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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을 선택한 여자, 마지막에 웃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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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을 선택한 여자, 마지막에 웃을까?

[김용언의 '잠 도둑'] 마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

개천에서 용 난다고도 하고,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한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하나?

특히 전쟁이 끝난 직후 거의 모든 면에서 변신을 위해 허둥거리는 혼잡한 사회 속에서라면? 물론, 대다수의 이야기들은 전자를 선택하면서 시작된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가 1964년에 쓴 소설 <짐승의 길>(김소연 옮김, 북스피어 펴냄)도 그러하다. 이 소설의 서문격인 문장을 소개한다.

"짐승 길 : 산양이나 멧돼지 등이 지나다녀서 산중에 생긴 좁은 길을 말한다. 산을 걷는 사람이 길로 착각할 때가 있다."

<짐승의 길>의 등장인물은 거듭 비슷한 충동질을 한다. 그들은 "나도 이렇게 되기까지는 고생이 많았어. 자기도 언제 이렇게 될지 모르지"라는 여운을 남긴다. 인생은 기회라고, "당신이 운전할 차례가 올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요"라고, 대신 평소 준비가 되어있고 마음가짐을 잘 갖추고 있어야만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다미코는 고급 여관 호센가쿠의 종업원이다. 그녀는 남편이 뇌연화증으로 쓰러진 뒤 여관에 숙식하며 돈을 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휴가를 받아 귀가할 때마다 남편은 의처증과 욕정에 불타 다미코를 학대한다. 다미코는 "곰팡이 냄새 같은, 하수구 밑바닥에서 나올 법한 악취뿐"인 집과 남편을 증오한다.

어느 날 여관에서 마주친 이상한 손님 고타키는 다미코에게 일생일대의 제안을 한다. 다미코가 자유로워질 용기만 낸다면, 특별한 인생이 기다린다고 했다. 세상의 눈 때문에 병든 남편을 버리지 못하던 다미코에게 그 말은 하나의 도화선이 된다. 그녀는 남편을 살해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를 '자동차'에 올라탄다. (이 장면에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장녀'라 불리는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순간적으로 떠오른다.)

그녀의 새로운 기회는 정계의 흑막으로 일본 사회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치는 노인 기토 고타다. 정확하게는 젊은 여성을 품음으로써 생명 연장을 간절하게 기원하는 회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막대한 재산과 폭력을 번갈아 사용하며 일본의 "정치적인 검은 분위기 속에 실루엣처럼" 버티고 있는 노인 옆에서 다미코는 점차 탐욕에 눈뜬다. 남편 살해를 빌미삼아 다미코를 정복하려는 부패 형사 히사쓰네, 낡은 수트케이스에 현금 1000만 엔을 아무렇지 않게 구겨 넣고 다니는 수상쩍은 변호사 하타노, 기토 노인의 모든 것을 돌봐주는 냉정한 하녀 요네코도 다미코가 '인간의 길'로 돌아갈 수 없게끔 가로막는 존재들이다.

▲ <짐승의 길>(전2권,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북스피어 펴냄). ⓒ북스피어
어떤 종류의 픽션에서든 매력적인 인물은 독자를 위한 필수적인 비단길이다. 특히 미스터리 장르라고 한다면 범인이든 탐정이든 감정이입할 수 있는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짐승의 길>을 읽으며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은, 등장인물 누구에게도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차단된다는 점이다.

앞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모래 그릇>이라든가 <점과 선>, , <마츠모토 세이초 단편선집>을 읽은 독자라면 의외라고 느낄 것이다. 일단 이 소설 속 탐정 역할을 하는 인물은 두 명이다. 형사 히사쓰네와,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살인을 저지르는 여자 다미코.

형사 히사쓰네는 미스터리 소설에 곧잘 등장하는 익숙한 부패 경찰이다. 전적으로 악당만은 아니고, 형사로서의 자부심과 능력도 겸비했다. 본래 교통순경 출신이지만 강력계 형사를 동경했고, "빈집털이, 좀도둑, 가리지 않고 바지런히 나가서 검거"한 덕분에 꿈을 이루지만 어느 순간 경찰 내의 관료제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간부급은 퇴직 후에 낙하산 인사로 어딘가의 단체 임원이 되고, 과장급은 일등지의 서장으로 전출된 다음 지역 유지와 안면을 잘 익히면서 임기를 무사히 끝내면 민간 회사에 또 취직된다. 그에 비해 고참 형사들은 "뭐, 백화점 경비원이나 회사 경비 정도지"라고 체념하며 늙어간다. 히사쓰네는 어차피 한계가 있는 인생, 즐거움이라도 맛보자는 집념을 품고 그 대상인 다미코에게 집착한다.

다미코의 삶은 고단했다. 그녀는 서른한 살이다. 아직은 젊고 예쁘지만, 영원히 자리보전하며 병자로 늙어갈 남편의 손아귀에서 빠르게 시들어갈 것이다. 고타키의 제안을 받아들여 남편을 살해하기로 결심할 때까지, 다미코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서의 미묘한 위치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다음순간부터 여자는 너무 쉽게 '짐승'이 되어간다. 남자의 힘에 기대지 않고는 쉽게 독립하거나 자립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하층 여성의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역시 뭔가 꾸미고 있군요." "뭐, 남자니까" "이유는 묻지 않을게요. 당신이 내게 무엇을 부탁해도, 어떤 이유인지 묻지 않을 거예요. 시켜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 그대로 하겠어요." 이성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보다 감정에 쉽게 휩쓸리고 애욕의 무대에 스스로를 기꺼이 전시한다.

그녀는 "노인의 이상한 권력과 멍청한 얼굴이 아무래도 합치되지 않는 것처럼, 현재의 그에게서 그의 과거"를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그 꿰뚫어보지 못함이야말로 다미코를 너무 손쉬운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이 소설에서 최후의 승자는 애욕에 지지 않은 남자다. 판의 말 하나에 불과한 것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있었지만, 실상 몇 수 앞까지 내다보며 도사리고 있다가 최후의 순간 일격을 가하고 웃음소리를 남긴 채 사라지는 섬뜩한 엔딩에는 감정이입할 여지가 완벽하게 차단당하고, 장탄식 비슷한 것만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어떤 점에서 이 소설의 제목은 <웃음소리>였더라도 무방했을 것이다.

서구에선 1920년대 말부터 등장한 하드보일드 소설이 사회를 읽어낼 수 있는 효과적인 틀로서 작용했다. 탐정은 부패하고 복잡한 사회 속을 종횡무진하며, 한눈에 통찰할 수 없는 범죄의 배경에 절망하고 이길 가능성이 없는 싸움에 매달렸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일궈낸 사회파 미스터리는 범죄의 동기와 배경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의 계승자이자 독특한 일본식 변형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의 길>도 전후 일본의 막후 정치, 미국과 일본 군대와 정계의 부정한 결탁이라는 비밀스런 연결망이 개인의 삶을 뒤흔든다는 전제를 고수하며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현대에도 불가사의한 현상은 몇 개나 있다. 전쟁 후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다는 일본에서도 보통의 지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 많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본식 변형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건 어떤 지점일까. 하드보일드 소설이 대체로 대도시라는 인상적인 공간을 종횡무진하며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비밀들을 형상화한다면, <짐승의 길>은 좀 다른 선택으로 흥미롭다. <짐승의 길>은 전후 일본의 분위기가 검은 안개처럼 떠도는 막연한 상황을 형상화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으며, 도쿄라는 도시 자체보다는 곳곳에 자리 잡은 철옹성 같은 비밀의 공간들에 집중한다.

즉, 여관 호센가쿠와 뉴 로얄 호텔과 기토의 은밀한 집 말이다. <짐승의 길>의 첫머리, 여관 호센가쿠에서 비밀스럽게 벌어지는 모임이 인상적으로 제시된다. 참석자들은 "작은 동업 조합의 친목회"라고 둘러대지만 험악한 남자들이 회합 장소를 철통처럼 감시한다. "20만, 30만 엔이라는 돈이 아무렇지도 않게 운반되어 온다. 심야에 전화 한 통으로 조달된다. 신문지에 싼 것, 보자기에 싼 것, 1만 엔짜리나 5000엔짜리 지폐 다발이 실로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드는 풍경은 겉보기와 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한다. 다미코는 이 중 한 명이었던 고타키와 관련을 맺게 되고, 그녀가 그다음으로 이동하는 장소는 뉴 로얄 호텔이다.

3년 전 신축된 8층짜리 호텔, 입구에 "외국의 의장병 같은 푸른 옷을 위엄 있게 차려입은 도어맨"이 지키고 있으며 "프런트 앞까지 가려면 유리문 세 개를 지나쳐야 하는데 걷다보니 마법처럼 저절로 열"리는 이곳에서, 다미코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너무 화려해서 눈이 부셔요"라고 속삭이다. 아카사카의 언덕 위에서 도쿄 시내를 내려다보는 이 호텔은 아무나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호텔 안에서는, 바깥에서 보는 바와 다르게 온갖 흉측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30년이 넘도록 기토 고타와 더러운 비밀을 공유한 채 수족처럼 지내온 하타노가 2년째 제 집처럼 묵고 있으며, 고급 콜걸이 고위 장성과 밀회를 나누고, 스타킹에 목 졸려 죽은 시체가 있다. 때로는 이 호텔이 관료의 실종을 은폐하는 가림막이 된다.

누군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지만, 나오는 모습을 본 목격자는 없다. "손님의 모습도 없고 종업원도 돌아다니지 않는다. 비슷비슷한 방이 양쪽으로 이어져 있는데. 폐허처럼 조용해서 으스스했다. 복도는 어디에나 새빨간 융단이 깔렸고 안쪽을 향해 좁아진다. 좌우의 방도 문이 닫혀있고 번호만 한 줄로 이어진다. 마치 원근 도법을 보는 것처럼 먼 곳의 한 점으로 모든 선이 모여 있다."

그 다음 장소는 기토 고타의 집이다. 굴지의 고급 주택가에 자리한 기토의 집을 처음 찾은 다미코는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강한 느낌을 받는다. "집 안에서라면 어디에서나 내다볼 수 있을 터였다.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아도 상대는 갖가지 엄폐물의 그늘에서 그녀를 볼 수 있다." 그녀는 방 안에서도 기토를 찾아오는 인물들이 바쁘게 오가는 소리만 엿듣는다. 그녀가 직접 내다보거나 대화를 경청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종합고속노면공단, 경찰서, 신문사, 야쿠자, 골동품상인 등이 정확한 본명도 대지 않은 채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며 "영주님과 가신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온갖 권력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모을 수 있는 기토 고타의 힘의 근원은 대체 무엇인가?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기토는 다이쇼 시대에 부를 축적한다. "만주로 건너가 때마침 발발한 중일 전쟁과 거기에서 이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군부와 손을 잡"고 온갖 더러운 방법으로, "만주라는 장소의 식민지적인 모호함과 패전이라는 혼란의 와중에" 돈을 끌어 모은 다음, 전후 쇼와 시대에는 그 돈의 힘으로 "늘 정계의 뒤쪽 한구석에 있으면서 때로는 자신이 쓴 줄거리대로 파도를 일으키고, 때로는 그것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전후 시대의 한 부분이 일단락"되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돈과 폭력을 통해 경제와 정치의 더러운 결합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기토 고타는 이른바 서구의 '대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호화로운 분위기를 가지면서도 애매한" 분위기를 용인하는 다소 체념적이고 굴종적인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논픽션의 제목 <일본의 검은 안개>가 이를 묘사하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검은 안개에 사로잡힌 이들의 부정(不正)이야말로 비밀스런 장소에서만 소곤거리며 이뤄지는 이권의 담합과 기토 고타 같은 흑막의 존재를 정당화시키고, 기토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에 '짐승의 길'로 접어든 인간들의 파멸을 이끌어내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짐승의 길>은 정교한 미스터리의 매력보다는, 일본 현대사의 문제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묵직한 분노와 이성에 기대어 당시 일본의 시대정신을 읽는다는 자세가 더 필요한 소설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곧 출판사 모비딕에서 출간될 <일본의 검은 안개>가 기다려진다. 하지만 그에 앞서,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거인의 커다란 발자국들 가운데 하나로 깡충 뛰어들"었다는 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책임 편집을 맡은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중·하>(북스피어 펴냄)도 아울러 읽으면 좋겠다. 특히 상권에 수록된 '쇼와사 발굴-2·26 사건'과 '추방과 레드 퍼지-일본의 검은 안개에서'는 일본 사회의 야경꾼을 자처한 마쓰모토 세이초의 힘이 여실히 느껴지는 '서문'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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