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하나 없는 성장기를 거쳐 성인이 된 그녀는 이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적어도 어린 시절의 단절감에서 벗어나 다정함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었다. 이러한 그녀의 평범한 소망은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되었다.
집착하는 사람이 타인에게 사랑 받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남자들은 그녀의 지나친 집착에 쉽사리 싫증을 내거나 부담을 느꼈다.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극단적으로 두 가지였다. 사람을 지나치게 믿거나(믿고 싶어 하거나), 지나치게 믿지 않거나.
격렬한 연애가 실연으로 귀결되는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그녀는 다시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로 결심했다. 남자들과 친구들에게서 상처받는 일을 그만 두고 싶었다.
에로스적 욕망을 폐기하고 그녀가 달아난 곳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자기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냥 관심만을 기울였을 리 없다. 쾌감은 자기 우월감으로부터 왔다. 그녀는 우월감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시인이 된 그녀는 부러 난해한 시를 썼고, 밤을 새워 다작했다. 그녀는 스스로 천재라고 믿고 싶어 했다. 천재임을 증명할 근거를 스스로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혼자 시험을 부과하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시험을 혼자 치렀다. 시험을 통과했을 때의 우월감이 짜릿한 만큼, 실패했을 때의 자괴감은 끔찍했다. 그렇게 우월감과 자괴감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오랜 세월 그녀는 자기하고만 놀았다. 좌절된 에로스적 욕망이 자기애로 둔갑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자기가 천재인 줄 아는 오만한 바보라고 조소했다. 그녀가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고 싶은 욕망에 좌절하고 그 욕망을 적절하게 풀어나가는 방식을 알지 못한 가련한 영혼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펴냄)를 읽는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자기와 닮은 여인, 에리카를 만난다. 에리카 역시 에로스적 욕망을 좌절당하고 환상 속 우월감을 먹고 살며 그에 비례하여 자기를 학대한다.
윤은 소설을 읽으며 자기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 동안 자기가 피땀 흘려 축조해 왔으며 한 번도 깨부수지 못한 마음의 감옥이 선연히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장편 소설이지만, 이야기는 단순하다. 괴상한 여자 에리카가 한 남자 클레머를 서너 번 만나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에리카가 느끼는 복잡다단한 심리는 거의 백과사전을 방불케 한다. 그녀의 변태적인 심리는 기묘한 연애 심리의 극단을 보여준다.
에리카라는 여자, 자기애로 왜곡된 영혼은 어떻게 자기와 타인을 학대하는가
▲ <피아노 치는 여자>(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사회적으로 보자면, 자기 우월감(흔한 말로 잘난 맛!)만이 사는 힘이 되는 나르시시스트들도 옛적보다 많다. 이들의 경우 관심이 자기에게만 쏠려 있기에 우월감과 열등감은 일생의 중차대한 문제가 된다. 근래 급속도로 증가한 자살률도 나르시시스트 그룹의 성장과 관련 있지 않을까. 지나친 자기 집중에서 발생하기 쉬운 열등감은 곧 죽음 같은 우울을 불러낸다.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얄밉다기보다 슬픈 존재다. 나르시시스트의 깊은 속에는 사랑에 절망하고 사랑의 무능을 한탄하며 우는 아이가 있게 마련이니까. 에리카의 성격은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어머니는 에리카를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우월감을 조장한다.
"찬란하게 돋보이는 일에 그녀는 잘 훈련되어 있다. 자신은 모든 것이 그 주위를 도는 태양이므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위성들이 달려와서 그녀를 경배하게 되는 거라고 늘 듣고 배워왔다. 그녀는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45쪽)
그녀는 항상 특별한 것을 원한다. 늘 많은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정반대의 방식을 선택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그녀는 혼자서 저렇게 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64쪽) 난 너희들과 달라. 대체로 우월감에 빠진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이렇게 선언한다. 독특한 개성을 부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이기 쉽다.
에리카의 우월감과 자기애의 근원은 어머니와 할머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과부이거나 과부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억압된 에로스적 욕망은 자기애로 변한다. 타인에게서 좌절한 리비도가 어디로 가겠는가. 자기에게로 밖에 달리 갈 곳이 없지 않은가. 자기애는 필히 우월감을 필요로 한다. 앞의 윤도 바로 이런 경우다.
그런데 어머니와 할머니는 스스로 우월감을 생산할 수 없다. 그들은 분신인 딸(손녀)을 통해 대리 만족하려 한다. 그래서 분신에게 끊임없이 우월감을 조장하고, 높은 기준에 맞출 것을 요구하며, 에로스적 욕망을 억압하기를 강요한다. 딸(손녀)은 저도 모르게 그들의 욕망을 학습한다. 에리카는 그녀들에게 우월감, 자기애와 함께 성적으로 자신을 가두는 일도 함께 배운다.
나르시시스트는 지속적으로 자기의 우월함을 확인해야 한다. 우월감에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남들과 경쟁해서 이기기를, 그를 지배하기를 강하게 소망한다. 그래서 자기애가 강한 사람일수록 지배욕과 정복욕이 강하다.
지배욕이 강한 어머니는 에리카를 옆에 꽁꽁 묶어 두려고 하며, 폭력적으로 구속하고 감시한다. 에리카는 지배와 폭력으로 점철된 어머니의 방식을 증오하면서도 학습하고 모방한다.
드높은 자기애에 빠진 그녀는 물론, 남학생들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지 못한다. "어머니는 그녀가 체면에 손상되는 일을 하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고 애걸한다."(106~107쪽) 어머니의 억압 때문에, 자기애를 손상하고 싶지 않은 자의식 때문에, 일상에서 저지르는 서툰 실수들 때문에, 그녀는 남자들의 호감을 사지 못한다. 이성 관계에서 좌절을 겪으면서 에리카의 자기애는 일그러진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한 나무에서 뻗은 두 가지이다. 우월감은 드높은 자기 기대를 동반한다. 우월감에 잠식된 영혼에게 부과된 과제는 훨씬 더 난해하다. 그래서 그들은 열등감에도 더 자주 빠져들며, 깊게 좌절하고 절망하기도 쉽다. 자기 비하에 자주, 심하게 빠져드는 사람은 때때로 강한 우월감의 소유자이다. 그렇기에 에리카는 남들보다도 쉽게 열등감을 느끼고 좌절하며, 상처도 더 많이 받는다.
상처 받은 자기애는 자기 껍질 안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치유를 구한다. 자기애가 그토록 강한 그녀는 약해 보이는 것을 결코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자기 껍질 안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잘 말라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뻣뻣하게 풀 먹인 이 껍질"(46쪽) 안에 웅크린 채 모든 것을 높은 곳에서 바라본다.
그녀는 자아의 마지막 부분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가슴으로 가는 열쇠"를 "맡겼다가 그것을 언제든 다시 빼앗을 수 있다"(108쪽)고 생각할 뿐이다. 자기애가 자연스런 관계 맺기나 에로스적 욕망의 건강한 추구를 방해하고, 그 실패가 더욱더 자기애를 조장하는 악순환이다.
그런데 에리카의 자기애는 어느 정도 사상누각이다. 음악계의 최정상에 오름으로써 모든 것을 보상받으려 했던 에리카는 마흔이 다 된 나이에 실패를 자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남들보다 잘나기 위해서 동참하지 않은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서 소외감과 열패감을 느낀다.
어머니가 좌절된 에로스를 에리카에게 투사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본 대로 자신의 자기애로 딸의 자기애를 부추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딸을 에로스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어머니는 딸을 거의 남편으로 대한다. 딸과 한 침대에서 자며, 딸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지배한다. 에리카는 어머니에게서 에로스가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배운다.
그녀는 어머니를 무시무시하게 증오하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어머니의 품에서 안정을 느낀다. "에리카는 사실 어머니 몸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가 따뜻한 양수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싶다."(94쪽) 간섭하지 말라고 자기를 내버려두라고 악을 쓰면서도, 외부에서의 손짓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는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한다. 외부는 자신에게 흠집 내기 일쑤이므로 두렵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에리카가 최고라고 늘 말해준다. 이 말은 딸을 꼭꼭 묶어두는 올가미다. 어머니의 품안에서는 자기애를 다치지 않기에, 에리카는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 조련사와 곰처럼 모녀는 서로를 증오하지만 서로 없이는 살 수 없다.
소녀 시절 에리카는 또래들의 놀이판에서 소외당하자 면도칼로 손등을 긁으며 자해의 여정을 시작한다. 소녀의 자해는 이율배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소녀는 어머니의 규율을 어겼기에 죄책감으로 자기를 스스로 처벌했으며, 동시에 그 규율에 대한 억눌린 증오심을 표출한 것이다. 또한 그녀는 사랑 받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자신을 소외시킨 타인들에 대한 증오를 동시에 느낀다. 더구나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사랑이 폭력으로 행사될 수 있음을 배웠기에, 가장 사랑하는 대상인 자기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었다.
그녀는 타인에게도 가학적이다. 소녀 에리카는 물건을 훔치고 남들을 미행해서 약점을 발견하고 고발한다. 여기에서 미행은 좌절된 연대욕구(에로스적 욕망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를 충족하는 왜곡된 방식이기도 하다.
자기애는 지배욕을 성장시키기에, 성인이 된 에리카는 강압적인 교사이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가학적으로 명령하고 복종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고독한 에리카는 소녀 시절처럼 다른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서 제자들을 습관적으로 미행한다. 물론 파괴욕이 함께 간다. 그녀는 미행 중 제자들의 허물을 발견하면 가차 없이 응징한다.
파괴욕이 가장 과격하게 공격하는 대상은 바로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자기 몸을 면도칼로 습관적으로 벤다. "그녀는 원래 갈라져야 할 곳이 아닌 곳을 잘라내 신과 어머니가 기묘한 합의 하에 붙여놓았던 것을 갈라놓는다."(111쪽) 자해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찢고 싶은 욕구, 즉 자기 감옥을 부수고 싶은 욕구의 발현일까.
동시에 이것은 여전히 지극한 나르시시스트의 행동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내맡겨진 것보다는" "스스로를 자신에게 완전히 내맡기"(110쪽)는 것이 훨씬 낫다고. 에리카는 타인의 학대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스스로 학대의 주체로 군림하면서, 자기에 대한 지배권을 수호하고 싶다.
그녀의 성욕은 간접적으로 해소될 뿐이다. 그녀는 남자들처럼 핍쇼를 구경한다. 여자들의 자위행위를 훔쳐보면서 흥분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는 터부이"며 "스스로를 만지는 일은 있을 수 없"(70쪽)기에.
모두에게 강해 보이고 싶은 그녀는 동시에 이율배반적으로, 누군가에게 비굴하게 복종하고 싶다. 어머니의 지배 안에서 안온했기 때문이다. 이 소망을 충족해주는 어머니는 늙고 쇠약해간다. 그녀는 자신을 명령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그'를 꿈꾼다. '그'는 어머니의 권력을 벗어난 명령권자이면서 에리카의 의지에 따르는 명령권자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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