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가 왜 이런 문체를 쓰는지 말씀드려야겠군요. 저자의 문체를 따라하고 있습니다. 저자도 다른 책에서 이런 문체를 쓰진 않겠지요. 그런데 이 문체가, 어쩌면 이 책의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저 역시 따라가려고 합니다.
이 책의 세 가지 장점
▲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이진우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
첫 번째 장점은 철학자의 저서이지만 구체적인 사회 문제들을 훑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맨 앞부분의 얼마와 맨 뒷부분의 얼마를 빼면 철학자가 아니라도 쓸 수 있는 글, 혹은 철학자라 해도 어지간히 사회에 관심이 없으면 쓸 수 없을 글로 구성된 것처럼 보입니다. 중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선 다소 철학자의 논의가 보이지만 만일 그 점을 무리 없이 납득하는 이라면 나머지 부분은 평이하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장점은 굉장히 읽기 쉽게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다소 철학적인 논의가 있는 앞이나 뒷부분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가독성인지를 물을 수 있을 텐데, 저는 논술 교재를 연상했습니다. 논술 교재 역시 학생들 읽기 쉬우라고 이런 문체를 쓰는 경우가 있거든요.
문체만 평이하게 간 것이 아니라 각 장 군데군데 표가 들어가 있습니다. 인용하는 소재들도 다양하지요. 솔직히 개그콘서트를 인용한 것까지는 '그런가' 했습니다만, 디시인사이드(dcinside.com)의 '2011 수도권 부동산 계급표'를 언급하고 인용한 부분에선 뜨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83~184쪽). 물론 좋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역시 논술 교재처럼 각 장 말미에 이 논점에서 좌우파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도표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총론인 1장과 "자유인가, 평등인가?"를 물은 2장은 영락없는 논술 교재로 보입니다. 어쩌면 "성장인가, 분배인가?"를 물은 3장까지도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논술 문제에서 가끔 이런 영역까지 다루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재벌 문제를 다룬 4장, 복지 문제를 다룬 5장, 지역 균형 발전을 다룬 6장, 통일 문제를 다룬 7장은 논술 교재 같은 평이한 어조로 우리 사회의 이념 대립을 낳는 첨예한 문제들을 양쪽의 입장에서 요약 정리합니다.
이런 종류의 요약 정리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좋지만, 뭔가 적당히 아는 사람에게도 매력적입니다. 본인이 알던 것을 다시 정리하는 효과도 있고, 빠진 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으며, 알던 것 사이로 새로운 통찰이 있으면 탄성을 지르게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정치에 다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도 이 책을 읽는 건 대단히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이 책의 세 번째 장점은 중도파를 강조하지만 이념의 문제에 천착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걸 장점으로 보는 건 앞의 두 개와는 달리 제 주관적 신념이 반영된 것이겠네요. 이 책의 제목은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로 되어 있습니다만, "좌우를 분별해야 중간이 보인다"로 바꿔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이쪽 제목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이념의 문제를 성급히 건너뛰려는 어떤 중도파들에게 질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은 무엇을 바라는가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면 독자들은 이 책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간파하기 힘들겠지요. 저는 이 책의 목적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이 책은 본문 안에서 <나는 꼼수다>(<나꼼수>)나 <닥치고 정치>(김어준 지음, 푸른숲 펴냄)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피력합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나꼼수>나 김어준 팬들이 이 책을 비토하는 일은 없기 바랍니다. 그 비판은 굉장히 온건한 수준이니까요. 오히려 저는 그 비판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가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저자는 감성(만)을 강조하는 정치를 경계한다 말하는 등 몇 가지 비판의 근거를 들이밀고 있습니다만, 저는 저자가 미처 말하지 않은 좀 더 실용적인 목적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나꼼수>나 <닥치고 정치>의 목적은 당연히 정권 교체입니다. 김어준이 "닥치고 정치"라고 말하는 것의 정확한 뜻은 이번에야말로 투표를 해서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진영'이 중요합니다. 박근혜가 어째서 안 되고 '우리 편'이 어째서 이겨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하지요. 이때에 박근혜와 우리 편에 대한 설명은 0과 100으로 극단화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책 여기저기에 시사되어 있기도 하지만, 저자가 싫어하는 상황은 바로 이것일 겁니다. 그런데 이걸 싫어한다는 것은 대체 뭘 의미하는 겁니까? 저자는 설마 박근혜가 당선되기를 바라는 걸까요? 저자는 굳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꽤 흥미로운 상황이지요. 어떤 이들은 그가 '박근혜빠'라는 결론을 내리고 더 흥미를 느끼지 않겠지만, 저는 흥미롭습니다.
저는 저자가 대선에서 누구를 응원할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상황이 아닐 테니까요. 이 저술이 의도하는 바는 우리가 대선에서 진영 싸움을 하는 방식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온 식으로, 혹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 문제를 열거하고 그것에 대한 좌우익의 해법을 견주어 보자는 겁니다.
만약 이것이 합리적인 토론으로 흘러간다면, 그 해법은 점점 더 중간으로 올 거라는 게 저자의 생각입니다. 이게 저자가 환영할 중도의 길이죠. 만일 싸움이 그런 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면 선거가 끝날 때 여권 주자와 야권 주자의 정책 거리는 제법 좁아지고 우리는 누가 당선되든 각각의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의 개략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사회 문제에 대한 대처도 잘 될 것이고, 집권 이후 다시 서로의 의견을 '수꼴'이니 '좌빨'이니 부르면서 난리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겠지요.
그러나 물론 정치 세력이 이러한 상황을 의도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치인들은 집권 이후라면 모를까, 선거 기간에는 상대방과 자신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강조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거기에 부응하여 각 진영의 지지자가 극단적인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겠지요. 이건 하나의 모순입니다. 정책으로 본다면 중도의 입장이 더 현실론에 가까운데, 이 현실론을 선거판에서 견주어 보자는 얘기는 '이상론'이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주장을 누군가에게 얘기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중도파 유권자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여기서 중도파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을 텐데, 하나는 실제로 여야의 정쟁에 염증을 느끼는 정치적 중도파일 것이고, 둘은 정치적 중도파를 구성해야 할 사회경제적 중산층(혹은 중간층. 두 단어가 책에 다 등장하더군요)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문체와 형식은 논술 교재와 흡사한 것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 종류의 중도파가 가능할까?
하지만 이제부터는 책 바깥의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정책적으로는 '현실론'일지라도 현실 정치로서는 '이상적'이지요. 그러나 그건 저자도 알고 있는 얘기일 테니 하나마나한 소리일 것입니다. 저는 저자가 편의상 생략했거나 간과한 부분들에 대해서 조금 더 덧붙여 볼까 합니다.
먼저 저는 저자가 지향하는 중도파가 한국 사회 기준으로는 꽤 좌편향으로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스스로를 중도 우파라 생각하는지, 혹은 중도 좌파라 생각하는지, 박근혜를 지지하는지 아니면 안철수나 문재인을 지지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각 영역의 사회 문제를 거론하고 대체로 그 문제들이 매우 심각하다고 진단한 후 그에 대한 좌우파의 해법을 찾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이 문제들의 심각성을 인지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 보수 언론의 기준에서는 이미 좌파적입니다.
물론 저자가 인용하듯이 <조선일보>도 이제 사회 문제들을 심각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그건 기획 기사를 만들어낼 때만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정치 세력들이 정책을 만들어내는 영역으로 가면 <조선일보>는 또 다시 사회 문제에 대한 중도 좌파적(혹은 중도 우파적) 접근에도 극단적인 수사를 붙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조선일보>가 급진 우파이기 때문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중·동에 있어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승부에 상관이 없는 한 그들은 얼마든지 사회 문제에 합리적인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파가 개입되면 그게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는 것은 급진 우파 이념의 실현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이 청와대에 들어가서 권력을 분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지 않으면 저자가 정당하게 서술했다시피 '신자유주의'를 실현한 김대중 노무현 집권 기간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조선일보> 등이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사회 문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 말이 소위 진보 개혁 진영의 사람들에게 잘 먹히지는 않습니다.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저자가 원하는 방식대로는 아니지만, 아마도 포퓰리즘적 방식으로겠지만, 저는 이번 대선에서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정책 공약이 이전에 비해 훨씬 좌클릭할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 이건 생각이 아니라 벌써 실현되고 있군요. 좌파적 해법과 우파적 해법이 서로를 견주며 합리적으로 조율된 안이 아니라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온 정책이란 문제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책들 자체가 아주 엉터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대선이 지난 후에 이것들이 실현되기만 해도 한국 사회의 문제들이 어느 정도는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정책들은 실현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에서 저는 부정적입니다. 정치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천진난만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려는 말은 일반적인 중도파 시민들은(설령 그들이 폭넓게 존재한다 하더라도) 선거가 끝난 후 정치 세력을 규제할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심부는 조직되어 있는데, 주변부는 파편화된 불균형한 상황인 것입니다. 대중 조직도 이익 단체도 빈약합니다. 최장집이 현재의 복지 담론이 정책의 '아웃풋'에만 신경 쓸 뿐 '인풋'의 문제는 챙기지 못하고 말했던 게 이 부분일 것입니다. 사회 문제가 심각해서 그에 대한 중도적 해법이 요구되고 그 열망이 선거에 반영된다 하더라도, 이래서야 선거가 끝난 이후를 기약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저자가 굳이 적지 않은 내용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적어봤자 딱히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직화의 문제는 개인들의 성찰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그리고 주변부가 조직화되지 않아 정당이 시민을 대의할 접점을 찾을 수 없다는 '사태'와, 정당에 대변자가 없어서 조직화가 더 어렵다는 '사태'가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있지요.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와도 같은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문제에 어떻게든 실천적인 결론을 내려면 민주통합당 안에 왼쪽 날개를 만들어야 한다는 둥, 혹은 독자 노선의 진보 정당이 필요하다는 둥의 일종의 자신의 지향과 그 지향을 실천할 전략이나 전술에 대한 커밍아웃이 필요하니 저자로서는 피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한 번 짚고 넘어갈 문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중도파에도 급진주의가 있지 않을까?
다음으로 저는 저자가 간과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저자가 말하는 중도파는 정치적 개념이기도 하고 사회 경제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기대와는 달리 사회 경제적 중도파가 정치적 중도파가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이게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자는 급진주의가 좌우파의 극단에만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물론 이것은 정치 영역에서 기본적인 상식에 속할 것입니다. 만약에 좌파와 우파가 서로 간의 타협을 통해 중도파를 형성해온 사회라면 그게 자연스럽겠지요.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사회라면, 중도파가 급진주의를 형성할 가능성도 따져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자는 '이데올로기'와 '이념'을 구별하면서, 부정적인 단어로 변한 '이데올로기'는 현실 문제와 피드백을 갖지 않지만 '이념'은 다르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중도파들이 '이데올로기'를 가지는 상황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저자가 다소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나꼼수>의 지지자들은 어떠합니까? 일단 이들은 사회 경제적으로는 대체로 중도파일 것입니다. 이는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야권의 지지층이 그렇지요. 또한 이들은 정치의식적인 차원에서도 중도적입니다. 재벌이나 부자에 대해서도 반감이 있고 노동자 정치나 좌파 담론에 대해서도 반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양자의 극단 사이에서 뭔가를 조율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자신들의 왼편과 오른편에 대해 굉장히 배타적입니다.
이것은 저자가 진단한 바 '자유주의'가 충분하지 않은 사회의 일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명박을 오사카 태생이라고 비판한다든지, 야권 단일화에 참여하지 않은 진보 쪽 후보들을 맹공한다든지 하는 행태는 '자유주의'의 과소에서 나온 일이라고 볼 수 있는 면이 있으니까요.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사태의 핵심은 한국 사회의 중도파가 저자가 기대한 중도파와 사뭇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저자가 우려하는 '급진 좌파'의 담론이 사실은 사회 경제적으로도 정치의식으로도 중도파인 이들이 주도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중도파에는 그런 이들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나꼼수> 지지층과 안철수 지지층으로 나눠볼 수 있겠습니다. <나꼼수> 지지층이 방금 말한 '중도파 급진주의'를 주도하는 이들이라면, 이보다는 훨씬 덩이가 큰 안철수 지지층은 대체로 양 정치 세력의 진영 논리에 싫증을 내는 부류일 것입니다. 그러나 싫증을 내긴 내되 저자처럼 좌우를 분별해가며 중도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주장을 적당히 믹스하여 중간값을 만들어낼 것처럼 보이는 안철수와 같은 이에게 기대를 거는 그런 중도일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중도파로 산다는 것은 중도를 둘러싼 이 복잡한 지형에 관심을 쏟고 좌절한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사회민주주의 우파 정도의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국 사회에서 진보신당 이외엔 갈 곳을 찾지 못하는 (물론 민주통합당을 지지하는 길도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이 책을 보고 고민이 더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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