님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게 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익명의 협박 편지나 다를 바 없죠."
생령을 둘러싼 소설의 트릭은 자기 동일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케임브리지 철학 사전>(1999년)은 '나는 나'라는 개인적 정체성에 대해 "이 시간대에 존재했던 사람이 다른 시간대에서도 바로 그 사람 자체임을 입증할 수 있는 특징들(필요충분조건인 특징들)로 이루어진다"고 정의 내린다. 그렇다면, 학교 이곳저곳에 출몰했던 포스티나의 생령의 정체는 무엇인가?
소녀 베스는 창 밖에서 그림을 그리는 포스티나와 교실 옆 의자에 앉아있는 포스티나를 번갈아 쳐다보다 기절해버렸다. 두 명의 포스티나는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창밖의 포스티나와 교실 옆의 포스티나가 동일한 인물일 수 없다면, 둘 사이의 미세한 틈새가 존재한다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이성의 열쇠도 존재하는 걸까?
결과적으로 환영의 트릭은 자기 동일성의 파악에 관한 인간의 아주 평범한 착각을 이용한 단순한 원리였다. "환영이 사라졌다. 벽난로의 불빛과 하나뿐인 스탠드 불빛 속에서 보는 그 사람은 이렇다 할 것 없이 평범한 모습이었다." 눈은 언제나 뇌를 속일 수 있다. 불안이 확신으로 변하고, 거꾸로 내가 본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는 순간 살인은 쉬워진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만 결론내릴 수 있을까?
(이 부분부터 결말부에 대한 정보가 약간 포함되어 있다.)
7년 전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결말부 배질의 설명이 오차 없이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다시 집어든 <어두운 거울 속에>는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의혹은 사라질 줄 모른다. '안락의자 탐정'이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꼭 들어맞듯, 배질은 벽난로 앞의 안락의자에 앉아 범인과 독대한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노라며, 나에게만이라도 죄를 고백함으로써 너의 영혼을 편하게 하라는 훈계로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범인은 "당신을 내 말을 안 믿는군요"라며 정색을 한다.
"남은 평생 전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환각인지 알 수 없을 테죠. 습지를 걷는 사람처럼 다음에 발을 디딜 곳이 단단한 땅일지 수렁일지 모르며 살아야 하는 겁니다. (…) 우연이라고요? 운? 그 정도밖에 안 되십니까? 전 그걸 생각할 때마다… 불안한 기분이 드는데, 당신은 아닙니까? (…) 당신도 나도 그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완전한 진상을 알지 못할 테죠. 하긴 뭔들 알겠습니까. 세상 모든 일이 수수께끼인데요. 여기에 퍼즐이 하나쯤 추가된들 달라질 건 없겠죠."
배질은 안간힘을 다해 과학적 사고의 힘을 믿으며 자신의 추리에 틀린 부분이 없음을 확신하는 것 같지만, 소설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나는 건 범인의 비밀스러운 미소뿐이다. 우리는 배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 배질은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마치 자신의 '생령'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포스티나처럼, 그런 것이 20세기 미국에서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리 나는 나라고 생각하려 애써도, 마음속 한구석에선 그게 꼭 사실은 아니란 생각이 자꾸만 들거든요. 난 지금 여기서만 포스티나 크레일이고 언제든 다른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느낌이랄까요. 삶이 이렇게 꿈만 같은 건 그 때문이겠죠"라고 되뇌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어두운 거울 속에 비치는, 윤곽선이 뭉개진 모호한 내 얼굴을 들여다볼 때처럼 말이다.
설령 거울에 내 얼굴이 비치지 않더라도, 내가 거울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눈을 볼 수 있다면 그 눈은 나를 볼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그러나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앞에서 섬뜩한 공포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거울 속에서 보고 있는 그 얼굴이 내가 맞는 건지 확신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목의 솜털이 천천히 곤두서는 그런 느낌 말이다.
어쩌면 이 개운치 않은 느낌은 <어두운 거울 속에>의 탐정 배질의 캐릭터 자체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배질의 통찰력이 세속을 완벽히 장악하지 못하거나, 그의 이해력이 가닿지 않는 부분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의문을 배재할 수 없는 것이다. 배질은 셜록 홈즈 이후 전형이 되어버린 귀족적 탐정에서 별다른 변주를 보여주지 않는다. 특히 배질의 약혼녀 기젤라까지 합쳐진다면,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변해버린 미국 땅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귀족처럼 묘사된다. 기젤라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 피난민으로, "유럽과 전전 세계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미소"를 짓는다.
"전쟁을 한 번만 더 했다간 이런 식으로 미소를 짓는 사람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 것이다. (…) 한순간 그녀가 잃어버린 문명의 유산처럼 보였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아티카나 리디아의 조각상처럼 부서졌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1920년대쯤, '아름다운 시절'로 통칭되는 유럽 대륙의 잃어버린 시절에나 어울릴 법한 인물들이 평범하고 세속적인 현대를 견뎌나갈 수 있는 건, 주위의 무지와 오해와 편견을 교정해주고 마땅히 그래야 할 결론을 대신 내려주는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기젤라와 배질은 예전부터 1번가의 평범한 모퉁이 술집을 즐겨 찾았는데, 전쟁 이후 새롭게 등장한 '괴물' 주크박스에 불쾌한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이곳의 손님들이 "디킨스나 사로얀의 등장인물" 같은 괴짜와 속물을 연상시켜 흥미롭기 때문이다. 정작 1번가 술집의 단골들은 그들에게서 이질감을 느낀다. "(기젤라와 배질은) 5번가나 파크 애비뉴에 속한 이방인이었다." 기젤라와 배질에게는 자신들을 훔쳐보는 비슷한 계층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술집에 가는 것이 일시적인 기분 전환이다. 정작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고급스런 커플을 불편해하지만, 그 불편함마저도 두 사람의 남다른 외모와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만으로 끝나버린다.
생령 수수께끼에 휘말린 불운한 여인 포스티나 크레일에 대한 묘사는 더한층 잔인하다. 기젤라나 앨리스 같은 아름다운 여인들에 비했을 때, 부모님을 일찍 여읜 뒤 매사에 자신 없고 소심하게 행동하는 포스티나에 대한 배질의 시선은 가혹하다. 중세 시대 마녀나 주술사로 지목된 이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 가면서도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을 전율하게" 했으며 "힘을 가졌다는 느낌을 표현할 건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이들"이라면서, "늙고 초라하고 주름이 쭈글쭈글한 노파나 늙고 힘없는 영감"과 더불어 "미모나 재산,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한 젊은 외톨이 아가씨"도 이 목록에 끼워 넣어야 한다고 공언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마녀는 독살범 및 히스테리 환자와 같은 계층에 속한다. 좌절되고 소외된 이들이, 즐거움을 누리고 긍지를 가질 기회를 주지 않은 사회에게 교활하고 사악하게 보복하는 것이다."
음, 이 정도면 홈즈나 푸아로, 피터 윔지나 파일로 밴스 같은 탐정들의 고전적 매력이나 독특한 유머 감각으로 그들의 '재수 없음'을 완화시켜주는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지도… 다시 말해 탐정의 매력보다는 희생자, 범인,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군상들의 생생한 심리 묘사와 그들의 인간적인 약점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어두운 거울 속에>의 희귀한 매력 중 하나라고 꼽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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