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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거리에 뛰어든 그 여인을 조심해!

[김용언의 '잠 도둑']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흰 옷을 입은 여인>

4년 전 일본 작가 온다 리쿠를 인터뷰했다. 아직도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대답이 있다. 그녀의 소설은 대개 시공간이 명확하지 않은 배경을 다루고, 많은 작품들 속 주인공인 고등학생을 통해서도 시대를 전혀 추측할 수 없다는 게 궁금했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컴퓨터, 휴대폰, 10대들이 열광하는 당대의 아이콘, 화장과 패션 등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점을 물었을 때 온다 리쿠는 이렇게 대답했다.

"10대의 에센스를 형상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휴대폰이라든가 컴퓨터는 잠깐 지나가는 유행이고 풍속이지요. 전 어느 시대의 어떤 나이대의 사람이 읽더라도 공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주인공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 말이 정말 맞다. 이를테면 007 시리즈 중 1960년대 영화들을 보다보면 당시에야 최첨단의 상상력이었을 수 있겠으나 지금에 와선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발명품들이 즐비한데, 그 순간 세계 최고의 스파이라는 007의 명성에 대해 신뢰가 무너져버리는 게 사실이다(007 팬들께는 죄송합니다!).

어떤 작품이 변덕스런 독자로부터 싫증을 사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선, 크게 두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작품이 배경으로 하는 동시대성을 매우 뛰어난 솜씨로 드러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의도대로 그 낯선 시공간 속에 기꺼이 뛰어들게 하거나, 혹은 아예 그런 특성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사건과 인물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 온다 리쿠가 바라는 궁극의 소설이 두 번째 경우라면, 윌리엄 윌키 콜린스가 1860년 출간한 고딕 미스터리 <흰 옷을 입은 여인>(박노출 옮김, 브리즈 펴냄)은 첫 번째 경우에 해당된다.

1849년 7월 31일, 성실한 화가 월터 하트라이트는 4개월 동안 스코틀랜드 지역 컴벌랜드의 리머리지 가에 머무르는 일자리를 소개받는다. 그는 곧장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런던의 하숙집으로 향한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아무도 없는 황무지 대로를 걷던 월터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흰 옷을 입은" 낯선 여인과 마주친다.

그녀는 연이어 이상한 질문을 퍼부으며, 월터에게 런던까지 함께 동행해줄 것을 간청한다. "런던에 아는 사람이 많으신가요? 높은 계급의 사람들도 많이 알고 계시나요? 준남작 신분의 남자들도 많이 알고 계시죠? 제가 알고 있는 한 사람만큼은 모르셨으면 해서요.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 <흰 옷을 입은 여인>(윌리엄 윌키 콜린스 지음, 박노출 옮김, 브리즈 펴냄). ⓒ브리즈
런던에 도착하여 여인이 마차를 타고 떠난 직후 그 여인의 뒤를 쫓는 또 다른 남자 두 명이 월터 곁을 스쳐간다. "그 여자는 우리 정신병원에서 도망쳤소."

리머리지 가에 도착한 월터는 4개월 동안 가르치게 될 두 학생, 총명하고 의지가 굳은 마리안과 아름답고 온유한 로라를 만난다(로라는 월터가 마주쳤던 그 흰 옷의 여인과 놀랄 만큼 닮았다). 그리고 로라에게 마음을 다한 사랑을 느끼지만, 로라는 이미 아버지의 유언으로 나이 많은 퍼시벌 글라이드 경과 약혼한 상태였다.

그때 로라 앞으로 날아든 기이한 투서는 퍼시벌 경에 대한 끔찍한 비난을 퍼붓는다. "피도 눈물도 없이 (…) 이 남자는 다른 이들의 삶을 불행으로 뒤덮었고 이제 옆에 선 여인의 삶까지 불행으로 인도할 것이다." 마리안과 월터는 퍼시벌 경과 로라의 결혼에 대해 강한 의혹과 불안을 느끼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월터와 로라는 서로의 사랑을 "들을 권리도, 그것에 대답할 권리도 없"이 그렇게 헤어지고 만다.

로라와 퍼시벌 경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지켜보던 마리안은 점차 이 결혼에 끔찍한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불안해진다. 퍼시벌 경과 절친한 벗이자 로라의 고모부인 포스코 백작의 거동도 수상쩍기 이를 데 없다. 결국 '흰 옷 입은 여인', 즉 앤 캐서릭이라 알려진 비밀스러운 여인이 오랜 세월에 걸친 비열한 음모의 중심에 존재한다는 게 밝혀진다.

훗날 영국의 수상이 된 윌리엄 글래드스톤이 젊은 시절 이 작품을 완독하고자 극장 예약까지 취소했다거나, 혹은 <허영의 시장>의 작가 윌리엄 새커리는 아침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해 저녁 해가 질 때까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는 일화는, 사실 지금 시대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는 가십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독자들에게 더 궁금한 것은,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등장할 수 있었고 그토록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19세기 시대정신의 정체가 아닐까 싶다. 영국이 전 세계를 지배하던 19세기 중반, 급증하는 부에 뒤따라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덩달아 해외에서 유입된 낯선 존재들도 급증했다는 것, 이전까지의 농업 중심적이고 왕정 세습이 당연시되던 귀족 사회가 붕괴하며 새로운 중간 계급 부르주아가 발흥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흰 옷을 입은 여인>에도 시골 지주격인 귀족들이 주요한 등장인물이다. 재산 상속을 위해 기댈 곳 없는 가련한 귀족 여인을 파멸시키는 퍼시벌 경과 포스코 백작, 자신의 지나치게 연약한 신경과 예술적인 심미안밖에 안중에 없는 프레더릭 페어리 에스콰이어 등은 주변의 약자들을 돌보지 않는 불쾌한 존재로 그려진다(독재 왕정을 타도하기 위한 비밀스런 혁명 조직의 존재도 눈여겨보자).

그에 비해 미술 교사, 일러스트레이터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며 '넘볼 수 없는 보물'이었던 귀족 여인 로라와의 사랑을 끝내 실현시키는 주인공 월터, 건전한 상식과 물증에 기대어 세상사를 정돈하는 변호사 길모어와 카일 등은 영국 사회를 실질적으로 꾸려가는 전문가 집단의 유능한 자신감을 표상한다.

그중에서도 소설 초반에는 마냥 착하고 섬약하기만 했던 월터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변호사들이 요구하는 실제적인 증거를 찾아나서는 후반부에선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사악한 권력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로 놀라운 추리력을 동원하여 대담한 한판 승부를 벌이는 후반부 모험담에선 이후 등장할 탐정의 대명사 셜록 홈즈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를 등장시킨 첫 번째 소설 <주홍색 연구>를 쓴 건 1887년이며, 그가 에드거 앨런 포의 안락의자 탐정 뒤팽과 함께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흰 옷을 입은 여인>, <월장석>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마치 과거의 망령인 듯 기이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한껏 강조하며 19세기 초반 대대적으로 유행했던 고딕 소설을 따라잡는가 싶다가, 결국 앤 캐서릭의 불행한 삶이 지극히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현실적'으로 재구성되는 결말을 보면 상상력으로 충만한 고딕 소설에서 정교한 미스터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결실로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을 읽을 수 있다.

조금은 더 재미있을 가십 하나. 윌리엄 윌키 콜린스는 실제로 1858년 런던 밤거리를 산책하다가 인근 저택에서 도망쳐 나온 흰옷 입은 여인 캐롤라인과 마주친 경험담으로부터 <흰 옷을 입은 여인>을 구상했다고 한다. 캐롤라인은 그 저택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최면술'에 사로잡혀 죄수처럼 감금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쳤다 한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고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평생을 함께 지냈다. 분명 두 사람의 첫 만남에 관해선 후세의 과장 섞인 당의정이 덧붙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던 윌리엄 윌키 콜린스가 이 대단히 멜로 드라마적인 경험으로부터 현실적인 살과 뼈를 붙여나간 창작 과정을 상상해보는 건 꽤 흥미롭다. 어딘지 모르게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그림 <백색 교향악 1번-흰옷을 입은 소녀>, <백색 교향악 2번-흰옷을 입은 소녀>과 곁들여 읽고 싶게 만드는 분위기가 물씬하지 않은가!

<흰 옷을 입은 여인>을 보고 난 뒤 고딕 미스터리의 분위기와 형식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독자가 있다면, <밤의 의미>(김승욱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도 추천하고 싶다. 오랫동안 출판 편집자로 일해 온 저자 마이클 콕스가 가장 애착을 느꼈던 빅토리아 시대 고딕 소설의 온갖 특징을 기세 좋게 방출하며 써내려간 매혹적인 데뷔작이다. 그것도 58세의 나이로.

21세기에도 여전히 19세기의 유령이 그 창백한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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