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등단작을 찾아 읽어보았고, 놀랐다. 토머스 엘리엇의 시 '황무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문명이 인류를 격상시킴과 동시에 파멸시킨다는 걸 직감했던 시인의 눈동자가 세월을 껑충 뛰어넘어 외계인의 비전과 겹쳐진다는 상상력이라니. 엘리엇은 1922년 '황무지'를 발표했고, 조현은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을 2008년 발표했다.
조현은 그 90여 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동양과 서양 사이 수많은 국경을 아무렇지 않게 건너뛰며,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시선 사이 이격을 초월해 버렸다. 온갖 소설과 시와 역사로부터 끌어온 파편들을 문장 이곳저곳에 노련하게 심어놓으며, 안다면 더 좋겠지만 모르더라도 크게 지장 없을 만큼 노련하게 조직된 이성적인 소설, 그러나 때때로 '심장이 얼얼해질 만큼' 감성적인 부분도 빛을 발했다.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에서, '우아한 철학'만 뚝 떼어놓아 조현이라는 작가를 설명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그에게 제인 오스틴의 소설 제목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성과 감성, 그 둘이 꼬리를 물고 자신들의 세계를 동그랗게 완결하는 형태.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민음사 펴냄)는 2008년 등단 이후 발표한 단편 7편을 묶은 첫 번째 소설집이다. 어떤 작가의 출발점, 혹은 원형처럼 두고두고 펴보게 될 그런 책인 것이다. 7편을 관통하는 키워드라면 어떤 형태로든 글쓰기라는 창작 행위에 대한 메타적 글쓰기이다. 나의 의지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초능력이든, 타인의 전생을 일깨워주는 초능력이든, 사물의 이면을 엿볼 수 있게 된 초능력이든, 모든 사물과 사건의 정수만을 볼 수 있는 '견자'의 능력이든, 그것은 오로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온갖 감정의 역사를 육체의 표면에 고요히 새기며 늙어"가고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육신에 새겨놓은 삶의 역사를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면밀하게" 탐험하고 발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과학 소설의 상상력과 문명사에 대한 박물지적 지식의 술래잡기와 그리고 음…대단히 위트 있는 '뻥'이 결부되며 조현의 소설들은 독특한 문질(文質)을 점유한다.
▲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조현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
표제작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는 시인 마이클 햄버거(실존 인물), 펭귄 출판사 편집자 이본 마멜(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속 인물,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출판사의 로고가 영국인의 사랑을 받던 그레이하운드도 아니고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대륙에 사는 배불뚝이 포유류라는 사실은 대저 문학이 추구하는 엉뚱한 상상력을 상징적으로 웅변하는 것이다. 하기야 이러한 엉뚱함이야말로 예술을 실어 나르는 18기통 엔진이자 가솔린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볼티모어의 스낵바 주인 마틴 커닝스, 그의 아들이자 한국의 미8군 대위로 임명받은 커닝스 주니어(마침 그가 한국에 머무르던 1988년은 맥도날드 1호점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개장한 해이다), 한남동 광고 회사 C기획의 마케팅팀 김경주를 차례로 스쳐가며 "맥도날드가 친인간적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2010년대를 상상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의 부제는 '냅킨 혹은 T.S. 엘리엇의 황무지 중 "IV. Death by Water"에 대한 한 해석'이다. T.S. 엘리엇의 가상의 연인 메리 설리반이 쓴 편지와 그녀가 작성한 글 <신세기의 문화적 발현과 불모 : 시인이 견지해야 할 종이 냅킨 혹은 종이 냅킨 접기에 대한 우아한 철학>과 22세기 휴머노이드의 인류 문명 보고서가 뒤섞이면서, 난해한 모더니즘의 대표 명사로 악명을 떨치던(혹은 "4월은 잔인한 달…"까지만 읊으면 모두 "응응응, 그 시 알아"라고 접고 들어가는)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다시금 펼쳐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즉 하나의 상징은 하나의 행동으로 연결될 때 우아하게 빛난다. 우리가 런던 뒷골목에서 사흘을 굶은 어린이를 보고서 검게 굳은 빵을 갈라 그 아이와 반 조각씩 나누어 먹는 것과, 단지 측은한 마음만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은 천국과 연옥처럼 거리가 먼 일이다. 내가 템스 강가에서 허리를 숙여 물을 한 컵 뜨고 그리고 그 물이 새카맣게 죽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곧 이 한 컵의 물로 세상의 물이 전부 죽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뜬 물 한 컵이 생의 약동으로 펄떡인다면 온 우주의 물 또한 그러하리라. 다야드밤(공감하라), 우리의 문명은 상징보다는 항상 재생하는 행동에 의해 종말을 유예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종이 냅킨 혹은 종이 냅킨 접기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라고 부른다."
'옛날 옛적 내가 초능력을 배울 때'의 주인공 현은 "목성의 여덟 번째 위성 가니메데" 출신인 S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는 견디기 힘들었던 "존재와 존재의 충돌"로 이어지며, 그 부딪힘에서 오는 충돌을 견디기 힘들었던 현은 모 종교 단체의 초능력 훈련에 몰두한다. "우선 모든 강사들은 어김없이 상상력을 강조했다. 그것은 타성에 젖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라야 했다. 한겨울을 한여름으로 바꾸는 자기암시의 경우, 현재의 상황을 얼마나 현실감 있게 한여름으로 상상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했다." 현은 초능력을 습득하는 데 실패하고, 10년이 지나 홀로 소백산을 찾아 "오래전에 잃었던 그리운 천체 하나와 해후"하기 위해 온 심령을 다해 주문을 걸기 시작한다.
'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은 글쓰기에 대한, 그리고 글쓰기의 자질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설서와도 같은 작품이다. 의사들에게 "경계성 성격 장애" 판정을 받거나 "우울증 지표인 DEPI나 자살 지표인 S-Con의 긍정 반응이 높을" 수도 있는 화자의 기나긴 독백으로 이뤄져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물의 이면이 보이는 신비로운 착시, 환영, 꿈이라 불리는 특별한 순간을 체험할 수 있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평행선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리만 기하학의 우주에서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우주는 리만기하학의 우주라는 것도…마치 로르샤흐의 카드 열장이 한 인간의 심연에 그물을 던져 영혼의 깊은 곳에 부유하는 심상을 건져 올리듯, 사물이나 정신의 얼룩은 우리가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참조해야 할 교통표지판과 같은 거야. 정신이 쇠약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인 셈이지." 그는 랭보가 부르짖었던 "시인은 견자여야 한다"는 외침, "시인은 가장 큰 죄인 가운데 가장 커다란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받은 자, 그리고 지고로 박식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미지에 도달했으므로!"라는 절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의 주인공은 "하나의 영혼을 다른 영혼에 덧대어 존재의 영적 자각을 돕는 조정자"인 소울마스터다. 그는 1920년 3월 아르헨티나에서 대초원 라 팜파를 노래하던 시인 라파엘 오블리가도의 윤회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지고, 결국 시인의 노래를 들으며 "이 대초원은 사라져 가는 모든 세계에 대해 애처로운 향수를 품었기 때문이리라. 혹은 이 대초원의 모진 바람 속에 자라나는 풀과 나무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을 넘어서 척박한 것은 척박한 대로 거룩하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리라"라는 결론을 내린다. '돌고래 왈츠'의 주인공은 아마도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 속 배경 행성과 같은 곳으로 추정되는 행성에서 왔다. 그는 "하나의 감각 예술을 다른 예술 장르로 번역하는 일"에 골몰한다. "그것은 지극히 정교한 작업으로, 축구 선수 웨인 루니의 힘찬 드리블을 로커 지미 헨드릭스의 몰아치는 기타 연주로 번역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지구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축구의 한 장면으로 한 곡의 록 음악으로, 한 곡의 록 음악을 한 장의 석판화로, 한 장의 석판화를 한 편의 수중발레로, 그리고 한 편의 수중발레를 하나의 문신으로 자신의 피부에 새겨 넣는 것."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번역하는 데 서툴렀다.
다소 이질적인 '역사 소설' 장르를 택한 '초설행'은 <성종 실록>에 삽입된 문장 몇 줄로부터 시작한다. 성종 13년 10월 18일, 죄인 김맹규의 아들 김우겸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결국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다. 왜? 글은 이념을 전하는 그릇이고, 또 그 글이 담겨지는 형태에서부터 이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글을 둘러싼 조용한 전투, 동시에 그 안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청신한 러브 스토리가 숨겨져 있었다. "눈 혹은 죽음은 차갑고, 쓸쓸하고, 적막하다. 단지 그뿐이다. 하지만 겸에게 눈 그림자는 눈보다 더 희어서 한평생이 살만했다. 중종 20년 겨울, 김우겸 졸하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오랜만에 고졸(古拙)한 글을 읽은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조현의 소설로부터 기존에 익숙한 소설의 특성,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확고, 미래+약속, 종료형' 시제"로 가득한 이야기 전개와 인물 설정을 기대한다면 읽는 내내 당황할 것이다. 그는 작가가 무당이자 영매자 마법사, 예언자, 초능력자임을 굳게 믿고 있으며, 엠페도클레스처럼 "나는 아가씨였고, 사슴이었으며, 바다의 물고기였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존재임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 소설의 '자제하는' 이성적 현명함과, 무한히 촘촘하게 연결되며 생명을 키워내는 식물의 힘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시선으로 직조된다.
'초설행'을 제외한다면,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에 실린 소설들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식물적 SF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마치 깊은 밤 르네 샤르나 칼 크롤로브의 시를 외운 사람의 삶이 그 이전의 삶과 미학적으로, 혹은 심령적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조현의 소설을 읽고 나면 글을 쓴다는 것, 시를 외운다는 것, 간절하게 기도한다는 것,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환영을 보고 꿈에 잠긴다는 것이 얼마나 특출한 선물인지를 뒤늦게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 역시, '황무지'에 나온 마지막 전언을 외우고 싶어질 것이다.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타(자제하라). 우리는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하고, 그런 자세로 글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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