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영은(27·가명) 씨는 이번 설 연휴에 기자가 포기한 '김훈 식 휴가 법'을 즐길 예정이다. 공식 연휴 전후까지 포함해 '토일월화수목금토일' 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장소는 집. 부모님이 제주도 여행을 떠나기에 자연스레 집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됐다.
▲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
이번 설 연휴는 최소 5일, 최대 9일이다. 모처럼 긴 휴가를 얻은 직장인은 저마다 연휴 계획을 짜느라 분주하다. 휴가가 이렇게 길 줄 몰랐다며 미리 해외여행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이부터, 어차피 "가족에게 반납"이라며 푸념하는 이들까지 어두운 반응도 만만찮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특별하진 않아도 알찬 연휴를 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책이 있다.
물론 김 씨와 같은 휴가 계획은 드물다. 북 칼럼니스트 김성희 씨처럼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연휴 때는 잠시 손에서 책을 놓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가족들 얼굴만 보고 있자니 지루하고, 나가 놀자니 날씨 걱정부터 앞서는 이들에게 좀 더 현실적인 연휴 맞춤형 독서 방법을 제안한다.
연휴의 시작은 책 쇼핑으로
책을 고르는 게 먼저다. 책벌레로 유명한 철학 교사 안광복 씨는 "연휴 첫날 무조건 북 쇼핑을 간다"고 말했다. 먼저 보고 싶은 책을 잔뜩 쌓아두면 저절로 그때그때 손이 간다는 것이다. 보통 연휴를 3~7일로 잡고 묵직한 인문 책 2권, 소설 책 1권, 역사 책 1권 정도를 준비한다.
본격적인 연휴보다 조금 앞선 26일 시내의 한 대형 서점을 찾은 안광복 씨는 <야성적 충동>(로버트 쉴러·조지 애커로프 지음, 김태훈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과 <나는 왜 쓰는가>(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사 펴냄) 그리고 소설 몇 권을 연휴에 읽을 책 목록에 올렸다.
지방 연구소에 있는 최준일(28) 씨도 최근 구입한 신간을 읽을 예정이다. 연휴 일정은 "반은 고향(전주)에 내려가고, 반은 서울에서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으로 간단하다. 대신 일정 내내 한윤형의 <안티조선운동사>(텍스트 펴냄), 낸시 프레이저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그린비 펴냄),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후마니타스 펴냄) 세 권을 대동한다. 고향에서 지루할 때나 서울에 와 친구들과 약속이 어긋날 때 펴들어 완독할 계획이다.
관심 가는 책을 정해두지 못했다면 인터넷 서점 교보문고의 설맞이 특선 세일을 둘러봐도 좋겠다. 지갑 여는 것을 주춤하게 했던 전집류를 30%쯤 할인된 가격으로 내놓았다. 박경리의 <토지>(전 21권, 나남 펴냄), 풀빛에서 나온 '청소년 철학 창고'(전 25권) 등을 30~40% 할인된 가격으로 만날 수 있다.
'얇은 책, 다용도 책, 이미 읽은 책'
고향 내려가는 길이 멀다면, 특히 돌아오는 길 부모님이 챙겨주는 반찬으로 짐이 늘어날 것 같다면 출발할 때 욕심을 버리는 것이 좋다. 책의 부피가 작다고 그 울림마저 적은 것은 아니다. 책세상 문고, 민음 지식의 정원 시리즈, 한겨레 지식문고 등 손 안에 쏙 들어가는 문고는 무게 걱정과 부담 없이 가져갈 만하다.
문고의 장점은 크기와 부피, 싼 가격뿐만이 아니다. 소설가 장정일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마티 펴냄)에서 "본문이 끝나고 판권란 뒤에 붙어 있는 장대하고 찬란한 도서 목록은 그야말로 포만감과 도전욕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며 문고의 장점을 추가했다. 연휴에 틈틈이 문고를 읽고, 돌아와서 책 뒤 도서 목록을 깊게 파 보는 것도 좋겠다.
▲ <심야 식당>(아베 야로 지음, 미우 펴냄). ⓒ미우 |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는 '메인' 계획 외에 중간 중간 틈날 때마다 책을 펼치겠다는 '서브' 계획을 갖고 있는 교사 김승희 씨는 과거에 한 번 읽은 책을 집어 들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이동렬 옮김, 민음사 펴냄)이다. 김 씨는 "중학교 때 읽었지만 주인공 이름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며 "동료 선생님들과 청소년 추천 고전 도서를 우리도 좀 읽어보자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자투리 시간 확보하기
이번 연휴는 길어서 대부분 김 씨처럼 가족 방문(여행)과 혼자 있는 시간을 적절히 배분한다. 하지만 완전히 분리할 필요는 없다. 많은 이들이 평소에도 출퇴근 길, 업무 휴식 시간을 쪼개 독서하듯 귀성길이나 친척 집에서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
이번 설 연휴 가장 유용한 기기로 스마트폰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만큼, 무료함의 대명사 귀성길에도 스마트폰과 트위터가 '심심풀이 땅콩'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책 역시 무료함을 달래기에 적절하다. 자가용·버스 이동 시 흔들림과 어둠이 걱정된다면 휴대용 책 받침대와 북 라이트가 도움이 된다. 휴대용 받침대와 LED 북 라이트는 5000원 대부터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가족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도 틈틈이 독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5일 연휴에 멀진 않지만 친가와 처가를 모두 방문해야 한다는 금융 계열 연구원 박진성 씨는 "가족들 모이기 전 오전 시간, 잠들기 전 시간, 사람들이 음식 준비하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에도 출퇴근 길, 회사 점심시간을 활용하는 자투리 시간 마니아다.
최준일 씨는 "아무래도 사람들과의 시간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가족들의) 시선을 의식하면 우월감에 독서가 더 잘 된다든지 하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명절에 다들 잠을 많이 주무셔서 자연스레 독서 시간이 확보된다"고 덧붙였다.
세뱃돈·선물 대신 책
여럿이 모여 있을 때 혼자 책 싸들고 있기 민망하다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된다. 명절 선물로 한우나 과일 세트가 아니라 책 한보따리를 싸 가면 어떨까. 얼마 전 국회에서는 한나라당 정두언 최고위원이 책세상에서 나온 문고판 <복지국가>(정원오 지음), <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장귀연 지음)을 지인들에게 설 선물로 배송해 눈길을 끌었다.
한나라당 의원이 신자유주의 노동 정책을 비판한 책을 선택했다는 데에서 '정치적인 화제'가 됐지만, 책 선물 그 자체엔 굳이 물음표를 갖다 댈 필요 없이 독려할 만하다. 그에 앞서 3년 전부터 명절이면 반드시 책 선물을 해 왔다는 정치인이 있다. 도서관발전재단 이사장이기도 한 신기남 전 민주당 의원이다. 그는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 많으면 3~40명에게까지 책을 선물해 왔으며 '책으로 선물 보내기 모임'(가칭) 회원까지 모집 중이다.
▲ <콜디스트 윈터 :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옮김, 살림 펴냄). ⓒ살림 |
조카들에게 세뱃돈 대신 책을 주는 이모, 고모, 삼촌도 늘고 있다. 블로그 '책으로 훅가기'를 운영하고 있는 직장인 계소영 씨는 2명의 조카에게 지난해 세뱃돈 대신 <틀려도 괜찮아>(마키타 신지 지음, 유문조 옮김, 토토북 펴냄)와 <100층짜리 집>(이와이 도시오 지음, 김숙 옮김, 북뱅크 펴냄)을 선물해 줬다.
계 씨는 "1년에 두세 번 밖에 조카를 만나지 못하는데, 아이들을 옆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면 함께 이야기할 시간도 생기고 더 친해진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아이들도 좋아하니 올 설에는 2권씩 선물할 예정이다. 목록은 <100원이 작다고?>와 <나, 오늘 일기 뭐 써!>, <책 먹는 여우>와 <쳇! 어떻게 알았지?> 등이다.
밥 한 술, 책 한 술
떡국, 한과, 부침 등 명절 음식은 고단백, 고지방, 고칼로리식이라 다이어트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골칫거리다. 평소보다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이 잔뜩 나오는데다가 권유하면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배탈, 소화불량도 잘 생긴다. 추운 날씨에 야외 활동도 줄어드니 까딱하단 연휴가 그저 '먹고, 자고, 찌기'가 되어버릴 가능성도 높다.
식탁 앞 시간을 10분 줄이고 '맛있는 책'으로 포만감을 채워 보자. 술자리가 몰아쳐 다이어트에 적신호가 켜지는 연말마다 많은 언론에서 '수다'를 최고 해결책으로 제시하듯, 설음식 먹고 '썰'을 풀어 본다면 어떨까. 취직은 언제, 결혼은 언제 하느냐는 불편한 대화 대신 설상에 오르는 음식들에 대해 몇 마디 곁들인다면 소화가 더 잘 될지도 모를 일이다.
박진성 씨가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레디앙 펴냄), 경영서인 <스마트 워킹>(마르쿠스 알베르스 지음, 김영민 옮김, 비즈니스맵 펴냄)과 함께 <텃밭 속에 숨은 약초>(김형찬 지음, 그물코 펴냄)를 설에 읽을 책으로 정한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이 책은 젊은 한의사인 저자가 고향집 텃밭에서 기르는 양파, 두릅, 당근 등 일상적인 채소들의 질병 치료 능력을 다룬 생활 한의학서다. 박 씨는 "설 차례 상에 올라오는 나물이나 야채의 효능이 궁금했는데, 그래서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식전>(장인용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
먹거리를 묘사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시인 백석도 빼놓을 수 없다. 명절 풍경을 묘사한 시 '여우난 곬족'은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를 거쳐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로 우리를 안내한다. 소래섭의 <백석의 맛>(프로네시스 펴냄)은 백석 시에 등장하는 토속적 음식들의 의미와 미각의 경험을 톺아보는 책이다.
책도 레저다?
아무리 그래도 '연휴 때 웬 독서인가' 싶다면 책을 대체할 만한 TV 시청, 책을 만날 수 있는 나들이는 어떨까. 먼저 '방구석 족'에겐 책 읽어주는 영상을 권한다. 지난해 베스트셀러에서 올해 1월 교육방송(EBS)의 <정의>로 열풍을 이어갔던 마이클 샌델의 강연이 이달 말 DVD로 출시된다. 강연은 첫 방송부터 EBS 심야 프로로는 이례적인 시청률(0.90%)을 보이며 인기를 끌었고 책보다 생생하고 좋다는 호평이 많았다.
주말을 고비로 한파가 누그러져 설 연휴엔 외출하기 한결 나아질 전망이다. 설 연휴 뒤 보너스처럼 붙은 주말(5, 6일)엔 교외로 나가보자. 책을 테마로 한 장소로 '북하우스'(☞바로 가기)가 적합할 듯하다.
파주 출판단지에서 차로 10분 걸리는 문화예술 마을 헤이리에 위치한 북하우스는 출판사 한길사(대표 김언호)가 운영하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아름다운 건물에 서점은 물론 레스토랑('포레스타'), 갤러리, 공연장, 북 카페('윌리엄 모리스') 등을 갖추고 있다. 갤러리에서는 지난해 말 출간된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를 기념하는 기획전이 2월 28일까지 열리고 있으니 놓치지 말자. 설 휴무일은 2일과 3일이다.
▲ 북하우스 책방 전경 ⓒ북하우스 |
말 그대로 책과 '노는' 독특한 행사도 있다. 책이 글자투성이의 지루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 주는 '책과 놀이하다-Playing Book'전(展)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환기미술관의 공동 프로젝트로, 지난해 10월부터 진행돼 온 'BOOKBOOK-책과의 소통에 관한 4가지 제안'의 세 번째에 해당한다.
소설가 이상의 글 속에 잠재된 디지털적 요소를 인터랙티브 영상으로 설치한 '익명의 서사시_이상'(정영훈 작), 가상 인물인 '김 서방'과 함께 도서관 자리 맡기 기술 등을 배워보는 퍼포먼스·영상설치 '도서관에서 김 서방 찾기'(이재환 작) 등 책을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체험적 전시로 채워져 있다.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전시실에서 2월 24일까지 볼 수 있다. 월요일·설 연휴(2~4일)엔 열지 않으니 5, 6일에 찾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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