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김진숙은 왜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을까. 이제는 너무나 많이 알려진 일이지만, 한진중공업의 경영진이 수많은 흑자에도 불구하고 구조 조정을 단행하고 대규모 정리 해고를 단행하려는 시도를 막아내고자 한 일이었다. 급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아니고는 허용될 수 없다는 정리 해고. 그 시도를 앉아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해고는 살인'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그 가족, 그리고 지역 사회 모두에게.
사측은 경기 침체와 높은 인건비로 인해서 한진중공업의 영도조선소에서 건설할 선박 수주 계약을 따내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경기가 점차 회복되면서 다른 조선소에서 선박 수주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많은 논란 속에서 이루어진 노사 타협 직후에 6척의 선박 수주가 이루어졌다고 알리는 사측의 보도 자료는 그들의 주장을 더욱 불신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몰빵'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모든 자원을 쏟아 붓고 있는 필리핀 수빅만의 조선소 건설과 운영으로 회사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관련 기사 : "'몰빵'의 저주?…수빅 조선소 건립은 타당한가") 자본이 값싼 국가와 지역의 노동을 찾아 생산 시설을 옮기면서 이윤 확대를 극대화하고 노동 운동에 대응해왔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게다가 필리핀으로 일감을 돌려 부산 영도 조선소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면서도, 필리핀 노동자에게도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고 있다는 고발도 계속 되고 있다.
한진중공업 사측이 구조 조정과 정리 해고 시도를 중단하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심지어 한나라당 지역구 의원까지 이 주장을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시사 매거진 2580>의 김형오 한나라당 의원 인터뷰). 해외 언론을 통해서도 보도가 되고 있으며, 국제적인 연대 메시지도 전달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당당히 걸어서 내려오고, 희망 버스가 정말 희망을 찾아낼 수 있기를 함께 응원하고 연대하고 있다.
ⓒ프레시안(손문상) |
하지만 한진중공업 사측이 시도하는 이번의 구조 조정과 정리 해고가 꼭 이러한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계 경제가 점차 회복되면서 전반적으로 조선 시장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는 '잘못된 경영 판단'으로 인해 필리핀 조선소의 건설에 따른 자금 압박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더 신뢰할 만하다. 그 와중에도 한진중공업이 막대한 주주 배당금을 지급한 것을 보면 '모럴 해저드'라는 비판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더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업이 세계 경제의 변동에 대단히 민감하다는 점이며, 지금이 아니더라도 유사한 경제 위기는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 부도의 아슬아슬한 상황을 보라. 게다가 전 세계 선박 건조 수요에 비해서 초과되어 있는 공급 능력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또 유가의 상승과 기후변화협약에 따른 온실 기체 배출 규제 등으로 인해서 세계 경제의 성장이 결코 이전과 같이 유지될 수 없다는 예측도 있다. 그나마 있는 집 살림살이를 두고 싸울 수 있는 기회도 점차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값싼 노동 시장을 찾아내서 자본의 속성을 통제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한진중공업 사측이 필리핀 조선소에 일감을 몰아주는 것이 쟁점이 되고 있지만, 되돌아보면 한국의 조선 업체도 그러한 방식으로 성장했다. 1950년대 세계 조선 시장을 석권하던 영국 등의 유럽 조선 업체가 1960~70년대 일본 조선 업체에게 조선 시장의 상당부분을 내어 주었으며, 다시 1980~90년대에는 한국 조선 업체에게 시장의 중심 위치를 내주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값싼 인건비도 중요했다. 이제는 풍부한 외화와 값싼 인건비를 내세운 중국 등의 후발국의 추격에 한국의 조선 산업도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국제 경쟁에서 궁지로 몰린 모든 나라에서 한국처럼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본과 한국에게 국제 조선 시장의 상당 부분을 내줘야만 했던 유럽의 조선 업체에서는 우리의 부러움을 살 만한 사례들이 여러 발견된다.
먼 일도 아니다. 2009년 중순 독일의 대표적 철강 기업인 튀센쿠룹(ThyssenKrupp)이 컨테이너 선박을 제조하던 선박 용접 공장을 풍력 발전기용 부품 전문 제조 기업인 지악-샤프(Siag-Schaff)에 매각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업체가 어떻게 노동자의 고용과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면서도,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전도유망한 풍력 산업에 합류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조선 산업과 풍력 발전기 제조 설치 산업이 대단히 유사하다는 점과 세계 풍력 시장, 특히 해상 풍력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산업의 설비와 노동자의 숙련, 그리고 관련 부품 업체들의 생산 능력은 풍력 발전기의 생산과 설치에 필요한 능력과 대단히 유사하다. 특히 해상 풍력 산업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게다가 풍력 산업의 급격한 성장세는 조선 산업의 전환을 수용할 만한 여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풍력협회는 2005년의 전망에서 2030년 세계 시장 규모를 300기가와트로 예상했던 것을 2009년에는 2300기가와트로 수정할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르다. 5년 후에는 세계 풍력 발전 시장이 조선 시장의 2배에 달할 것이라는 예측도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을 배경으로 독일의 튀센퀴룹 산하의 한 조선소의 전환이 시도되었다. 애초에 튀센크룹은 재정난으로 이 공장을 폐쇄할 구상이었지만, 125년 된 조선소 노동자의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그 만큼이나 공장 폐쇄를 반대하는 저항도 강력했다. 노동조합의 각고의 노력 끝에 새로운 투자자인 지악-샤프를 만날 수 있었다. 지악-샤프는 튀센크룹으로부터 인수하는 조선소에 4000만 유로를 신규로 투자했을 뿐만 아니라, 단 한명의 정리 해고 없이 공장 노동자 모두의 고용을 승계하였다.
독일에서의 해상 풍력 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고용 승계의 요구는 비교적 원활히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혹시 풍력 산업을 통해서 충분한 일자리가 마련되지 않을 경우에, 튀센크룹이 이를 보완할 작업 분량을 제공하겠다는 협의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또 당시 지악-샤프는 사용자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중소기업이서 단체 협약 체결과 이행의 의무가 없었지만, 노동조합이 사용자단체에 가입하도록 요구함으로써 튀센크룹과 동일한 수준의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풍력 산업 전환에 필요한 재숙련 교육 비용도 사측이 부담할 수 있도록 협의하였다.
독일 이외에도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이처럼 풍력 산업으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사례가 여러 관찰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국제 경쟁 속에서 한 지역의 조선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업의 설비와 숙련을 이용하여 새로운 산업으로 전환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환의 방향은 에너지 위기와 기후 변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풍력 산업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한진중공업에서 벌어지는 파렴치한 일들이 해결되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무사히 내려오면, 우리 사회가 함께 논의해야 할 일이 있다.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국내 조선업의 전환을 통해서,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더 괜찮은 일자리(비정규직이 아닌!)를 많이 만들어 내기 위한 대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길이 에너지 위기와 기후 변화의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확대하는 쪽으로 구조적인 방향 전환이 가능한 것이라면 훨씬 더 옳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횡포를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노동 운동, 사회 운동의 힘과 함께, 제도적 차원의 규제책과 이를 실현할 정치적 권력이 필요한 일이다. 독일의 사례가 우리나라에서 쉽게 재현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영도조선소를 축소 폐쇄하고 필리핀으로 사업장을 옮긴다고 해도 자본은 별다른 손해가 없겠지만, 부산의 노동자와 지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을 녹색 경제로 동참시켜 부산 지역, 나아가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한 전환을 도모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의 녹색 전환을 위해서라도 자본을 규제하고 한진중공업 투쟁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부산의 주요 산업인 조선업과 이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지역 경제의 지속 가능성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국내 풍력 산업을 확대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85호 크레인에 올라선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달렸던 희망 버스는 녹색 경제의 새 지평을 여는 논의를 위해서도 다시 달려야 한다. 그 버스에는 노동 운동가와 환경 운동가들이 함께 타고 있을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