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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처의 유령이 나를 죽이려 한다!

[김용언의 '잠 도둑']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

소설 내내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주인공 '나'는 갓 여학교를 졸업한 순진무구한 처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 살 길이 막막해진 나는 부유한 반 홉퍼 부인의 비서로 취직한다. 1년에 단돈 90파운드를 받으며 하녀처럼 반 홉퍼 부인의 온갖 시중을 들어야 하는 나의 삶에 미래 따윈 없다.

반 홉퍼 부인과 함께 프랑스 몬테 카를로의 코트 다주르 호텔에 묵고 있던 나는 중년의 영국 신사 맥심 드 윈터와 마주친다. 사람들은 맥심이 1년 전 아름다운 아내가 물에 빠져 죽은 뒤 아직도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수군거린다. 나는 소녀다운 열정으로 맥심을 사랑하게 된다.

나에게는 일찍이 책에서 읽었던 것과 같은 괴로움이라든가 섬세한 마음 따위는 없었다. 도전, 추적, 즉각적인 응수, 재빠른 곁눈질, 도전하는 듯한 미소, 그런 것도 없었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단을 나는 알지 못했다.

맥심에게 빌린 시집 표지 뒷장에는 '맥스에게…레베카로부터. 5월 17일'이라고 적혀있었다. 죽은 아내 레베카의 독특한 필체, "옆으로 기운 키가 큰 R자가 특히 더 다른 글씨를 압도하고 있"는 문구를 보며 나는 비참함에 사로잡힌다. 레베카처럼 아름답고 부유하고 뛰어난 교양과 지성을 갖추지 못한 한낱 어리고 무지한 여자라는 사실 앞에 나는 처음부터 패배감을 느낀다.

그러나 놀랍게도 맥심은 나에게 청혼하며 영국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한 만더레이 저택으로 함께 돌아가자고 한다.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전율하고, 반 홉퍼 부인은 잔인한 충고를 던진다.

"물론 너는 그 사람이 너하고 결혼하는 까닭을 알고 있을 테지? 그 사람이 너를 사랑한다는 생각 따위를 하여 우쭐해선 못써. (…)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거기에서 혼자 산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해졌을 뿐이야."

부인의 불길한 예언을 뒤로 하고 이탈리아에서 행복한 신혼여행을 마친 다음 만더레이 저택으로 향하는 첫날,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대저택에 들어간다는 흥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저택의 냉담한 하녀들과 하인들 앞에서 나는 움츠러든다. 특히 레베카를 어릴 때부터 돌봤고 맥심과 결혼할 때 함께 이 집에 들어와 죽 살았다는 하녀장 덴버스 부인은 내게 증오의 눈길을 던진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의자를 자기 것처럼 여기고 한가롭게 앉아 있는 여자는 내가 처음은 아니다. 나보다도 먼저 다른 어떤 여자가 쿠션 위에 기대앉아 의자 팔걸이에 팔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또한 이 은제 커피 포트로 커피를 따르기도 하고, 컵을 입술에 가져가기도 하고, 몸을 굽히기도 했을 것이다. 마치 지금 내가 하고 있듯이. (…) 개는 늘 그렇게 하던 습관대로 내 옆에 와서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그 사람이 이렇게 사탕을 주었던 것을 개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 <레베카>(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김유경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동서문화사
만더레이 저택의 곳곳은 레베카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어떤 방에 가든지 레베카의 취향에 따른 호화로운 가구로 가득하고, 책상 위 서류꽂이에는 '아직 답장을 쓰지 않은 편지' '보존해둘 편지' '집안일' '영지 일' '식단표' '잡일' '주소록' 등이라고 쓰인 명찰이 붙어있는데 거기에는 모두 레베카의 특징적인 날카로운 필적이 적혀있다. 책상 앞에 처음 앉은 나는 마치 여주인의 책상을 허락도 없이 들여다보는 불청객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고 낯선 목소리가 묻는다. "드 윈터 부인이십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한다.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군요. 드 윈터 부인은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레베카가 쓰던 보트의 이름은 '쥬 르비얀', 즉 '나는 돌아간다'라는 뜻이다. 레베카가 쓰던 서쪽 침실은 매일매일 덴버스 부인이 먼지 한 톨 없도록 청소하기 때문에, 가구에도 덮개가 씌어져있지 않고 헤어브러시, 향수, 분, 꽃, 슬리퍼, 실내복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마치 오늘이라도 그녀가 돌아올 것처럼.

"헛수고입니다. 당신이 아씨를 이기려고 하지만 어림도 없는 짓입니다. 아씨께서는 돌아가셨어도 아직 이 저택의 아씨입니다. 진짜 드 윈터 부인은 당신이 아니라 우리 아씨인 겁니다. 당신은 그림자이고 유령인 겁니다. 당신이야말로 기억에서 잊혀지고 환영을 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만더레이를 아씨에게 돌려주려고 하지 않습니까? 왜 여기서 나가지 않는 겁니까? (…) 죽어야 할 사람은 드 윈터 부인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정말이지 어쩌면 레베카의 유령이 여전히 만더레이를 활보하는 건 아닐까? 나는 이러다가 미쳐가는 게 아닌가 두려움에 떤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그토록 다정하고 활기찼던 맥심이 만더레이에 돌아오면서부터 점점 달라진다. 그는 이곳에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고 중얼거리면서 나를 점점 외롭게 만든다.

나는 레베카의 모든 것을 상상하게 된다. 나보다 키가 컸고 하얀 피부에 검은 머리를 휘날렸다는, 키에 비해 발이 작고 무척 날씬했다는 그녀의 말투와 행동거지를 상상한다. 나는 남편이 사랑했던 그 여자가 되기를, 어리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이 아니라 모두를 단숨에 사로잡았던 레베카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건 마치 내가 레베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도 나는 멍하니 공상에 빠진다.

아마도 시간으로 따지면 겨우 60초 가량의 짧은 동안에 나는 완전히 레베카가 되어, 지루하고 재미없는 나라는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고 만더레이에 한 번도 온 일이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몸과 마음이 모두 과거 시대로 되돌아가 있었다.

"당신이 방금 마치 다른 사람이 되다시피 해서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르던데. (…) 갑자기 당신은 아주 나이가 들어 보이고 방심할 수 없는 얼굴 표정이 되더군. 그다지 좋아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어."
"제가 늙어 보이는 게 싫으신가요?" 나는 말했다.
"싫소."
"왜요?"
"당신답지 않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저도 할머니가 될 거예요. 안 될 수가 없잖아요. 머리가 희어지고, 주름이 생기고, 여러 가지로 달라지겠지요."
"그런 건, 난 아무렇지도 않아. (…) 당신이 방금 지었던 것과 같은 얼굴 표정이 난 싫단 말이오. 입술은 비뚤어지고, 눈에는 어떤 지식이 번뜩이고 있었어.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종류의 지식은 아니었소."

그러나 끔찍한 가장 무도회가 열린 다음 날, 안개 때문에 난파된 화물선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1년 전 레베카가 타고 나갔다 죽었다던 보트가 물 속 깊이 묻혀있다 떠오르고, 그 안에는 놀랍게도 이미 가족 묘지에 묻혀있다던 레베카의 시신이 발견된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레베카에 얽힌 추악한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된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고딕소설 <레베카>(김유경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가 지루하다고 느끼는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앞부분에서 여주인공과 맥심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매우 천천히 진행된다. 게다가 '그 남자와 나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는 자의식 때문에 끝없이 괴로워하고 열등감에 시달리는 내면 심리는 다소 지지부진하게 느껴질 만큼 상세하게 서술된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보면 납득하게 된다. 이 답답하고 우유부단한 여주인공의 성격이 그만큼 길게 상술되어 있기 때문에, 만더레이 저택에 도착한 뒤 그녀가 왜 그렇게 레베카의 흔적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지, 유령이 진짜 주인이고 자신은 불청객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왜 그렇게 이상할 만치 순응하게 되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심지어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했으며, 소설의 제목은 '레베카'인 것이다. 대문자 R이 나머지 글자들을 압도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레베카'.

레베카, 레베카, 언제나 레베카인 것이다. 내가 레베카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영구히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얽매인 것처럼, 아마 그녀도 내게 얽매여 있는 게 아닐까. 덴버스 부인이 말하듯이 그녀는 진열실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그녀의 책상에서 편지를 쓸 때는 옆에 앉아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입었던 비옷도 손수건도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아마 그녀도 그런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레베카>의 이야기 전체를 감싸고 도는 격정은 말할 것도 없이 브론테 자매의 그것이다. 특히 기본 줄거리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류경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로부터 그대로 갖고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특정한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기운과 고독한 인물의 영혼이 만났을 때 터져나오는 신비스런 격정을 다룬다는 면에서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펴냄)과 많이 닮았다.

동시에 주인공들은 감정의 광폭한 진폭을 절대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 절제된 예절과 사교적 매너를 통해 아무런 상관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상황을 외면한다. 오히려 그 무심한 대화들이 독자들에게 아주 은밀한 긴장감을 차근차근 선사한다는 점에 있어서, <레베카>는 제인 오스틴의 공포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부분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인 에어>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 로체스터 부인과 <레베카>의 레베카 드 윈터 사이의 유사성이다. 소설 후반부에 밝혀지는 레베카의 본모습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비웃고 특히 자신을 지배하려 드는 남자들을 경멸하며 그들의 사랑을 갖고 노는 일종의 색정광처럼 묘사된다.

<제인 에어>에서 로체스터가 열대 지역의 피를 이어받은 아내 버사의 격렬한 감정과 에로틱한 매력을 두려워하고 증오하며 마침내 유폐시켰듯, <레베카>에서도 창백한 영국 귀족 맥심 드 윈터는 결혼 생활의 신성함을 비웃고 남성을 월등하게 뛰어넘는 능력과 매력으로 모두를 굴복시키던 아내 레베카를 '악마'라고 부른다.

레베카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언제나 타인의 입을 거쳐야만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특히 '나'에게 강한 인상을 안겨주는 진술은 맥심과 덴버스 부인의 회상에서 비롯된다. 레베카는 맥심에게 있어선 씻을 수 없는 고통과 굴욕을 안겨준 악마 같은 여자다. 한편 덴버스 부인이 레베카를 회상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연인을 대하듯 숭배와 독점욕에 사로잡혀있다.

덴버스 부인과 레베카의 이상하리만치 친밀하고 끈끈한 관계는 레즈비언적 감수성의 일면을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제인 에어>에서 로체스터가 '순수한 백인'이 아닌 버사의 이국적 매력에 매혹되었다가 이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 것처럼, 여기서 레베카는 '순수한 영국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색정광적 측면, 남성을 조롱하고 깔보는 태도, 레즈비언적 감수성을 동시에 겸했다는 측면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마이너리티로 모습을 바꾼다.

어쩌면 <제인 에어>의 버사 로체스터 부인을 주인공으로 다시 쓰기 한 진 리스의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윤정길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처럼, <레베카>를 다시 쓰기 한다면 레베카와 덴버스 부인의 관계가 가장 흥미로운 이슈가 될 것 같다.

<레베카>는 전반적으로 귀족적인 가치, 가족의 가치, 건전한 이성애의 가치를 강철같이 수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베카>의 첫 부분(결말부 모종의 사건 이후 드 윈터 부부가 만더레이 저택을 떠나 유럽을 방황하는 모습이 처음부터 제시된다)에 드러나는 나와 맥심의 관계를 보자면, '내'가 또 다른 판본의 '레베카'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나는 그동안 맥심의 진심을 알지 못해 두려워하고 가슴 아파했지만, 사실 맥심이 레베카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그 관계가 역전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때때로 기분이 내키면 나를 아무 책임도 없는 응석받이 어린 아이로 귀여워해주기는 했지만, 나의 존재를 곧잘 잊어버리거나 어깨를 두드리며 밖에 나가 놀라고 달래는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일이 나는 싫었다. 나를 좀 더 현명하고 좀더 성숙한 여자로 봐줄 수 있는 어떤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나는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의 존재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아내, 그의 어머니가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레베카의 진실을 털어놓고 난 뒤, 언제나 아버지 같고 멀리 떨어져있는 남자였던 맥심이 나에게 '아이들처럼' 손을 내밀고 '아이들같은'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게 된다. 나는 자신에게 의존하는 맥심을 위해 "이제 소녀가 아니다. 소심하지도 않다.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맥심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거짓말도 하자. 위증도 하자. 선서도 하자. 신에게 욕을 퍼붓자. 기도도 하자. 레베카가 이긴 건 아니다. 레베카는 죽어 버렸다"라며 불경한 맹세를 한다.

결국 맥심은 이런 고백까지 하게 된다.

"이 사건이 당신에게 미친 영향을 나는 잊을 수가 없소. (…)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귀엽고 순진하고 황홀한 모습을 영원히 잃어버린 거요.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당신에게 레베카의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그것도 모두 함께 죽여 버린 거요. 그것은 24시간 동안에 사라져 버렸어. 당신은 완전히 늙어 버렸어…."

그러니까 나는 이제부터 아내이자 어머니이자 딸이자 유일한 친구처럼 맥심을 독차지하며 그의 곁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예전의 레베카와는 다른 방식으로 맥심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언제나처럼 여자들의 영향력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살아야 하는 맥심의 상황은, 어쩌면 <레베카>를 다시 쓰기한 소설(제목은 <맥심>이 좋겠다)로 또 다르게 표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거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공포소설이 될 것이다.

덧붙임. 앨프리드 히치콕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을 무척 좋아했고, 그중 단편 <새>, 장편 <자마이카 여관>과 <레베카>를 영화로 옮긴 바 있다. 히치콕의 <레베카>는 원작소설과 영화가 모두 뛰어난 평가를 받은 드문 예에 속한다. 특히 글자로는 '레베카는 죽었지만, 만더레이 저택의 곳곳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모두가 그녀에게 사로잡혀있다'라고 묘사할 수 있지만,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그곳에 있는 존재'를 히치콕이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직접 확인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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