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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암살당한 만화가! 누가, 왜 그를 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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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암살당한 만화가! 누가, 왜 그를 쐈는가?

[팔레스타인의 예술가] 나지 알 알리를 기억하라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원고지 위에 무언가 휘갈겨 적고 있다. 옆에 서 있던 꼬마 한잘라가 재잘거린다.

"민주주의에 관한 아저씨의 글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내일자 신문에는 뭘 쓸 건가요?"
"내 유언장."

팔레스타인의 위대한 카투니스트 나지 알 알리가 그린 시사 만평 중 하나다. 저 내용은 과장이 아니었다. 30여 년 동안 아랍 세계의 비극과 갈등에서 눈 돌리지 않고 냉철하게 분노하는 카툰을 그리던 나지 알 알리는 1987년 7월 22일, 런던의 번화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이듬해 팔레스타인인의 인티파다(반 이스라엘 투쟁)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예술과 정치 사이에는 긴장된 길항 관계가 흐른다. 나지 알 알리의 시사 만화를 한 장씩 들춰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 점을 실감하게 된다. 부조리하고 부당한 정치 상황에 대해 예술이 항거했고, 그 예술을 본 이들은 저항의 동력을 얻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 예술의 싹을 잘라버리고자 했다.

지난 6월 1일부터 3일까지 춘천에선 전국시사만화협회와 강원도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3회 국제시사만화포럼이 열렸다. '다시 시사 만화를 생각한다 : 권력, 자본 그리고 독자'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에는 바로 그 나지 알 알리의 아들 칼리드 알 알 리가 참가하여 나지 알 알리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말했다.

<프레시안>에선 그동안 나지 알 알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던 손문상 화백과 칼리드 알 알리의 만남을 따로 마련하여 나지 알 알리의 삶과 그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에서 출간 준비 중인 나지 알 알리의 작품집에 대해 들어보았다. 손 화백은 이 작품집을 직접 기획했다. 통역은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최석호 교수가 맡았다.

▲ 나지 알 알리의 아들 칼리드 알 알리(왼쪽)와 손문상 화백(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팔레스타인 발 저항만화의 탄생

나지 알 알리는 1937년 알 샤자라 마을에서 태어났다. 갈릴리의 티베리아스와 나사렛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강제 점령하여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한 이후 70여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나지 알 알리 역시 가족들과 함께 레바논 남부의 난민 캠프 아인 알 헬와로 이주했다.

열 살을 갓 넘긴 소년은 고단한 캠프 생활을 통해 부모님과 이웃들의 절망과 슬픔과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했고,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벽에 카툰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카툰의 매력은 "짧고 강력하며 문맹자들에게도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라는 점이었다.

1961년 팔레스타인 시인이자 저널리스트, 아랍 민족주의 계열 잡지 <알 후리야>의 발행인 가산 카나파니가 헬와 캠프에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우연히 나지 알 알리의 카툰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후 나지 알 알리의 카툰 몇 편이 <알 후리야>에 실리면서 시사만화가로서의 입지를 조금씩 다지기 시작했다.

1963년 쿠웨이트로 건너간 나지 알 알리는 <알 탈리아>에서 정기적으로 카툰을 그리기 시작했고 1968년에는 또 다른 신문 <알 시야사>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 시기에 나지 알 알리의 유명한 캐릭터 '한잘라(Handala)'가 탄생했다. 한잘라는 나지 알 알리가 독자들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하는 약속을 의미하는 존재였다.

ⓒ칼리드 알 알리

한잘라는 그림 한 구석에 서서 뒷짐을 진 뒷모습으로 등장했다. 한잘라의 머리카락은 한 번도 빗질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듯 삐죽삐죽 솟아났고, 누더기 옷에 맨발 차림이다. 그 뒷모습만 봐서는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있는지 알 수 없다. 나지 알 알리는 한잘라가 그 자신의 신념이 변하지 않도록 언제나 지켜보는 존재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나지 알 알리의 양심 자체이자 그것을 지켜보는 독자의 시선을 이중으로 체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내가 나태해지거나 의무에 소홀해질 때마다 내 영혼을 지켜주는 존재다. 이마에 와 닿는 차가운 물보라이자, 내게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실수로부터 지켜주는 존재다. 또한 꾸준히 팔레스타인을 가리키는 컴퍼스 같은 존재다. 지정학적 의미에서의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팔레스타인 말이다. 이집트, 베트남, 남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의를 상징할 수 있는 존재다."

칼리드 알 알리 역시 "한잘라는 아버지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되었던 1948년, 열 살의 그 나이에서 자라지 않는 아이"라고 설명했다.

"한잘라는 가난하고 못생겼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광경을 지켜본다. 단지 아랍 세계만이 아니라 세상 전역에서 일어나는 불행을 목격한다. 그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그는 순진하다. 어린 아이는 어떤 거리낌도 없이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발언할 수 있다. 한잘라는 바로 그렇게, 뒷일을 고려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그대로 말해버리는 존재다. 그는 두려움 없이 정의를 말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나지 알 알리의 카툰에 자주 등장하는 형상들이 있다. 꽃, 가시 철망, 십자가에 못 박히는 행위, 돌팔매질.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열쇠와 보리처럼 보이는 풀이다. 칼리드 알 알리는 풀에는 보편적인 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인간이 모든 식물을 다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며 인간에게 해가 되는 식물도 많지만, 대부분의 식물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풀이 있어야 미래가 가능하다. 풀은 생산적이고 좋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 우린 주렁주렁 달린 열매를 먹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풀은 미래를 위한 투자이자 좋은 징조라고 할 수 있다."

ⓒ칼리드 알 알리

열쇠의 경우, 팔레스타인인의 가슴 아픈 기억이 스며들어간 더 개인적인 형상이다. 1948년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70만 명의 사람들은 집 문 열쇠를 주머니에 넣은 채 고향을 떠났다. 그들은 당연히 곧 돌아오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나지 알 알리의 어머니도 열쇠를 목걸이에 걸어둔 채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며칠 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숨을 거둘 때까지 그 열쇠를 목걸이에서 떼어내지 못했다. 나지 알 알리의 카툰 속 열쇠는 바로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팔레스타인인의 열망이 담긴 가슴 아픈 대용물이다.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등에서 집을 구했지만, 팔레스타인인은 언제나 피난민일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오직 민중의 입장을 대변할 뿐

1970년대 중반 레바논의 유명 신문 <알 사피르>의 편집장 탈랄 살만이 나지 알 알리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1966년 결혼하여 이미 다섯 아이를 둔 나지 알 알리는 가족들과 함께 1974년 레바논으로 돌아왔다. 그는 <알 사피르>와 더불어 아랍에미리트의 신문 <알 칼리즈>에도 카툰을 그렸다.

나지 알 알리는 이 시기를 최고로 생산적인 시절로 꼽은 바 있다. 그 생산성을 이끌어낸 요인은 역설적으로 나지 알 알리가 참담한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느낀 분노와 좌절감이었다.

"알 헬와 캠프는 예전에 더 혁명적이었다. 그때는 적과 친구를 구분할 수 있었고, 팔레스타인 땅의 완벽한 반환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오랜만에 돌아왔을 때, 캠프에는 무장한 이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명확성은 부족했다. 다양한 부족 간에 분열이 생겼고, 아랍의 오일 달러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1976년, 이슬람 게릴라들과 레바논의 크리스천 세력 간의 국지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사태 수습을 핑계 삼아 시리아 군대가 레바논을 침공했다. 그리고 1982년, 이스라엘 군과 레바논 기독교 계열 우익 민병대의 합작으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머물던 사브라와 샤틸라 캠프에서 끔찍한 대량 학살이 벌어진다. 성인 남성과 여성, 아이들을 포함하여 2800여 명이 총과 칼과 도끼로 길거리에서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다.

그러나 이때 전 세계 사람들의 대다수는 스페인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열중했다. 사브라·샤틸라 학살은 이스라엘의 권력 하에 철저하게 축소되었다. (이때의 상황은 이스라엘 감독 아리 폴만의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2008년)에서 매우 적나라하게, 그리고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그을린 사랑>(2010년)에선 다소 모호하게 드러난다)

이 광경을 정면에서 목격하게 된 나지 알 알리는 치를 떨었다. 그는 충격을 금치 못했고, 드디어 카툰 속 한잘라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전까지 늘 뒷짐 진 채 구경하던 한잘라는 드디어 독자들을 향해 얼굴을 보이고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분노를 표하고 깃발을 흔들고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지 알 알리는 하루 종일, 사적인 일상 같은 건 누릴 여유 없이 매일매일 시사 만평에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잔혹한 현실을 형상화했다. 레바논에서도 그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홀로 다른 곳에 숨어 그림을 그렸고, 가족들은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치며 나지의 그림이 실렸는지, 나지의 생존 여부를 그렇게 확인했다고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칼리드 알 알리는 당시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대부분의 시간 아버지는 베이루트에, 우리 가족은 레바논 남부에 머물렀다. 그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우리와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있었다. 물리적으로도 떨어져 있었고, 함께 있더라도 그는 항상 너무 바빴기 때문에 가깝게 느낄 순 없었다."

당시 나지 알 알리의 카툰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은 이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숨통을 죄어오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것만큼이나 당시의 아랍 지도자들,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PFLP(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의 부패한 지도층, 민족 간의 문화적 배타성, 혹은 극우 기독교 정당 등을 소리 높여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른바 '대의'를 위해 '차악'을 선택하거나 '작은 부분은 희생될 수 있다'는 관점, 이른바 정파성에 대한 편들기 같은 부분은 현재 한국 정치에서도 굉장히 예민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1980년대, 말 그대로 '전쟁 한복판'에서 나지 알 알리는 그것을 해냈다. 독자들은 환호했고 정치인들은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고 비판적 시선을 고르게 견지한다는 예민한 지점에서, 나지 알 알리의 확고한 입장이 가장 중요한 축을 점하지 않을까. 칼리드 알 알리는 이에 대해 나지 알 알리가 "반 유대인을 외치는 게 아니라 반 시오니즘을 외쳤다고 하는 게 맞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조국 팔레스타인의 땅을 앗아갔고, 이후 60여 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온갖 종류의 무기를 끌어와 그 땅에 폭격을 퍼붓는 시오니즘 말이다."

그러나 아라파트를 비롯한 아랍 지도자들은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어있는 채 단호한 입장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때로는 민중들에게는 절대로 오지 않을 어떤 이득을 슬그머니 취하며 자신들만의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게 나지 알 알리의 해석이었다. 그는 'White House'라는 글자에서 W를 엉덩이와 겹쳐 그리면서, 아랍 지도자들이 미국의 간섭으로 꼼짝 못하는 상황을 냉소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또 아라파트가 열광하는 대중 앞에서, 그리고 쇄도하는 이스라엘의 습격 앞에서도 유명한 승리의 V자를 그려보이던 손가락을 묘사할 때, 그 두 개의 손가락이 잘 보면 '승리'가 아닌 '패배와 굴복'을 뜻하는 카툰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랍 세계를 넘어 미국과 유럽에까지 그 이름을 떨치고 있던 나지 알 알리는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돈과 권력을 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를 자신의 편에 끌어들이려는 각종 지도자들의 입맛에 맞게 적당히 순화된 카툰을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런 유혹을 거절했다. 칼리드 알 알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잘라는 바로 그런 심정으로 그린 캐릭터다. 내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겠다, 내 대의를 배반하지 않겠다, 옳고 정당한 것만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싸우겠다는 뜻이다."

이 순간 칼리드 알 알리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아버지가 타협했다면 살해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생존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믿는 바를 선택하고 오로지 그 결정에만 확고하게 머물렀다. 민중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믿음 때문에 그는 희생되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나지 알 알리의 카툰을 본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격노하여 "나지 알 알리가 대체 누구야? 이따위 카툰 그리는 걸 당장 멈추지 않으면 손가락을 산성 용액에 담가준다고 전해!"라고 소리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칼리드 알 알리는 아버지가 개인적으로 아라파트를 싫어한 게 아니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아라파트는 서구화된 사람이었고,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그 점에 반대했다. 아라파트는 외교관이자 정치가였고, 아버지는 자신이 믿는 바를 그림에 표현하는 예술가였다. 둘은 너무 달랐다. 두 사람은 쿠웨이트와 레바논에서 두세 번 정도 만났지만, 분위기는 대단히 냉담했다."

칼리드 알 알리는 아버지가 쿠웨이트에서 추방당한 결정적인 이유가 아라파트와의 불화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18개월 후 런던에서 암살당했다."

한국에서도 작품집 출간 예정

나지 알 알리가 암살당한 이듬해부터 팔레스타인인들은 본격적인 인티파다(반 이스라엘 투쟁)를 시작했다. 나지 알 알리의 죽음이 그 봉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순 없을까. 칼리드 알 알리는 '단 하나의 원인'은 아니겠으나 분명 어떤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긍정하면서, 나지 알 알리가 죽기 6년 전인 1981년경부터 인티파다를 예견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음을 지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군대를 향해 돌을 던지는 그림, 손이 없기 때문에 돌을 들 수 없는 사람의 그림, 혹은 슈퍼맨처럼 옷을 찢어버리며 투쟁가로 변신하는 여성의 그림. 특히 마지막 그림의 제목이 바로 '인티파다'였다."

1985년 런던으로 이주한 뒤 나지 알 알리는 <알 카바스>의 런던 지국에서 작업을 계속했고 그 과정에서 숱하게 살해 협박 전화를 받았다. 그중 결정적인 것은 암살 2주 전에 걸려온 전화였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아라파트를 공격하는 만화를 그린 다음 걸려온 그 전화에서는 "당신 태도를 좀 고쳐야겠는데"라고 위협하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지 알 알리는 크게 개의치 않고 여전히 PLO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을 소리 높여 외치는 카툰을 계속 그렸다. 그리고 7월 22일, 출근길에 머리에 총을 맞고 5주 동안 코마 상태에 빠져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 암살자의 신원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칼리드 알 알리는 "아랍이 그랬는지, 이스라엘이 그랬는지 여전히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기소나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가족들로서는 아라파트와 그의 추종 세력과의 대립, 쿠웨이트 정부와의 대립과 추방이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라면서, "아버지의 무덤은 런던에 있다"고 했다.

팔레스타인 난민으로서 나지 알 알리는 죽어서도 그토록 그리워하던 땅에 가지 못하고 있다. 대신 나지 알 알리의 카툰은 작가의 암살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저항의 상징으로 활발히 인용되고 있다. 나지 알 알리는 생전에 "내가 죽어도 한잘라는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빙 둘러 세운 분리 장벽에는 언제나처럼 뒷짐을 진 한잘라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많은 이들에게 '우리 모두가 한잘라'임을 상기시키는, 우리의 입을 침묵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며 발화하겠다는 의지를 상징하는 단 하나의 카툰인 것이다.

한국에서 팔레스타인을 다룬 만화를 찾아보고 싶다면 '코믹 저널리즘'의 선구자로 칭송받는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이 출간되어 있다. (조 사코는 해외에서 출간된 <팔레스타인의 아이 : 나지 알 알리의 카툰>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제 또 다른 출판사에서 준비 중인 나지 알 알리의 작품집까지 출간된다면, 한국의 독자 역시 5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혀 빛이 바래거나 힘이 빠지지 않은 그의 뛰어난 카툰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눈뜨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의 질문이 짜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칼리드 알 알리에게 "출간 준비 중인 이 카툰집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길 기대하는가"라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을 때, 솔직히 "독자 각자의 자유"라는 뻔한 정답만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칼리드 알 알리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선 나의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점이다. 평범하게 숨을 거둔 게 아니라, 강제적으로 그의 삶이 끝장났다. 두 번째로는 팔레스타인에 관련된 사실이 세상 전체에 가 닿는 것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작품을 통해 팔레스타인인이 세상의 일부로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주장이 전파되고, 우리의 문화와 지성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팔레스타인에도 사상가, 예술가, 교수 같은 이들이 있다. 언제나 폭파되고 투옥되는 '특정한 어떤 존재'로만 취급받는 게 아니라,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캐릭터 한잘라가 평등과 저항에 관한 세계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길 바란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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