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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교수', '페북 스타'된 비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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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거지 교수', '페북 스타'된 비법은?

[프레시안 books] 최준영의 <유쾌한 420자 인문학>

420자. 200자 원고지 '2.1매'다. 신문으로 치면 육하원칙 기본 요소와 멘트 몇 줄 정도 들어갈 단신 사이즈, 잡지로 치면 책 한 권이나 CD 한 장 정도 소개하고 끝날 사이즈다. <프레시안> 같은 매체라면 한 편의 기사로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을, 이토록 바이트(byte)가 넘쳐나는 시대엔 답답하고 아쉬울 수도 있을 만큼 작은 지면.

신문의 짧은 칼럼도 5~7매를 차지하거늘, 2.1매짜리 칼럼이라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노숙인 쉼터나 감옥 등 소외된 곳에서 강연하는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 최준영이 쓴 <유쾌한 420자 인문학>(이룸나무 펴냄) 얘기다.

여기서 420자는 대표적인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인 '페이스북'이 제공하는 담벼락 서비스의 제한된 글자 수다. 최준영은 3000여 명의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는 자신의 페이스북(☞바로 가기)에 매일같이 '420자 칼럼'을 올렸다. 많은 종이 매체에서 '140자'짜리 논평인 트위터를 지면 한 곳에 콘텐츠로 활용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 현상이 단행본 출판으로까지 연결된 사례다. 얼마 전 출판기획자 이건범이 <내 청춘의 감옥>(상상너머 펴냄)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단초로 하여 펴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본격적인 '페이스북 콘텐츠'는 처음이다.

▲ <유쾌한 420자 인문학>(최준영 지음, 이룸나무 펴냄). ⓒ이룸나무
책에 실린 칼럼의 소재나 주제는 주로 그가 읽은 책들과 그날그날 화제가 되었던 정치·사회 이슈들, 그리고 직접 경험한 일상의 단면들이다. "인문학은 사랑이다", "인문학은 관계다"와 같은 인문학을 주제로 한 시리즈 칼럼들도 눈에 띈다. "최준영의 생각 노트"라는 이름으로 묶인 약 30여 편은 페이스북에서 글자 수 제한이 없는 '노트'에 실렸던 글이기에 본격 서평, 영화평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내용은 어떨까? 짧다고 무시할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짧기에 '촌철살인'의 미덕과 여운이 살아난다. 칼럼은 독자에게 주제로 삼은 세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면서, 그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을 덧붙여야 한다. 게다가 묘사하고자 하는 상황과 연결시킬 과거의 일화나 인용구가 없으면 맛이 제대로 안 산다. 글자 수 제한이 엄할수록 이 모든 게 엉키기 십상이다. 최준영의 칼럼은 솜씨 좋게도, 이런 장애를 시적인 압축과 튼튼한 단문으로 극복해 낸다.

가령 "인문학은 '연대'다"라는 칼럼(107쪽)을 보자. 글은 "지난 6월 11일 토요일, 전국 각지의 '희망 버스'가 한진중공업에 도착했다"로 시작한다. 사측의 일방적인 해고에 반발해 농성 중인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지지 방문하기 위한 '희망 버스'에 그 역시 올랐는데, 이 경험에 대한 회고를 420자 안에 담은 것이다.

이 체험이, "인문학은 '연대'다"라는 자못 거창한 제목에 어떻게 부합될까. 칼럼 마지막 문단이 압권이다.

"'위로는 우산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신영복 선생의 글을 떠올릴 무렵, 깊어가던 어둠이 어느새 저만치 물러서고 희망의 신새벽이 밝아왔다."

인용구와 본인의 체험, 은유적인 메시지가 촘촘히 엮여 있을 뿐 아니라 읽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한편, 책에는 칼럼에 달렸던 댓글도 그대로 실려 있는데, 이 짧은 댓글들이 420자 안에 미처 담지 못한 통찰까지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삼성과 애플, 왜 다를까?"란 칼럼(49쪽)에서 최준영은 "삼성은 시장의 최고를 지향하지만 애플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 지배한다"며 "지금까지는 애플의 완승이다. 삼성의 분발을 촉구한다"고 썼다.

그러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전 삼성이 분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분발을 하느라 얼마나 노동자들을 힘들게 할까요?" 이렇게 타인의 감상과 지적도 함께 편집하면서, 이 책은 좀 더 인터랙티브한 태를 갖추었다.

3000여 명. 최준영의 페이스북 친구 숫자라고 한다. '10만 팔로워'도 흔한 트위터에 비하면 적은 숫자지만, 서로 마주 봐야 '친구'가 되고 좁고 촘촘하게 연결되는 특징을 지닌 페이스북의 경우, 숫자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얼마나 그의 '담벼락'에 자주 오고 싶어지느냐가 관건이다. 매일 아침(무리를 한 날엔 오후에라도) 글을 올리며 친구들과의 약속을 부지런히 지켜왔기에, 또 좋은 책과 영화를 소개해 주는 실용적인 역할도 수행했기에 여러모로 최준영은 '페이스북 산문집' 1호 주자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다만 SNS의 콘텐츠를 거의 그대로 길어다 책으로 묶는 기획이 앞으로도 의미를 가지게 될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 역시 '책'이란 형태가 됨으로 인해 갖는 여러 단점들이 눈에 띈다. 먼저 글 자체에서 더러는 문단과 문단의 이음새가 덜컥거리기도 하고, 더러는 주장하려는 바가 억지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정치인들의 행보를, 그날의 1면 기사를 비판하는 글은 대체로 책으로 건져 올리니 시들한 느낌을 피해갈 수 없다. 매일 갱신하는, 그것도 매우 제한된 글자 수를 지켜야 하는 칼럼이기에 생기는 한계다. 요즘 그 어느 문장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 트위터 상의 아포리즘이 한편으론 비난 받기도 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런 한계를 가진 글들이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결국 가치를 좌우하는 건 뚜렷한 콘셉트나 저자 자체의 매력, 그리고 '양'일 것이다. <유쾌한 420자 인문학>은 회사 휴식 시간에 한 편씩 뽑아 읽기 좋을만한 넉넉한 '양'을 갖고 있고, '거지 교수'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소외된 사람들을 향하는 저자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지만, 끌릴 만한 주제의식까지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도 얼마든지 발랄하고, 짧게 읽고, 편안하게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소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서문의 의도는 책을 덮을 때까지 잘 와 닿지 않는다. 신문 칼럼을 묶었다든지 일기에 가까운 에세이를 쓴 것이더라도, 책이란 형태에서 기대하게 하는 '출간 의도'가 잘 보이지 않았던 탓일까. 물론 <유쾌한 420자 인문학>은 세간에 깔린 불성실한 경구 모음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좀 더 정교한 가공이나 기획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러저러 해도 최준영은 '믿을 만한 필자'가 틀림없기에 앞으로의 작업에도 기대를 걸게 된다. 그는 대학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는 교수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 여러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직접 찾아 나서는 역동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노숙인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하고, 그들의 재활을 돕는 잡지 <빅 이슈>에 관여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자연과인문 펴냄)란 제목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유쾌한 420자 인문학>을 통해, 혹은 기자의 서평을 통해서도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최준영의 소신과 바람까지 독자들에게 권할 계제는 아니다.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이나 인생관에 관한 감동이 밀려오는 그런 종류는 아니다. 다만 글을 써 본 이라면 이러한 '교훈'은 확실히 남을 것 같다.

"분명하게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독자가 모이지만, 모호하게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비평가만 몰려들 뿐이다."

최준영이 어느 칼럼에서 인용한 카뮈의 말이다. 직접 이 책을 읽고, 가장 충실한 독자인 '페이스북 친구'들이 몰려든, 그 짧고 분명한 420자의 향연을 확인하시라. 짧지만 강렬하게 말을 거는, SNS 소통의 지침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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