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송년호(71호)는 '2011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독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1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오래 전 상사가 나를 따로 불러 앉힌 다음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너의 스페셜티는 뭐냐?" 헐, 내 생애 들어본 가장 무서운 질문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내가 차별되는 지점을 모르겠다면서, 그걸 알아내야지만 이곳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바야흐로 내게도 자기계발의 역풍이 닥쳐오는가 싶어 초여름 더위에도 소름이 쫙 끼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생각해 보면 어떤 종류든 자기 계발서와 영 연관 없는 삶을 살아온지라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시크릿>,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마시멜로 이야기>, <긍정의 힘>, <이기는 습관>,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베스트셀러는 한 번도 들춰본 적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까지. 물론 '좋은 습관의 형성으로 행복한 성공을 돕는' 프랭클린 플래너도 써본 적이 없다).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걸까,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나, 자책하다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을 통해 비로소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읽으며 장기적 인생 플랜을 세운다는 자기 계발서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책들은, 부정적인 사람들을 멀리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뉴스를 끄라고 권한다. 대신 원하는 것을 눈앞에 그려보고 간절히 소망하면 그것이 '끌려온다'고 주장한다. 복권 숫자도 맞출 수 있고 원하는 남자와 데이트할 수 있고 안경도 벗게 될 만큼 시력도 좋아진다고 한다(아니 무슨 무안단물도 아니고…).
낙심과 불안에 시달리는 당신은, 그저 나태할 뿐인 것이다. 심지어 긍정적인 분위기를 발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고당할 수도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한다. 대체, 왜, 베스트셀러 자기 계발서를 읽은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개조하고 개선함으로써 인생의 수많은 행운이 자기 것이 된다고 믿(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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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부키 |
첫째,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 미국인은 신의 선택을 받은 국민이며, 미국이 세계의 지도자가 될 운명"이라는 선민주의와 결합했다. 둘째,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개인의 욕구와 '성장'이라는 기업의 지상 과제에 의존"하는 소비자 자본주의와 긍정적 사고는 매우 잘 어울린다.
셋째, 긍정적 사고는 시장 경제 내에서 실패에 대해 개인의 책임을 가혹하게 강요하는 경향을 변호한다. 결과는? "그 여름 내내 놓쳐 버렸던 단서들을 하나로 합쳐 생각해보면 2001년 9월의 비극을 예감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고, 이라크를 멋대로 침공했으며, 2002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초래한 비극을 예방하지 못했고, 2007년의 금융 붕괴와 경제 위기라는 '받아 마땅한 벌'을 받았다.
바바라 에런라이크가 긍정적 사고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게 된 계기는 유방암이었다. 다시 말해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화학 치료를 받고 유방암 '시장'에 대해 눈을 뜨면서부터인 것이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태도를 갖는 것만으로 암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라는 '전문가'들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 유방암이라는 경험을 통해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됐고 삶을 훨씬 더 즐기며 행복해졌다는 유경험자들의 조언, 나아가 암에 걸린 것은 그동안 부정적인 태도로만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선의의 충고들'("네가 암에 걸린 건 네가 암을 원했기 때문이래")을 접하며 에런라이크는 점점 의문을 품었다. "그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부정하고, 불행에 즐겁게 굴복하고, 닥친 운명에 대해 오직 자기 자신을 비난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긍정적 사고의 콘텍스트를 향한 에런라이크의 기나긴 추적이 시작된다.
긍정적인 자기 계발이 미국에서 보편적인 이데올로기가 된 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기업, 종교, 학계의 삼위일체 덕분이다. 고용주는 긍정적 사고를 달콤한 채찍으로 활용하며, 긍정적인 직원이 회사의 매출을 높이고 따라서 본인의 월급도 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업사원, 사무직, 정보통신 종사자, 엔지니어, 심지어 임원들까지 "나는 건강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멋지다!"라는 주문을 외우며 1980년대부터 분 다운사이징 국면을 헤엄쳐 나갔다.
AT&T는 2년 동안 1만5000여 명을 정리 해고할 것이라고 발표한 당일, 샌프란시스코 직원들을 '성공 1994'라는 동기 유발 행사에 보냈다. 행사의 연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체제를 탓하지 마십시오. 상사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세요."
<백만장자 시크릿>의 하브 에커는 부자가 되겠노라고 열망하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권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라. 나는 부자들에게 감탄한다! 나는 부자들을 축복한다! 나는 부자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 또한 저 부자들의 일원이 될 것이다!" 모두가 부를 갈망하더라도 모두가 그것을 차지할 수 없다는 현실은 이 자기최면에 끼어들 틈이 없다.
긍정적 사고는 기독교의 탈을 바꿔 쓰며 대기업을 넘어서 저임금 블루칼라 층에게까지 다다랐다. 하느님은 성경에서 인류에게 '번성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마련해두신 부유한 삶"을 당신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느님의 존재는 지지자, 집사장, 개인적 조력자로 격하되었다. 하느님은 나의 속도 위반 딱지를 해결해 주고, 식당에서는 좋은 자리를 찾아 주고, 내가 책 계약을 딸 수 있도록 해준다." 심지어는 "하느님은 은행이 내 신용 점수를 무시하도록 해주시고, 내가 처음으로 소유한 집을 축복해 주신다"는 설교가 공공연하게 제공되었다(그 축복에는 믿음을 보이는 행위, 즉 교회에 큰돈을 기부하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있다).
심리학계는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긍정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박사급 심리학자들은 낙천성 및 행복감을 건강과 직업의 성공과 결부시킨 학문적 저작물을 쏟아냈고, 신문과 잡지들은 앞 다퉈 그 내용을 충실하게 보도했다. 이제 긍정성은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 같은 다소 수상쩍은 신비주의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합리적, 세속적 담화의 표준 어구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종교에 과학과 동등한 지적 발판을 제공하려 노력하는 템플턴 재단은 지난 10년 동안 긍정 심리학 연구에 350만 달러 이상을 지원했고, 노벨상 상금보다 더 많다는 이 재단의 상금을 타기 위해 심리학자들은 긍정 심리학에 투신했다. "2006년 하버드 대학에서는 긍정 심리학 개론 강의에 855명의 수강생이 몰려 경제학을 제치고 최고 인기 강좌로 떠올랐다."
기업, 종교, 학계라는 긍정성의 신성한 삼위일체는 2007년에서 2008년에 걸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비롯된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에 한 몫 단단히 하게 된다. 미국에선 2004년 <우리는 해고당했다! 지금까지 겪은 일 중 최고로 멋진 일이다>라는 자기 계발서가 출간됐고, 고용 시장이 아무리 불안정하더라도 '변화와 위기는 기회다'라는 낙천적인 메시지가 끊임없이 주위를 맴돌았다.
"집 값은 중력의 영향에서 영원히 벗어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2008년 말, 아무도 그 돈놀이의 사기극을 꿰뚫어보지 못했던 이유가 "누구도 잔치의 흥을 깨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탄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스티븐 펄스타인은 "모든 경제 혹은 금융 열광의 핵심에는 자기기만이라는 전염병이 있다"고 결론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는 2008년 위기 이후에도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목사들은 "당신이 직업을 잃었다 해도 하느님은 다른 문을 열어주십시다"라고 설득했고, 경제 컨퍼러스에선 "(구조 조정을) 견뎌 내란 말입니다. 이 몸집만 커다란 애기 같은 양반들아!"라는 질책이 잇따랐다. <시카고 트리뷴>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수준을 넘어 비방 그 자체에 몰두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고 말았다. 절뚝거리던 경제는 더욱 더 형편없는 상태가 되었고, 일시적인 불경기가 불황으로 악화될 위기에 처했다…탓하는 것을 그만두자. 전망을 내다보며 즐거워하자"고 썼다.
한국의 경우를 미국과 일대일로 대응시킬 순 없다. 한국처럼 불평할 일투성이인 나라에서 왜 진작 이런 책이 안 나왔을까 섭섭하기도 하고, 이 땅의 불평분자 모두에게 쌍수 들어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에런라이크의 풍성한 자료들과 신랄한 풍자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며 한국의 현실에 대응시킬 순 없다.
무엇보다 한국의 낙천성은 미국의 낙천성과 결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그리고 대기업이라는 공적 체제와 개인의 사적 삶을 도저히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는 공적 체제의 안녕과 번영이 나의 안녕과 번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너무나도 공고하다.
거대한 타자에 자신을 투사시키며 그에 상응하는 거대한 행복을 바라는 나머지, 10대에도 공부하고 20대에도 공부하고 30대에도, 40대에도, 급기야 평생 공부하다 죽으라는 명제까지 순응하며 받아들이는 태도에는 확실히 '원하면 끌려온다'라는 낙천적인 행복보다는 마조히스트적인 투쟁의 피투성이 의지가 더 엿보인다.
새마을운동의 외침이 지금도 유령처럼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스스로를 혹사하면서 고생 끝에 낙이 올 것이라는, 칼뱅주의와 긍정적 사고의 기이한 합체와도 같은 그 정신 세계에서는 긍정적 사고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바꾸기 힘든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조언은 경청할 가치가 충분하다. 현실주의적 사고를 견지하고 '방어적 비관주의'에 익숙해지며, '나'의 내면만을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채색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시선을 가지자는 제안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하다. 무엇보다 "희생자를 비난하는 시각은 최근 20년 동안 우세했던 경제의 보수주의와 딱 맞아떨어졌다"는 에런라이크의 지적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더불어 행했던 노력을 통해 비로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대부분 그 두 가지의 선후 관계를 혼동한 채, 주문을 외우며 긍정적으로 살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긍정의 의미를 그야말로 부정적으로 만드는 짓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혀 불가능한 일을 노려보며 주문을 외울 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왜 불가능해졌는지를 돌이켜보고 그것을 향해 목소리를 내어 요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영화 <올드 보이>를 통해 유명해진 엘라 윌콕스의 시 '고독'에서처럼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 …메아리들은 즐거운 소리에 춤을 추지만 / 너의 근심은 외면하리라"의 아름다운 구절에 함몰되지 말고, 우리는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 문제를 함께 목청 높여 토론하고 바꿔나갈 수 있는 구조가 안정적으로 정착되어야 한다.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또다른 책 <오! 당신들의 나라>(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가 얼마 전 출간되었다. 2012년은 이 책과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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