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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 목숨 걸었던 19세기 미치광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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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 목숨 걸었던 19세기 미치광이들!

[김용언의 '잠 도둑'] 란스마이어의 <빙하와 어둠의 공포>

"우리가 지구 자전축에서 북쪽 끝을 형성하는 수학적인 지점을 찾으려고 항해를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극을 둘러싼 커다란, 미지의 땅을 조사하기 위해 나간 것이다. 그리고 이 조사는 그 항해가 수학적인 지점 위로 이어지든, 아니면 그곳에서 조금 떨어지든, 학문적으로는 같은 의미를 갖는다. (…) 그러나 북극에는 도달해야 한다. 그래서 이 미친 짓을 끝내야 한다." (프리드쇼프 난센,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기)

"빙하에서의 생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그렇게 외롭고 버려진 듯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내게는 우리의 공허함을 기술할 능력이 없다."(프레더릭 앨버트 쿡, 20세기)

이 소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국주의의 욕망이 타오르며 아주 당연한 듯이 세계의 변경, 열려있는 빈 공간을 찾아 앞 다투어 자신들의 깃발을 꽂고자 했던 서구 열강들의 한 시절을 경험한 다음 열대 지역 어딘가의 강렬한 색채와 열기와 아름다운 이국의 여인과 기기묘묘한 동물과 무시무시한 원시 종교가 결합되며 기묘한 변형을 겪은 B급 어드벤처물, 과 정반대 버전이라고 불러야 할까. 1872년 5월31일 북극으로 떠났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탐험대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빙하와 어둠의 공포>(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지음, 진일상 옮김, 문학동네 펴냄)는 소설과 에세이와 기행문과 학술 기록 어딘가에 비스듬하게 위치한다.

누군가는 이 소재로부터 장르적 쾌감을 수십 배 확장시키는 증강 현실의 소재를 찾아낼 수도 있겠으나, 등의 잡지에 각종 기행문과 르포를 기고한 저술가 출신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란스마이어는 탐험대 선장, 측량사, 기관사, 사냥꾼이자 개 썰매꾼 등이 꼼꼼하게 남긴 방대한 기록 사이에서, 그들이 빙하를 뚫고 북극 최북단까지 가려고 사투를 벌일 때 그랬듯이 조금씩 길을 낸다. 그 길은 무뚝뚝하고 간결한데, 그 사이사이로 호들갑 떨지 않은 채 축적된 극한의 상황과 감정들을 상상하는 순간 독자가 경험하는 감정의 진폭은 상상할 수 없이 커진다.


▲ <빙하와 어둠의 공포>(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지음, 진일상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빙하와 어둠의 공포>에는 세 가지 화자의 목소리가 중첩된다. 1872년부터 1874년까지 북극의 빙하 사이에 갇혀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북극 탐험대, 1981년 그 북극 탐험대의 진로를 좇아 북극에 갔다가 실종된 보도 여행자 요제프 마치니, 그리고 마치니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마치니가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다가 북극 탐험대와 마치니를 묶는 느슨한 연대기를 작성하는 또 다른 화자 '나'. 100여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북극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속에, 세 명의 화자와 세 명의 작가와 두 명의 독자가 등장하는 셈이다.

첫 번째 화자이자 작가는 북극 탐험대원들이다. 그들은 1874년 8월 25일 러시아 포경선에 의해 구조받기 직전까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하게 기록을 남겼다. 그들이 남긴 스케치와 일기, 편지 등의 문서에는 풍향을 체크하고 선실 내부의 상황을 정비하는 일상의 규칙, 지질학과 해양학 등 학문적 관심사,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악천후 속에서 나빠져만 가는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 숨김없이 노출된다. 사냥꾼이자 개 썰매꾼 요한 할러는 1872년 '그해의' 태양이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날에 대해 이렇게 썼다.

"10월31일, 목요일. 날씨 맑음. 배 주위의 얼음은 꽤 조용하다. 중위의 모피 장화를 계속 만들었다. 10월30일에 마지막 태양을 보았다. 10월31일에 마지막 바다 갈매기를 보았다. 포경꾼이 바다 갈매기를 쏘아 죽였다."

몇 개월 동안 태양은 뜨지 않을 것이고, 탐험선 테게트호프 제독호는 다시금 내년의 태양이 솟아날 때까지 막막한 어둠과 영화 45도에 달하는 강추위 속에서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 1873년 1월1일, 빙하 전문가 엘링 칼센은 썼다. "우리는 새해에도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그러면 아무것도 우리와 대적할 수 없다." 1873년 2월19일에서야 비로소 그 해의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고 선원들은 감격하여 일지에 "이 날을 축복하소서!"라고 썼다. 그중 한 명은 그날 태양을 하도 열심히 바라보느라 한 시간 동안 일시적인 시력 상실 증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스물아홉 살 난 기관사 오토 크리슈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 기온을 꼼꼼하게 작성했지만, 그 일기는 점점 더 죽음과의 투쟁의 기록이 되어갔다. 그는 결핵에 걸려 폐가 썩고 있다.

"12월 21일 남남서에서 바람 (…) 11시에 성경을 읽음. 대원들의 선실을 꼼꼼히 조사함. 자기장 관찰실에서 작업. 기온이 올라감. 그러나 나의 병세는 악화됨. 오른쪽 가슴 부분에 끔찍한 통증. 12월 23일 서남서에서 바람 (…) 하늘은 가벼운 눈발로 뒤덮이고 대원들은 눈으로 만든 궁전을 장식함. 자기장 관찰 (…) 고열까지 있어서 고통스러움. 식욕이 없어지고 수프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 힘이 없고 다리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크리슈가 죽던 날 그를 얼음 속에 묻으며 선대의 제2책임자 율리우스 파이어 중위는 썼다.

"우리는 큰 소리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한다. (…) 그리고 우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될 것인가, 아니면 북극해가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우리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떠올린다."

고향에서 데려온 고양이가, 썰매개들이 죽어갈 때에도 선원들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가장 젊고 성실했던 동료가 귀환 몇 달 전 숨을 거두었을 때 그들이 마주쳤을 공포와 불안의 세기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이 탐험대 전체를 이끄는 대장인 해군 중위 카를 바이프레히트는 30대 중반에 불과했다. 그때까지 지도상의 '하얀 얼룩'으로만 남아있던 북극 지역을 조국에 헌납하겠다는 애국자의 순진무구한 헌신, 항해학과 기상학, 지구자기학, 해양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학문적 열정이 가장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정과 확신에 이끌려(물론 두둑한 보수도) 승선한 대원들의 목숨에 대한 책임감은 어땠을 것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탐험대 이전에 북극에서 살아 돌아온 탐험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1872년까지 침몰의 통계는 항상 모순되고 불완전하게 남아있다. 신화의 마법에 걸린 이 항로의 두려움과 무시무시함을 숫자로 파악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자신만만하고 침착한 바이프레히트도 빙하에 갇혀 2년을 보내고 난 뒤 선임자들과 똑같은 미래를 예감하지 않았을까. "인류를 고양시키고 인간의 이성이 가진 능력"을 신뢰했던 계몽주의적 인간에게도 타인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은 운명의 무게를 실감케 했을 것이다. 그는 비밀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모두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을 한다. 그러나 나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지 않는다면 우리가 완전히 실패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나는 매우 평온하다. 단지 선원들의 운명만이 내 마음을 짓누른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화자이자 작가, 동시에 독자인 두 사람, 마치니와 '나'는 100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뛴 다음 등장한다. 보도 여행자 마치니는 곧잘 상상에 빠졌다. 그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 다음 그 환상과 상응하는 실제 사건이 있었는지 조사해본다.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실제로 그러했다. 마치니는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부터 과거로 소급해 들어가는 반대 방향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탐험대의 문서를 발견했다. "마치니는 오래된 현실을 뒤쫓았다. (…) 마치니는 빙하 위를 헤맸고, 그리고 사라져버렸다." 그는 작가이자 독자의 위치에만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발터 벤야민이 에세이 '얘기꾼과 소설가'(<발터 벤야민의 문예 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펴냄)에서 썼듯, '이야기'와 '정보'는 다르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1914년 1차 세계대전 이래 인간의 경험은 정보에게 우위를 내주었다. "한 순간 속에서만 생명력을 가지고 (…) 스스로를 완전히 그 순간에 내맡겨야만 하고 또 한 순간의 시간도 잃음이 없이 그 순간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보는 이전까지의 '부질없는' 상상력과 무지의 시간과 '지도상의 하얀 얼룩'들을 새카맣게 지워나갔다.

물론 북극 탐험대원들도 그 역할에 충실했고, 이 낯선 땅에 조국을 기린 '황제 프란츠요제프 제도'라는 이름을 붙이며 "빙하 가운데 영원히 남을 새로운 도시와 친구들을 기억 속에서 뒤지고 찾아" 여기저기 새로운 명칭을 흩뿌려 놓았다. 그들은 걸어서 북위 82도 5분까지, 인간의 힘이 닿고 자연의 변덕이 허락하는 한 가장 먼 곳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그 숫자상의 기록과 지질학적 발견의 가치보다도, 도보 여행자 마치니와 연대사가(年代史家)인 '나'(와 이 책을 읽는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탐험대원들이 남긴 내면의 기록이 더더욱 흥미롭고 보존할 가치가 있다. '이야기의 모든 가능성'이 허용되는, 정보보다도 이야기가 우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유일한 장르인 소설 속에서 말이다. 벤야민이 말했듯 "얘기는 자신이 지닌 힘을 집중된 상태에서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뿐더러 또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다시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몇 번이고 부활한다. 어떤 한 순간에 대한 정밀한 기록인 정보처럼 '순수한 실체'가 아니라, "보고하는 사람의 삶 속에 일단 침잠"된 후에 전달되는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옹기그릇에 도공의 손 흔적이 남아있는 것과도 같다." 정보에만 만족할 수 없는 작가와 독자들이 결국 그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그리하여 그 옛날 이야기꾼들처럼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자 하는 욕망에 삼켜지고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지만, "수천 년 동안 밀폐된 피라미드의 방에 놓여있으면서도 오늘날까지 그 맹아적 힘을 보존하고 있는 한 알의 씨앗"을 틔우고 싶은 소망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니가 북극으로 떠난 이유를 추적하며 '나'마저도 마침내 마치니의 영혼 속으로 '상상의' 잠입을 시도한다. '나'는 객관적인 독자에서 작가의 세계로 넘어간다. 사료에 충실한 논픽션으로만 남을 수도 있었을 <빙하와 어둠의 공포>를, 란스마이어는 소설로 완성했다. 저 3겹의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이 기이하고 차가운 소설이 완성된 것이다.

왜 그런 방식을 택했을까. 란스마이어 자신이 북극 탐험대의 기록에 매혹된 다음 그것을 질료로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을 때 경험했을 갈등과 좌절감의 시간이, 이 3겹의 텍스트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으나,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보고하는 논픽션보다는 또 다른 손자국을 거기 남기고 싶다는 욕망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란스마이어는 마치니와 '나'를 등장시키며, 작가 자신이 100년 전의 무모한 북극 탐험대를 뇌리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게 된 과정을 되풀이 보여주고자 한다. 황제 프란츠요제프 제도를 미친 듯이 헤매며 그 땅의 끝까지 전부 측량하고 "모든 것을 보려 하고 모든 것을 보아야 했"던 율리우스 파이어의 욕망처럼 말이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를 읽고 난 다음, 구글에서 율리우스 폰 파이어(Julius von Payer)의 그림 를 검색해서 보시길 권한다. 빙하의 공포 속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제정신을 잃어갈 때 그들을 위로하고 다잡은 존재는 바이프레히트였다. 그는 "흔들림 없이 바다와 하늘의 모든 신호들을 유리하게 해석"하며 선원들을 안심시켰고 "우리는 준비가 되었다. 아무것도 우리를 놀라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설득했다. 마지막 순간, 목표를 달성하고 마침내 배를 버린 다음 1000킬로미터가 넘는 빙하를 건너 귀향하는 길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다시금 두려워하며 감옥이자 피난처였던 배로 돌아가고 싶어 하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모험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화가가 된 율리우스 파이어는 죽기 직전 바로 그 탐험대의 풍경을 되풀이 그렸다. 그중 대표작이 바로 다.

율리우스 파이어는 북극에서의 모험에 열광과 증오를 동시에 느꼈던 혈기방장한 젊은이였고, 바이프레히트와 때때로 심각한 갈등을 빚으며 정복자로서의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군인이다. 그가 삶의 말기에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지켜보고, 자신을 포함한 19세기 인간들이 추구하고 탐험했던 그 모든 것들이 '구세계'에 속하는 쓸모없는 이야기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다시금 그 무의미함에 매달리며 강렬한 기억에 의지한 채 되풀이 화폭을 채워나갔다. 에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19세기 말의 정신의 정수가 담겨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고 소유하고 싶어 했으며, 결국 자신들이 좇던 것이 어떤 사물의 그림자거나 반사된 상임을 깨닫기 전에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던, '미래에 존재하는 진실'보다는 자신들이 지금 경험하는 진실에 더 매혹되었던 이들의 미치광이 짓거리의 정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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