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초반, 그 도서관 지하에선 10센트 동전을 넣고 구식 타자기를 30분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10센트를 넣고 무시무시한 집중력으로 그 30분의 초 단위까지 아까워하면서 <방화수>을 썼다. 단편 초고를 완성하기까지 9달러 80센트, 즉 2940분이 소요되었다. 그는 원고가 잘 풀리지 않으면 도서관 구석구석을 헤매면서 책의 냄새를 맡고 좋아하는 책의 표지를 어루만지며, 그 절절한 사랑을 글 안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화씨 451>의 배경은 책을 불태우는 시대, 책을 소유하는 것이 범죄가 되는 시대다. 검열과 규약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인 사회의 직접적인 은유라고 해도 무리 없겠으나, 그것만으로 <화씨 451>을 디스토피아적 미래 소설로 규정짓기는 망설여진다. 오히려 국가 차원에서 검열을 가하지 않더라도 사람들 스스로 알아서 책을 미워하고, 책에 대한 관심을 끊고, 책이 없어도 아무런 불편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는 사회의 심상이 훨씬 강렬하게 다가온다. 즉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
가이 몬태그의 직업은 방화수다.
"월요일에는 밀레이를, 수요일에는 휘트먼을, 금요일에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우리들의 공식적인 슬로건이죠."
아주 오래전에는 불을 끄는 직업인 소방수가 있었다. 하지만 건물의 모든 재료가 불연성으로 바뀌고 나서부터 할 일이 사라졌고, 그들에게 "우리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새로운 일거리 '방화수'가 할당되었다.
"우리 전부가 똑같은 인간이 되어야 했거든. 헌법에도 나와 있듯 사람들은 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는 거지. 그리고 또 사람들은 전부 똑같은 인간이 되도록 길들여지지. 우린 모두 서로의 거울이야. 그렇게 되면 행복해지는 거지. 움츠러들거나 스스로에 대립되는 판결을 내리는 장애물이 없으니까. (…) 책이란 옆집에 숨겨놓은 장전된 권총이야. 태워 버려야 돼. 무기에서 탄환을 빼내야 한다고. 사람들 마음을 파괴하는 거지. (…) 열등한 인간이 된다는 두려움, 그 타당하고 정당한 두려움에 초점을 맞춘 거지. 정부 검열관이나 판사, 집행관 같은 파수꾼, 몬태그, 그게 바로 자네고, 나라는 존재야."
몬태그의 옆집에 이사 온 소녀 클라리세는 어딘가 기묘하다. 세상 모든 것에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미친 열일곱"인 클라리세는 세계로부터 얻는 아주 사소한 종류의 환희를 전부 몬태그에게 재잘거린다. 몬태그는 마치 잊고 있던 시력을 되찾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클라리세의 말에 따라 빗물을 맛보고, 민들레를 턱 밑에 간질거려보고, 아침 이슬을 찾게 된다. 매일매일 벽면 텔레비전과 귀마개 라디오에 파묻혀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인공적인 현실에 매몰된 아내 밀드레드와 너무 다른 클라리세를 보며, 몬태그는 처음으로 타인과 대화하는 기쁨을 맛본다.
어느 날 느닷없이 클라리세가 사라지고, 몬태그는 자신의 삶이 텅 비어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점점 궁금해진다. 내가 지금껏 아무 의심 없이 불태웠던 책들에 혹시 어떤 해답이 있는 건 아닐까. 그는 점점 '위험 인물'이 되어간다.
"당신은 그 자리에 없었어. 당신은 그 일을 보지 못했어. 책 속에는 뭔가 우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들어 있어. 그 여자로 하여금 불타는 집 속에서도 빠져 나오지 않고 남아 있도록 만드는. (…)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낸 거야. 책 한 쪽 한 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온갖 사람들을 만나 보면서 이룩해낸 업적을 나는 단지 일이 분만에 재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그리곤 모든 것이 끝장나는 거지."
그러나 비티 서장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몬태그의 궁금증을 짓밟는다. 그들은 "'왜?'라는 의문을 품고 그걸 고집할수록 불행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면서 "시와 눈물, 시와 자살, 울음, 끔찍하고 비참한 느낌, 시와 질병! 죄다 쓸데없는 거예요! (…) 쓸데없는 말들, 어리석은 말들. 끔찍하고 해로운 말들. 왜 사람들은 서로를 못살게 굴지 못해 안달이지?"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어떤 사람이 정치적으로 불행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양면을 가진 질문을 해서 그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대답이 하나만 나올 수 있는 질문만 던지라고. 물론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제일 낫지. (…) 사람들한테 해석이 필요 없는 정보를 잔뜩 집어넣거나 속이 꽉 찼다고 느끼도록 '사실'들을 주입시켜야 돼. 새로 얻은 정보 때문에 '훌륭해'졌다고 느끼도록 말이야.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움직이지 않고도 운동감을 느끼게 될 테지. 그리고 행복해지는 거야. 그렇게 주입된 '사실'들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을 얽어매려고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들을 주면 안 돼. 그런 것들은 우울한 생각만 낳을 뿐이야."
그리하여 몬태그가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고 선언할 때 그의 아내 밀드레드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꾸한다.
"난 행복해요. 그리고 그 사실이 자랑스러워요."
결국 몬태그는 깨닫는다. 태양은 날마다 타오르고, 그러면서 시간을 태우고, 세월을 태우고, 사람들을 태운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방화수들과 함께 사물을 태우고 태양이 시간을 태운다면 모든 게 타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는 방화범들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려는 열망을 품는다. 개인적 각성은 그와 같은 책 사람들(book people)의 느슨한 공동체의 가능성을 확인시킨다. 오랫동안 버나드 쇼, 피란델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지 못한 배우들, 단 한 줄도 자기 손으로 기록해보지 못한 사학자, 문학 교수, 실직한 인쇄업자, 혹은 자살하다시피 책 더미와 함께 불타죽는 쪽을 선택한 여인 같은 애서가들도 가능할 것이다.
"기억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읽고 기억하고, 불타 죽더라도 남아있는 뼈의 잔해가 입을 열어 기억을 노래하게 되기까지.
"하지만 잊어버렸습니다!" "아니오.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을 거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그 유명한 구절이 다시 한 번 되풀이된다. 원고는 불타지 않았습니다. 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은 책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찬가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 <화씨 451>(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
책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 책을 펼쳤을 때 그저 백지밖에, 진공밖에 읽어내지 못하게 됐을 때 미련없이 방화수가 되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책을 증오하기 때문에 태워버리게 되었지만, 어쩌면 그 증오는 사랑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가닿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동경이 결국은 이상한 파괴 욕으로 이어질 때의 에너지. 그리하여 책과 지식과 이야기에 목마른 자의 비극을 통해 책이 불타는 온도인 '화씨 451'에 스스로를 맡겨버리는 에너지, 역설적으로 책을 더없이 갈망했던 에너지.
"유색인들은 <꼬마 검둥이 삼보>를 싫어하지. 태워 버려. 백인들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싫어하고. 그것도 태워버려. 누군가가 담배와 폐암과의 관련에 대한 책을 썼다면? 담배 장사꾼들 분통이 터지겠지? 그럼 태워 버려. 안정과 평화. 몬태그, 자네의 골칫거리들은 죄다 소각로 속에 집어넣는 게 나을걸. (…) 잊어버리라고. 모든 추억을 태워버리고, 모든 걸 태워 버리는 거야. 불은 현명하고 깨끗하지."
<화씨 451>은 다소 느슨하달 만큼 선명한 은유와 대구로 이뤄져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과 불이다. 방화수 몬태그가 추적을 피해 도망치는 길에 강물에서 엄청난 해방감을 맛보는 장면(성경에서의 침례를 연상시키고). 책을 파괴하는 방화수의 불이 도시를 파괴하는 핵폭탄의 불길이 되고, 결국 책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일으키는 불꽃으로, 또한 황야에서 홀로 타오르며 그 빛을 알아볼 대상을 기다리는 불길로, 방언을 토해내듯 머릿속의 것을 모두 끌어내려는 (역시나 성경의) '불의 혀'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장면.
혹은 도시(로 대표되는 폐쇄된 곳)와 시골(로 대표되는 확장된 곳)의 비유도 있다. 귀마개 라디오에 심취한 채 수면제 한통을 다 비운 아내 밀드레드가 관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새 혈액과 혈장을 주입받은 다음 살아나는 장면을 보라. 그녀의 양 볼이 다시 분홍색을 되찾고 입술도 도로 부드러워지는 과정의 묘사는 영락없는 뱀파이어의 형상이다. 불빛을 두려워하고 타인에게 기생하여 존재하는 삶. 그러나 클라리세를 처음 보았을 때 몬태그의 인상은 이러했다. 은은하지만 한결같은 빛,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양초 불빛 같은 존재. 클라리세는 텔레비전 속의 자연이 아니라 실제로 흙 위를 걷는 걸 사랑한다. 그녀는 스스로 빛을 발하며 그 빛을 타인에게 전염시킴으로써 바깥 세계로 이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연상케 하는, 그런 음악적이고 시적인 심상으로.
"클라리세 가족들의 소리. 몬태그는 듣고 있다. 말하는 소리, 말하는 소리, 말하는 소리, 이야기를 잇는 소리, 이야기를 엮는 소리, 다시 엮는 소리, 다시 잇는 소리, 그들이 최면 같은 거미줄을 엮는 소리를."
그러니까 파버의 말이 옳다. 결국 책의 물성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책은 어떤 포장에 불과할 뿐, 책 속에 담겨있는 정수가 표현될 수 있는 형태는 다양하다. 책의 정수는 인간의 온전한 기억으로, 혹은 거미줄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의 형태로 생생하게 숨쉰다. <화씨 451>은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중 굳이 따진다면 문자 문화에 대한 애착을 더 강렬하게 묘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이야기'임을 언명한다. 책의 형태를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말을 걸고, 그 책을 읽은 사람이 또다른 이에게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그리하여 책에 담긴 무언가를, 그 경계선을 뛰어넘는 작용 말이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2012년 6월 5일 9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만일 그를 위한 천국이 있다면, '민들레 와인'을 한잔 홀짝거리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작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도서관의 모습이길 바란다. 그리고 그 수많은 책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비슷한 책벌레가 사서로 일하는 곳이길 바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