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점에서 장 마리니의 <뱀파이어의 매혹>(김희진 옮김, 문학동네 펴냄)은 '뱀파이어 학자'라는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스탕달 대학 '환상문학연구회'의 설립자이자 '드라큘라 트란실바니아 학회' 멤버인 저자의 명성답게 흡혈귀의 역사와 변천사를 집대성한 간결한 백과사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뱀파이어의 매혹>은 50개의 질문으로 이루어져있다. '17세기 이전에도 피를 빠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가?', '왜 동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뱀파이어에 대한 믿음이 더 강했는가?'처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몇 세기 이전의 자료들부터, '왜 <드라큘라>가 문학 속 뱀파이어의 역사에서 전환점인가?', '영화는 뱀파이어라는 인물을 어떻게 다루는가?' 등 문학과 영화라는 드라큘라의 가장 충실한 보급자에 대한 역사를 차분히 더듬어간다. 게다가 'SF와 판타지에도 뱀파이어가 등장하는가?', 심지어 '롤플레잉 게임은 뱀파이어에 대한 현대의 신화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등 젊은 독자들이 손쉽게 펼쳐볼 만한 현대적 담론에까지 손을 뻗친다. (참고로 장 마리니는 73세다.)
▲ <뱀파이어의 매혹>(장 마리니 지음, 김희진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아스텍 인들이 희생자 10명가량의 피를 바치는 제의를 바쳤던 신 시페 토펙, 가장 강건한 전사들을 골라 습격하여 피를 빨아먹는 고대 페루의 신 칸추 혹은 푸마프미쿠크 등이 가장 먼저 꼽힌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도 청년을 덮쳐 피를 빠는 정령 라미아와 엠푸사, 새의 몸을 한 여자 흡혈귀 스트리게가 등장한다.
심지어 페르시아에서 발견된 선사 시대 사발에조차 인간이 정체모를 피조물에 붙잡혀 피를 빨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인간이라면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상대방의 피를 흩뿌리겠지만, 그런 도구 없이도 희생자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며 순식간에 압박해 들어오는 존재, 즉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와 환상이 초자연적인 대체물인 흡혈귀를 만들어낸 것이다.
무덤 혹은 관에서 기어 나와 산 자를 사냥하는 흡혈귀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구체화된 것은 11세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1031년에 기록된 콜랭 드 플랑시의 <지옥 사전>에는 죽은 뒤 무덤에서 나와 일가친척을 괴롭히던 기사가 등장했다. 흡혈귀에 대한 두려움이 절정에 달한 건 17세기에 이르러서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며 사람과 가축 모두를 힘없이 쓰러지게 만들었던 공포의 시대와 맞물리면서부터다.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병의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시기, 사람들은 현실적인 병명 대신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억지로 죽음을 납득해야 했던 것이다. 더불어 온갖 수상쩍은 결함을 지니고 태어난 이는 아예 처음부터 흡혈귀의 성향을 짊어지고 태어났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붉은 반점, 손발톱 위의 검은 점, 태어날 때부터 이가 나 있거나 양막(羊膜) 조각을 뒤집어쓰고 나온 아이, 사산아에겐 모두 그런 낙인이 찍혔다.
피를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 악마가 아닌 '살아있는 시체', 흡혈 행위의 전염성이라는 뱀파이어의 3대 조건이 구체화된 건 18세기부터다. 산구이수가, 나흐체러, 블루트사우거, 도페사우거, 그로믈리크, 람피르, 블코들라코, 스트리고이, 바피르 등 각 나라의 언어에 따라 다양했던 흡혈귀의 명칭이 '뱀파이어'로 통일되기 시작한 것도 18세기부터다.
1725년 빈의 신문 <다스 바이너리슈 디아리움>에 실린 '반피르(vanpir)'라는 단어가 처음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후 vampir, vampyr, wampyr, vampire 등으로 표기되며 결국 '뱀파이어'가 라틴어 권 계열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흡혈귀의 의미는 17세기의 병자와 수상쩍은 범죄자들에서 좀 더 확장되어 온갖 폭군과 정치인, 투기꾼, 박쥐, 시간(屍姦)에 이끌리는 자들에게까지 통용되기 시작했다.
뱀파이어가 그 모습을 확실히 드러낸 18세기는 또한 계몽주의의 시대기도 하다. 이성의 힘으로 온갖 미신을 정복하려던 시대에 뱀파이어의 전설이 공고해졌다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건의 발단은 1731년 세르비아의 메드베기아 마을에서 뱀파이어가 출몰했다는 소문에서부터다.
급기야 군의관이 파견되어 증언을 수집한 뒤, 5년 전에 죽었던 농부가 뱀파이어로 지목됐다. 그리고 그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시체 열 구를 발굴하여 목을 잘라 태워버리는 사건이 터지면서 유럽 전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의 파장으로 계몽주의의 손길이 가닿지 못한 서민뿐 아니라 성직 사회와 귀족까지 의혹에 사로잡혔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루이 15세는 리슐리외 공작을 빈에 파견하여 좀 더 자세한 소식을 알아오도록 종용했고, 성직자 중에도 뱀파이어가 악령의 현현이라 믿는 이들이 속속들이 생겨났다. "신성한 영혼은 과학적이 되고, 과학 실험을 통해 육체는 성스러움을 잃은 소멸 가능한 존재"임이 밝혀지고 나자마자, 뱀파이어가 그런 과학에 대한 반박의 논거이자 은밀한 정신적 피난처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장 마리니는 이렇게 지적한다.
"뱀파이어에 관한 논란에서 계몽주의 시대가 보인 커다란 패러독스는, 이성의 이름으로 그 존재를 반박하느라 오히려 서유럽에 뱀파이어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뱀파이어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계기는 문학을 통해서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오센펠더의 시 <뱀파이어>(1748년), 그리고 시인 바이런의 비서이자 전속 의사였던 존 윌리엄 폴리도리의 단편 소설 <뱀파이어>(1819년) 이후 뱀파이어를 등장시킨 작품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년)가 이전까지 유럽 전역에서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뱀파이어의 전설을 집대성하며 동시에 새로운 이미지를 탄생시킨 경전으로 손꼽힌다. 이제 뱀파이어는 무덤에서 자기 수의를 씹어 먹거나 한밤중에 타인의 목숨을 몰래 빼앗는 등 전설 속의 더럽고 야비한 이미지에서 탈피한, 동시에 늑대인간이나 좀비와는 차원이 다른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즉, 고귀한 혈통의 우아한 유혹자, 변신의 능력과 타인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영향력의 소유자, 두렵지만 어쩐지 연민과 동경이 뒤섞인 감정을 품게 되는 복잡 미묘한 악당.
20세기로 넘어간 뒤 뱀파이어는 미국 대륙에서 '진정한 민주화'를 경험한다. 양차 대전 사이 미국의 각종 펄프 잡지 <위어드 테일스>, <어메이징 스토리스>, <언노운> 등에 소개된 다양한 뱀파이어 단편 소설들을 통해, 뱀파이어는 점점 귀족뿐 아니라 노동자, 영화배우, 뮤지션, 매춘부, 대학 교수, 의사, 성직자로까지 다양한 직업군으로 퍼져간다.
뱀파이어가 "우리 가운데에 있으며 전혀 그들의 존재를 간파해낼 도리가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인간 사회의 일부로 통합되어 있으며, 우리와 더욱 가깝고 더욱 두려운 존재"로 굳어진다. 그러면서 뱀파이어의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은 이제 신화와 전설의 먼지 나는 창고를 뒤적거리기보다 인류의 피비린내 물씬한 역사 사이에서 이뤄진다.
결과적으로 뱀파이어는 왜 악한 존재인가라기보다, 인간은 왜 악한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십자군 원정, 남북 전쟁 시대, 네로 시대의 로마, 종교재판 시대의 스페인, 신대륙 정복 시절, 혁명기의 파리,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 히틀러 치하의 나치 시대, 레닌과 스탈린과 차우셰스쿠가 등장하는 공산주의 체제 등이 뱀파이어 작가들이 매우 애호하는 소재이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발표된 1897년과 영화가 탄생한 1895년이 동시대적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카메라와 필름이 가지는 환상성이라는 속성과 뱀파이어 판타지의 흥미로운 연관성에 대해서는 장 루이 뢰트라의 <영화의 환상성>(김경온 옮김, 동문선 펴냄)을 참고하라.)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문학뿐 아니라 영화 덕분에 뱀파이어의 인기에는 가속이 붙었다. 뱀파이어를 주인공으로 한 시대별 대표작, 즉 1922년 빌헬름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감독의 <노스페라투, 공포의 교향곡>의 주인공 막스 슈레크, 1931년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드라큘라>의 주인공 벨라 루고시, 1958년 테렌스 피셔 감독의 <드라큘라의 공포>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 1992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드라큐라>의 주인공 게리 올드먼에 이르면서 끔찍하고 음산했던 뱀파이어의 이미지는 점차 우아하고 에로틱하기까지 한 존재로, 여인들이 기꺼이 그 앞에서 굴복하는 유혹자로 거듭 바뀌었다. 그리고 스테프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동명 영화, 샬레인 해리스의 <어두워지면 일어나라>와 드라마 <트루 블러드>에 이르면 뱀파이어는 심지어 인간의 좋은 친구이자 연인, 반려자로까지 등극한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뱀파이어는 그 모습을 가시적으로 드러낸 18세기부터 시작해 각 시대가 부응하는 요구에 따라 수없이 변신해 왔다(드라큘라 백작의 가장 큰 능력은 변신술이었다는 걸 상기하자). 페스트라는 무시무시한 질병을 퍼뜨리며 아무 의미 없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불가해하고 끔찍한 존재, 서유럽 강대국들에 불쑥 침입한 야만인 혹은 외국인, 대공황 시대의 경기 침체와 만성적 실업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인) 외국인, 팍스 아메리카나를 위협하는 두 가지 '악의 축' 나치즘과 볼셰비즘, 그리고 사회적 속박과 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매혹적인 아웃사이더,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경계인과 소수자, "악마라기보다 죽음의 천사", 궁극적으로는 "영원히 젊고 불멸이며 복잡한 세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일종의 초인"으로까지 그 이미지는 다채로운 시대정신을 따라잡는다.
결국 판타지의 대상이 영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 판타지의 범위 안에만 머무르느냐 아니면 다양하고 유연하게 적응 가능성이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뱀파이어가 인류의 역사와 동행하다시피 한 것은 앞서도 말했다시피 생사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되, 무덤에서 혹은 지옥에서 갓 튀어나온 흉측한 괴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이었던 시절의 강렬한 감정을 기억하고 있는 '살아있는 시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이야기를 하면서 괴물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에 뱀파이어는 그토록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하여 뱀파이어의 역사는 인간들이 그에 매혹된 역사가 되어가며, 궁극적으로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상반된 감정, 두려움과 이끌림을 기술하는 흥미진진한 정신사가 되어간다.
<뱀파이어의 매혹>은 뱀파이어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말해두자면 결코 재미가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레퍼런스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쪽이 이 책의 독법에 좀 더 맞는 것 같다. 특정 시기의 뱀파이어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을 보려면 개별적인 책들을 더 찾아 읽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학적 독법에 관심 있는 이라면 로렌스 릭켈스의 <뱀파이어 강의>(정탄 옮김, 루비박스 펴냄)도 아울러 참고할 만하다.
장 마리니가 선정한 '이견의 여지가 없는 걸작 베스트 3'인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홍연미 옮김, 열림원 펴냄),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펴냄),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김혜림 옮김, 황매 펴냄)도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각각의 분위기는 천차만별인데, 특히 요즘처럼 습하고 더운 날에는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의 축축한 분위기에 젖어드는 미남미녀 뱀파이어가 떼로 등장하는 뱀파이어 소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손쉬운 선택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중반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짜릿한 흥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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