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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순女와 똘똘女가 전하는 '코믹 괴기 컬트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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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순女와 똘똘女가 전하는 '코믹 괴기 컬트쇼'

[김용언의 '잠 도둑']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시오리와 시미코>

2002년 여름, 신촌 만화방을 찾아갔다. 어느 잡지에선가 소개 글을 읽은 만화책이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만화방에 들어선 순간 난감해졌다. 아까 전까지 입 안에서 계속 굴리고 있던 만화책의 제목이 당최 기억나질 않았다.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각오를 하고 점원을 붙들었다.

"저기, 어떤 만화를 찾고 있는데요. 죄송하지만 제목을 모르겠어요. 제목이 '뭐와 뭐의 뭐뭐뭐' 같았는데…." 점원은 멍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2002년 6월에 개봉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그림이 좀 이상하고 두 여자애가 귀신 만나는 얘기라던데." "아아, 그 책 저쪽에 있어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시오리와 시미코>(전6권, 시공사 펴냄) 시리즈를 처음 읽은 날이었다.

"시미코? 오늘 왠지 이상한 일이 있어서 말야…."
"뭔데? 이상한 일이야 늘 일어나잖아."
"하지만 보통 때는 애완동물을 데리고 하늘을 난다거나 잘린 목을 줍는다거나 하는 거라 비교적 알기 쉽잖아. 흔한 일이고…."
"흔하진 않아."
"그런가? 아무튼 이번 일은 좀 사태 파악이 안 돼서." (에피소드 <성가신 침입자>)


"오늘은 아침부터 굉장한 안개였어. 안개가 신기해서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나섰더니 늘 봐왔던 낯익은 근처 풍경이 마치 전혀 모르는 거리처럼 보이는 거야. 안개로 흐려진 시내가 재미있어서 조금씩 조금씩 발을 옮기고 있는 새 이노아타마 공원까지 가버렸지."
"아가씨, 이런 실례…. 놀라게 했나? 하지만 이런 안개 짙은 날에 밖에 나다니는 건 그만두는 게 좋아. 안개가 짙은 날은 주변이 보이지 않게 되지. 그만큼 자신의 마음이 보이게 돼버리거든." (<에피소드 <파란 말>)


"나는 지금 우리 집 안에서 곤란에 처해 있습니다. 집 안에서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부엌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편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하여간에 일일이 벽장과 정원과 아빠의 서재를 지나지 않으면 화장실에도 갈 수 없으니까요. 내 방으로 가려면 베란다의 좌측 두 번째 유리문을 열고 1층 복도와 현관과 침실 옷장을 지나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에피소드 <라비린스>)


▲ <시오리와 시미코의 파란 말>(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김항이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이 마을에 가보고 싶다. 길 중간에서 망설이면 큰 일 나는 '망설임 언덕'이 있고, 이런 책이 과연 팔릴까 싶은 기서들만 모여 있는 서점 '우론당'이 있고, 온갖 요괴가 노니는 '모모케 신사'와 '쿠비야마 성터'가 있고, 우주 저 멀리에서 날아온 거대한 여인과 결혼한 공포 소설가 '단 이치 선생'이 있고, 인간의 (살아 있는) 목이나 일본 전래의 영웅 '모모타로(복숭아 동자)'가 둥둥 떠내려가는 강이 있는 이노아타마 마을.

조금 주의할 필요는 있다. 하룻밤 사이에 못 보던 가게가 느닷없이 생겼다면, 혹은 있던 집이 사라지고 공터가 생겼다면, 다 죽은 줄 알았던 늙은 거목에 갑자기 벚꽃이 무더기로 피어난다면 일단 피하고 볼 일이다. 하지만 '신경이 몇 가닥 빠져있는' 여고생 시오리와 어떤 일이 있어도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하는 셜록 홈즈 타입의 여고생 시미코 콤비는 이노아타마 마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각종 미스터리를 척척 해결한다.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생머리를 늘어뜨린 시오리와 머리를 총총 땋아 내리고 안경 너머로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시미코는 영락없이 소녀 명랑 만화 속 단짝 친구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또래 남학생이나 아이돌 스타가 아니라 도시 괴담과 일본의 곳곳에 널린 귀신 잡학과 전설에 대한 방대한 지식의 체계다.

2008년에 모로호시 다이지로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어떻게 이런 설정을 생각해냈나'에 관한 긴 질문을 했다가 "처음부터 여고생이라는 설정으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묘한 이야기나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옛날부터 좋아했습니다"라는 (귀찮아하는 듯한) 대답 앞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게 정답이었다. 괴담을 한순간의 스릴을 위한 도구로 소비하는 건 너무 쉽다. 하지만 그 설정을 조금만 비틀어서, "신경이 몇 가닥 빠져있는" 소녀들이 그 안을 비집고 들어감으로써 이 괴담들의 명도는 그만큼 투명해지고 채도는 그만큼 올라간다.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들려주는 괴담은, 장담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굳이 떠올린다면 뛰어난 미스터리 작가인 동시에 요괴 연구가인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성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 정도일 것이다.

무엇보다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의 가장 큰 매혹이라면 책에 관한 집착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죽어서도 책을 놓지 못해 '우론당' 서점을 찾아와 몇 시간이고 책을 붙드는 사내, 책을 읽다 살해당한 여인이 그 책의 뒷부분을 자신이 살해당하는 풍경으로 바꿔버려 기어이 범인을 잡아내는 이야기, 고약한 요괴 '북 피쉬'가 헌 책방에 숨어들어 자신을 펼쳐드는 인간을 집어삼키는 이야기.

그 중에서도 독서광이라면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박차고 튀어나올 만치 이해할 수 있는 에피소드 '헌책 지옥 저택'은 무조건 추천이다. '헌책 지옥 저택'에 들어섰다가 도저히 그곳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10년 넘게 그 안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책을 뒤지는 자들의 유령 같은 모습이라니!

그곳은 "나는 모은 책의 무게에 집이 무너져 그 아래 깔려 죽었다" "나도 언젠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며 읽지 않는 책을 몇 천 권이나 모았다" "이곳엔 너희들이 미치도록 갖고 싶어 하는 책들이 묻혀 있다. 찾아봐라!"라고 외쳐대는 헌책 마니아의 원령들이 만들어낸 '바벨의 도서관' 지옥 버전이다.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을 꿈꿨을 때는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이며 인류에게 긍정적인 버전의 세계였겠으나, 천국과 지옥 사이의 경계는 그리 넓지 않다. 한발자국만 뗀다면, 모로호시의 필터만 거치고 나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 된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장점이라면 이처럼 무시무시한 도시 괴담과 요괴담을 쉼 없이 지껄이면서 그 안에서 태연자약한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것. <이블 데드> 시리즈나 <드래그 미 투 헬> 등의 샘 레이미 영화를 볼 때처럼,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다가도 그 비명이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뒤바뀌는 순간의 난감함이 '시오리와 시미코 ' 시리즈를 읽을 때 그대로 되풀이된다.

그러니까 1권까진 좀 무섭다가,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완벽하게 허허실실 유머로 점철된다. 이런 식이다.

모모케 신사를 감싸고 있는 불 형태의 결계(結界)들이 "나는 결계입니다" "저기, 결계라니까요" "앗, 들어오시면 안돼요"라고 외치지만, 시오리와 시미코는 "실례, 바빠서…"라며 결계들을 슥 들어 올리고 신사로 향한다. 100개의 촛불을 하나씩 끌 때마다 괴담을 주고받으면 100번째 촛불이 꺼질 때 요괴가 나타난다고 한다. 시오리와 시미코와 그 마을 요괴들이 모여 앉아서 100번째 촛불을 끈다음 "요괴가 나올까? 나올까?" 하고 두근거리다가 불현듯 깨닫는다. 우리가 요괴잖아?

학교를 졸업하고 4년 동안 도쿄전기연구소와 도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지각이 많고 일이 싫어졌기 때문"에 그만두고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희한한 작가 모로호시 다이지로. 1970년대부터 만화를 그려온 그의 작품 세계를 총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의 작품들이 한국에 많이 번역되어 있진 않다.

아쉽게나마 시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제괴지이> 시리즈와 <사가판 어류도감>, <사가판 조류도감>이 있다.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와 함께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괴기스런 밤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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