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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체 처리! 멘탈 붕괴의 현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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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체 처리! 멘탈 붕괴의 현장은?

[김용언의 '잠 도둑'] 제임스 모로의 <하느님 끌기>

<하느님 끌기>(김보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라는 제목이 어떤 은유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틀렸다.

이건 말 그대로 하느님의 사체를 끌고 가는 이야기다. 잠깐, 나는 여기서 '사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육체를 가진, 거대한 인간의 형상 그대로인 하느님의 사체 말이다. 제임스 모로의 판타지 <하느님 끌기>는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전통에 가장 가깝고 그것을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서구권에서만 나오는 게 가능할 법한 그런 이야기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자정이 넘은 시각. 아무도 없는 박물관을 헤매며 자신만의 고뇌에 사로잡혀 있을 때 순백색 날개를 날고 퍼덕거리며 날아온 누군가가 엉엉 울면서 "우리의 창조주가 돌아가셨소. 돌아가시면서 바다로 떨어져 버리셨소"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떤 심정이 들까?

그런 일이 앤서니 반호른에게 일어난다. 초대형 유조선 카르푸코 발파라이소 호의 선장이었고, 끔찍한 기름 유출 사고를 일으킨 다음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던 그에게 대천사장 라파엘이 불쑥 나타나 하느님의 죽음을 알린다.

"하지만 하느님이 어떻게 돌아가실 수 있습니까? 하느님에게는 육체도 없을 텐데요."
"왜 하느님에게 육체가 없다고 생각하오?"
"하느님은, 무형의 존재 아닌가요?"
"육체는 본래 무형인 법이오. 물리학자라면 모두 그렇게 말할 거요."

라파엘은 앤서니에게 하느님의 시신을 예인하여, 북극 스발바르 제도의 크비토야 북쪽 해안에는 영구히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빙산 속에 얼음 굴에 잘 매장시키는 임무를 떠맡긴다.

"굉장히 크겠죠?"
"머리에서 발끝까지 3200미터요."
"얼굴은 하늘을 보고 계신가요?"
"그렇소. 정말 이상하게도 환하게 미소를 짓고 계시지. 사후 경직 때문이거나, 아니면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표정을 짓기로 결심을 하신 모양이오."

앤서니는 기름 유출 사고의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카르푸코 발파라이소 호를 타고, 바티칸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예수회 신부 토머스의 지휘를 받으며 험난한 여행길에 나선다. 이 고행에 찰스 다윈의 발자취를 되밟아가는 크루즈 여행을 나섰다가 태풍 때문에 조난당한 생물학자 무신론자 캐시 파울러가 끼어든다.

카르푸코 발파라이소 호의 선원들은 천사가 지정한 자리에서 하느님의 사체를 발견하고, 그 거룩한 몸 여기저기에 닻을 건 다음 예인을 시작한다. 상상을 초월하게 무거운 하느님의 사체를 끌고 북극으로 향하는 카르푸코 발파라이소 호에 캐시 파울러의 제보를 받은 무신론자들의 모임 '센트럴파크 서부 계몽 연맹', 그리고 그 연맹이 고용한 제2차 세계 대전 재연 협회가 하느님을 없애려 덤비면서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물은 '하느님의 죽음' 앞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이들의 난동이다.

"하느님의 주검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겁니다. 주검 그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죽음'이라는 바로 그 생각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적이요, 이 무질서의 원천입니다. 옛날에는 신을 믿든, 안 믿든, 중도적인 불가지론자든, 지각이 있든 없든, 누구나 하느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그 생각이 우리의 행동을 규제했던 거죠. 하지만 이제,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새로운 시대라고요?"
"기원후에 뒤이은 시대, 즉 포스트 AD 1년이 되겠군요."
나는 우리 배에 역병이 퍼질까 두렵다, 뽀빠이. 우리의 화물은 우리 안에서 세균처럼 퍼지고 증식하면서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더 이상 누가 누구를 끌고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 <하느님 끌기>(제임스 모로 지음, 김보경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천사가 직접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하느님의 사체, "(하느님의) 심전도 결과가 넙치만큼이나 평평하게 나왔소"라는 말 앞에 그야말로 정신이 붕괴되지 않을 자가 누구인가. 이런 설정이 신성모독으로 느껴지는가? 하지만 신이 없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사회다. 독실한 신부와 수녀는 하느님의 사체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너무나도 인간의 그것과 닮은 그 사체를 일일이 들여다보면서 지금껏 육체가 아닌 하나의 거대한 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룩한 무언가로 생각했던 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걸 느낀다. 그들은 "어떻게 하느님의 실체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갈 수 있냐고요"라고 한탄한다. 하느님의 죽음을 목도하고 나서야 자신들의 믿음에 '실체'가 있었음을 확인할 때, 누구보다 신실했던 이들은 새로운 믿음의 기반을 다져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실체를 보지 않고도 그분을 믿었다면, 이제 그 사체 앞에서 "하느님이 없는 상태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 번 세워야 하는 것이다.

반면 지금까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별 생각 없던 평범한 선원들은 처음에 하느님의 사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이것이 네스 호의 괴수, 실패한 정부의 생물학 실험물, 고무 덩어리, 공룡, 외계인, 큰 바다뱀, CIA의 음모, 부풀려지는 마네킹, 영화의 소도구, 공산주의 마지막 몸부림, 해저에서 출몰한 로도스의 거상, 미국 유럽 일본의 3자 위원회가 꾸민 유인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불현듯 하느님이 없어도 "하늘이 까맣게 변하지 않고 바다가 마르지 않고 태양은 깜빡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심판도 처벌도 없다는 자각에 이른다. 하느님의 시선이 없어지고 나서야 그들은 뒤늦게 자신들이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재는 오히려 하느님의 존재를 강하게 주장한다.

하느님의 사체를 끌고 가는 도중 기이한 안개에 뒤덮이고 통곡하고 절규하는 온갖 바다생물에 둘러싸이고 인간의 더러운 폐기물과 이교도적 상징으로 뒤덮인 섬에 좌초하는 시련을 겪는 상황은 카오스 이론의 핵심인 '이상한 끌개'와 맞물린다.

"오랜 이교도적인 질서가 특히 이런 끌개로 활성화되었을 겁니다. 하느님의 시신이 바다 위를 지나가자, 이 세계가 자연스럽게 그에 반응하여 다시 한 번 자기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죠."

하나의 질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되는 세력들이 힘을 겨루고, 있음이 없음을, 없음이 있음을 입증하면서 이 세계는 그 옛날부터 아주 거대한 차원에서 엔트로피의 최대치에 이르지 않게끔 스스로를 지탱해왔다.

제임스 모로는 솜씨 좋게 구약 속 분노하는 하느님과 신약 속 사랑의 하느님을 뒤섞으며, 신약과 구약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갈구하던 연약한 인간들의 모습을 현대판으로 되살려낸다. 그들은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부르짖는 욥이자,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통곡하는 요나이자, 하느님으로부터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라고 주어진 벌을 감내하는 모세다.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인간 예수이자,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다가 불현 듯 하느님의 음성과 눈부신 빛에 눈이 멀어버린 사울/바울이다. "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을 받아먹으라"라는 비유를 문자 그대로 실감하게 되는 사도들이며, 감히 자신의 모습을 떳떳이 드러내지 못하고 예수를 훔쳐보다가 구원받는 밉살스런 세리 삭개오다.

이들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절망에 울부짖는 순간을 거치지만, 기실 하느님이 누구보다 아끼던 존재이자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선택한 존재들이다. 하느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시피, 인간에게도 그런 신성은 깃들어 있을 것이다. 이제 하느님이 사라진 상태에서, 인간들은 하느님처럼 사랑과 분노의 극단에서 비틀거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 이 소설에서 신부 토머스의 입을 빌려 되풀이되는 '타고난 윤리 의식',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머리 위에 반짝이는 별, 내 안의 도덕률"을 의식하고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신과 믿음을 다루는 대부분의 소설이 그러하듯, <하느님 끌기> 역시 인간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주인공은 신이 아니다. "사악한 미치광이였을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우리의 창조주"였던 '그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되뇌는, 연약하지만 삶을 지속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한 인간이 중심이다. 역병, 기근, 전쟁, 죽음의 네 기사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묵시록의 예언 앞에서도 서로에 대한 연민과 공감과 자비와 사랑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인간 말이다. 신만큼이나 인간도 위대하다는 믿음이 <하느님 끌기>에서도 여지없이 되풀이된다.

노파심에 덧붙인다면, 여기서 '하느님'은 반드시 기독교상의 하느님만이 아닐 것이다. 제임스 모로는 의도적으로 <하느님 끌기>에서 기독교의 중추에 덧붙여 그리스 신화의 설정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각종 종교의 모습을 뒤섞는다. 미궁 속에서 실타래를 감는 테세우스, 헥토르의 주검을 이끌고 트로이 성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는 아킬레우스, 각각 술주정꾼과 대식가와 아편쟁이와 남색가를 상징하는 화강암 우상들.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 인간의 형상을 본 따 만든 신들. 그렇게 신과 인간은 서로를 닮아간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신화학이라고 해야 할까. 하드코어와 하드고어와 야만과 신성이 난무하지만, 건조한 유머와 예기치 않은 눈물이 곳곳에서 출몰하는 놀라운 판타지 소설이다.

덧붙임

<하느님 끌기>를 다 읽고 나면 예전엔 별 생각 없이 훑어내려 갔던 출애굽기의 이 구절들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가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애굽기 33장 18절~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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