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뱅이의 역습>(김경원 옮김, 이루 펴냄)에서 '길거리에서 꽁치 굽기', '아무 소리나 질러대기 위한 선거 입후보' 등 기상천외한 저항 방법을 소개한 빈민운동가 마쓰모토 하지메(36)였다. 말이 빈민운동가지 그의 본업은 도쿄 고엔지(高円寺)에 위치한 재활용가게 '아마추어의 반란' 5호점 점장이다. 그의 숱한 이력은 '부자 타도' 한 마디로 요약하기로 하자.
하도 시끄러운 일을 벌여온 터라 일본에서는 동네 경찰서에서 하루 이틀 신세도 졌었다. 하지만 웬 한국 입국 거부? 이런 코미디 같은 사건의 배후에는 '음식물 쓰레기 내놓을 때도 나라의 격을 되돌아봐야 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가 있었다. 'G20정상회의경호안전을위한특별법'의 일환으로, 별의 별 사람이 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이다.
▲ <가난뱅이 난장쇼>(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이순 펴냄). ⓒ이순 |
지난해 12월 말 마쓰모토가 새 책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힘을 발휘하는지 시험 삼아서 왔다는데, 다행히 그 리스트는 명을 달리한 모양이다.
하필 맹추위가 기승을 부린 크리스마스 연휴에 달랑 얇은 재킷 하나 입고 왔지만,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도 얼어 죽지는 않았단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앞 농성 건물인 '두리반'과 해방촌에 있는 공동생활 공간 '빈 집' 등 서울에도 '아마추어의 반란' 같은 가난뱅이 집결지가 적지 않아서다.
마쓰모토와 12월 26일 서울 용산구 용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그와는 지난해 4월 처음 만나, 밴드 '밤섬해적단'과 함께 고엔지를 찾았을 때 신세를 지고 블랙리스트 사건을 기사화하기도 하는 등 인연이 적지 않았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간 노느라 못했던 진지한 얘기들까지 한 번 꺼내봤다.
▲ 2010년 10월 입국을 거부당해 일본으로 돌아간 마쓰모토 하지메가 자신의 가게에서 '안부 인증용'으로 찍은 사진. ⓒameblo.jp/tsukiji14 |
이명박 정부 선정 '블랙리스트'의 기습 강림
프레시안 : 이번에 한국에는 왜 왔어?
마쓰모토 : 목적이… 없어! 지난 9월 말에 오려고 했더니 블랙리스트에 들어가 있다면서 쫓아냈잖아. '혹시 한국에 다신 올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그건 곤란한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번에 규슈의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이벤트에 초대되어서 남쪽으로 오게 됐는데, 규슈는 부산에서 가깝잖아?
배로 한 번 가볼까 싶어서 시험 삼아 와 봤어. 이번엔 들여보내 주데. 그러니 며칠 머물러도 될 것 같아서 놀고 있는 중이야. 어떤 일정도 없었어.
프레시안 : 일정은 없었지만 여러 곳에서 환영받았지?
마쓰모토 : 응. 좋았지. 24일 밤에는 두리반 투쟁 1주년 행사인 '두리반 365, 막개발을 멈춰라'에서 밤새 놀았고 25일엔 <가난뱅이 난장쇼>를 펴낸 출판사에서 마련한 독자와의 번개 모임에 갔어. 오늘은 여기('빈 집'이 운영하는 카페 '빈 가게') 사람들이 주재하는 마을 회의를 구경하기로 했어.
프레시안 : 그런데 왜 블랙리스트에 오른 걸까? 그 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
마쓰모토 : 아무래도 G20 정상 회의 때문이겠지. 그게 끝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단 하나, 지금 이명박 정부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대기로 유명하잖아. '이거~ 아주 못 오게 되는 거 아냐?' 하는 걱정도 했지.
프레시안 : 마쓰모토 씨만 믿고 온 밴드 '펑크 록커 노동조합' 멤버들은 얼마나 당황했겠어. 휴대전화 로밍도 안 해 왔지, 한국어는커녕 영어도 못하지. 그런데 당신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못 오게 됐다니까 별로 걱정도 안 하데…. 인천공항에서 아주 재밌었다며?
마쓰모토 : 응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들어앉아서 호기롭게 구는 중국인 아저씨도 있었고, 여자애와 깔깔대며 작업을 거는 인도인 아저씨도 있었지. 다음날 아침엔 웬 젊은 공무원 한 명이 "오늘 아침 TV에 나왔어!"라며 말을 붙이기에 <가난뱅이의 역습>을 선물해주기도 했어. 기념 촬영까지 했더니 고엔지에 오면 우리 가게('아마추어의 반란')에 온다더라고.
▲ 마쓰모토 하지메. ⓒ프레시안(안은별) |
만국의 가난뱅이들이여, 단결하라!
프레시안 : 한국에서 마쓰모토 씨의 두 번째 책 <가난뱅이 난장쇼>가 나왔어. 그 책 얘기 좀 해볼까?
마쓰모토 : 이 책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온 거야. 왜냐하면 여기 실린 글들은 <매거진9>라는 일본의 웹진(☞바로 가기)에 연재했던 거거든. 일본에선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거니까 아무도 안사지. 어쨌든 이 연재물을 한국에서 책으로 내자는 얘기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마침 입국 거부 사건이 터진 거야. 딱 기회다 싶었지.
<가난뱅이의 역습>과 비교하면 이번 책이 좀 더 구체적이야. <가난뱅이의 역습>은 '이런 일을 해보니 재밌더라' 하는 지침서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최근 2년간 벌어진 재밌는 일들을 전달자로서 소개했지. 이 책을 보면 일본의 얼치기들이 어떤 느낌으로 노는지 알 수 있을 거야.
프레시안 : 어떻게 노는지 썼을 뿐인데 외국에서 독자 팬 미팅까지 하다니 대단한 거 아니야? 한국에서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아졌을까?
마쓰모토 : 그러게? 일본에서보다 유명할지도 몰라. 뭐, 환영받으면 나야 좋지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딜 가나 비슷한 놈들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세상 어딜 가도 나와 똑같은 짓을 하는 녀석들이 있더라고! 가난뱅이들을 모으고, 그들만의 장소를 만드는 일 말이야.
그래서 내가 하는 공간 '아마추어의 반란'이 프랑스 잡지에 소개된다든지, 미심쩍은 독일인들이 나를 베를린으로 초대한다든지 하는 일들도 있었지. 전 세계 어딜 가도 얼치기들이 꿋꿋하게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굉장히 안심이 되더라고. 역시 우리가 하는 일이 옳다는 걸 확인하게 돼.
프레시안 : 그러고 보니 지난 10~11월에 한 달이나 프랑스, 독일, 벨기에 투어를 했지? 고엔지에서 스무 명이 넘는 대 인원이 출동했다며? 재밌었던 일 소개 좀 해 줘.
마쓰모토 : <매거진9> 연재에서 이 책에 마지막으로 실린 글 바로 다음에 그 얘길 썼어. 번역이 안 되어 있으니 소개해 주도록 하지! 역시 가난뱅이들이 모일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이야기가 가장 재밌는데, 유럽에선 그게 참 제대로 되고 있어. 걔네는 한 마디로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데 도가 텄어! 신축 슈퍼마켓을 스쿼팅(Squatting, 무단 점유)하기도 하더라고.
뭐가 굉장했냐면, 한 장소를 점유한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늘 새로운 장소를 찾아 나선다는 점이야. 이미 자신들의 아지트가 된 어떤 장소를 방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쪽에서 먼저 공격도 하는 거지. 아지트 하나가 생겼다고 그걸 지키는 데 머물면 '가난뱅이의 역습'이 안 된다는 거야. 계속해서 다음, 다음 스쿼팅을 하는 거지.
요즘 유럽에서 스쿼팅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던데 그건 장소를 만드는 속도에 비해 장소가 사라지는 속도가 좀 더 빠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지, 그 자체는 안 줄었대.
이상한 마을, 고엔지
프레시안 : 그런데 마쓰모토 씨, 일본에선 어떤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마쓰모토 : 한국에 알려진 대로, 젊은이들을 규합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인간들의 리더 격인 사람이겠지. 그밖에도 일본에선 나를 '마치오코시(町おこし, 마을 살리기 운동)'로 알고 있는 사람도 꽤 돼. 망해가는 고엔지의 상점가를 왁자지껄하게 만든 탓이지. 발길 뜸해진 지방 상점가에서 꽤 연락을 해온다니까.
프레시안 : 말한 대로 고엔지는 정말 독특하고 재밌어. 재밌는 가게들도 많고, 아무렇게나 거리를 어슬렁거려도 사람들이 인사를 해 오니까. 고엔지에는 언제 어떻게 정착하게 됐어?
마쓰모토 : 고엔지에 살게 된 건 5년 전쯤부터야. 원래는 신주쿠에 살면서 재활용품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 대학 졸업 후에도 줄곧 시끄러운 일들을 벌여 왔는데, 딱히 사람들이 모일 장소가 없으니 주로 길거리 이벤트였어. 그러니 좀처럼 사람도 모이지 않고 준비하는 데 지치기도 해서 가게를 열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고엔지에 '아마추어의 반란' 1호점을 열었고, 매일 거기서 술을 마시다 보니 이사까지 하게 됐지.
왜 고엔지였냐고? 역시 중앙선 연선(沿線) 지역이 좋지.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고,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좋은 동네들이잖아. 도쿄를 가로지르는 중앙선(中央線, 츄오센)이 지나는 지역은 철도 발생 때부터 젊은 예술가들의 메카였거든. 거기서 왜 하필 고엔지였는가 하면, 그냥 우연이지! 술 얻어 마시러 놀러왔을 때 술친구가 좋은 매물이 있다더라고.
프레시안 : 지금 마쓰모토 씨가 점장 타이틀을 달고 있는 가게는 '아마추어의 반란' 5호점이잖아. 그럼 1호점은 어떻게 된 거야?
마쓰모토 : 1호점으로 사용하던 장소를 허물게 되면서 다른 장소로 이사했는데, 그 때 그냥 2호점이 되어버렸어. 그러니까 2호점은… 사기지. (웃음) 현재는 고엔지와 그 인근에 있는 '아마추어의 반란'만 18호점까지 있는데 실제로 운영 중인 가게는 10곳이야. 나머지 8곳은 없어지거나, 이사하면서 숫자를 바꾼 경우야. '아마추어의 반란'은 도쿄 말고도 전국에 퍼져 있는데 그건 따로 세. 교토 1호점, 교토 2호점 이런 식으로. 나도 전국에 '아마추어의 반란이 몇 개나 있는지 몰라. 원하는 사람 누구든 이 이름을 써서 가게를 열면 그만이거든.
프레시안 : <가난뱅이 난장쇼>에 이런 얘길 썼어. 중고품이란 단순히 물건을 소중히 여긴다는 차원에서 나아가 가까운 동네 경제를 뒷받침해준다고. 새 상품 매매는 광고에 돈을 퍼부은 기업에 고스란히 돈을 바치는 셈이지만, 중고품 매매는 마을 사람에게 사들이고 마을 사람에게 수리를 맡기고 마을 가게에서 팔리니 돈이 가게 근처에 머무른다는 얘기야. 극단적으로 위조화폐가 돌아도 꿈쩍 안 하는 경제가 됐다고 말했는데, 원래 그런 전복적인(?) 의도를 갖고 가게를 연 거야?
마쓰모토 : 그렇진 않아. 아무래도 일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거지. 물론 지역 통화나 자급자족적인 지역 경제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그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생각하고 벌인 일은 아니었어. 그런데 재활용 가게를 하다 보니 진짜로 돈이 다른 곳으로 안 빠져 나가고, 우리 동네 안에서 돈다는 걸 실감하게 되더라고! 이거 꽤 괜찮은 일이구나 싶었지.
프레시안 : 혹시 동네에 수상한 녀석들이 들어왔다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고엔지에 대형 백화점이 들어왔으면 하는 사람들, 구청 직원이나 경찰들하고 불화도 겪을 법한데.
마쓰모토 : 고엔지도 은근히 넓기 때문에 상점가마다 다 달라. 우리 가게가 위치한 기타나카(北中) 골목 사람들은 인적 뜸했던 곳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주니까 좋아하지. 물론 고엔지 전체적으로 보면 "저 놈들 뭐야", "흥! 눈에 띄는 짓 하기는!" 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렇지만 그들과도 고엔지 전체 마을 축제에서 만나면 '음, 적은 아니군!' 하는 느낌이랄까?
이래저래 다 한 다리 걸쳐 아는 사람들이니 마찰이 일어날 일은 전혀 없어. 가게 주변 상인들이 "쟤네들, 좀 시끄럽지만 나쁜 애들은 아니야!"라고 변호해준다더라고. 고마운 일이지. 다른 동네는 상인들끼리 별로 교류가 없대. 그런데 고엔지는 주민들부터 상인들까지 술을 엄청 마셔대니까 분위기가 좋아.
구청 쪽하고도 언제나 좋기만 한 건 아니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감정은 아니야. 경찰 중에서도 늘 불만투성이인 사람도 있고 사이좋은 사람도 있어. 데모가 뜸하면 오히려 그쪽에서 "요새 잘 지내? 좀 더 분발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걱정해 주는 경찰도 있어.
▲ 마쓰모토 하지메 패거리가 자주 '난장쇼'를 벌이는 도쿄 고엔지 역 북구 앞 광장. 2010년 7월 8일 밴드 '밤섬해적단'의 공연이 끝난 뒤 국적도 사는 지역도 다른 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모여 앉았다. ⓒwrech.cc/album/robin90 |
두리반과의 인연
프레시안 : 아마도 그 점이 고엔지가 홍대 앞과 다른 점 같아. 인디 뮤지션이나 예술가가 많이들 모이는 거리라고 흔히들 두 곳을 비교하지만, 홍대 앞은 몇몇 대형 건설사들이 지배했거든. 임대료가 너무 올라서 이제 영세 자영업자는 내쫓기는 판이야.
마쓰모토 : 고엔지도 마찬가지야. 처음 '아마추어의 반란'을 열었을 당시엔 정말 주변에 가게들이 하나도 없었어. '아마추어의 반란'을 시작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가게들이 점점 늘어났지. 그랬더니 이번엔 집주인들이 임대료를 올리기 시작하는 거야. 한 50%쯤 올랐을 거야. 10만 엔이었던 게 15만 엔이 된다든지.
프레시안 : 그 정도면 양호해. 홍대 앞은 몇 년 사이 임대료가 7~8배 오른 곳도 많아. 여기 문제는 영세 부동산 소유주가 아니라 대형 건설사거든. 땅을 다 사버리고 월세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을 내쫓는 거지. 그 중 하나가 두리반이야. 24일 두리반에 두 번째로 들렀는데 느낌이 어땠어?
마쓰모토 : 두리반에 처음 왔던 건 농성 100일째인 지난 3월 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두 번째 방문인 어제는 농성 1년째라더라. 처음 보고 '우와, 엄청나게 좋은 곳이구나!' 이렇게 외쳤어. 물론 재개발 때문에 위협을 받는 입장이니까 상황 그 자체를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이런 장소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공연도 하고 재밌는 일을 잔뜩 한다는 게 정말 놀라웠어. 이번에 오니 그런 문화가 쇠하기는커녕 더 사람들이 많아졌더라. 또 한 번 굉장하다고 느꼈지. 상황이 어렵다 보니 힘들거나 질리면 사람들이 떠나게 되잖아. 그런데 하나도 안 그렇더라고.
프레시안 : 마쓰모토 씨는 뭔가를 하려면 장소가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어. 그런데 한국은 방해 요소가 정말 많아. 서울은 어느 곳이나 땅값도 비싸고, 유럽에서처럼 아무 곳이나 스쿼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두리반도 사실 건설사 측으로부터 정당한 이주비를 지급받아 '없어지는' 것이 투쟁에서 승리하는 귀결이고. 이 사람들이 모일 장소를 잃게 될 것을 대비해, 모임을 이어갈 수 있는 팁을 알려준다면?
마쓰모토 : 역시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든 만들고자 하다 보면 다 되게 돼있어. 처음에는 데모를 신청한다든지 해서 길거리라도 좋으니 일시적인 장소를 몇 번이고 만들어야 해. 사람은 모이면 뭔가를 하잖아. 한 명이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면서 다음의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지지.
그렇지만 그걸 유지시켜야 하니까 모이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새로운 공간을 만들까 고민하는 수밖에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유럽을 돌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걔네들은 장난이 아니야. 5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모여 빌딩에 돌입해 3일을 버텨 그 곳을 뺏어버리기도 하거든. (웃음) 물론 그걸 한국이나 일본에서 하면 큰일 나겠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본도 임대료 문제를 피해갈 수 없긴 하지만, 작은 장소들이 굉장히 많아. 그래서 지금은 하나의 커다란 장소에서 뭐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작은 가게 여러 군데에서 합동으로 무가지를 만든다든지 해서 네트워킹을 강화해 나가고 있어. 서울만 해도 두리반뿐 아니라 '빈 집' 네트워크가 있잖아.
프레시안 : 그럼 일시적인 거점을 두고 활동했을 때와 고엔지의 여러 가게에서 활동하는 지금을 비교하면 뭐가 달라?
마쓰모토 : 사람이 모이는 방법이 전혀 다르지. 일시적 장소는 사람이 모이는 데에 한계가 있어. 처음에 노력해서 100명 정도를 모았다면 다음에 오는 사람은 10명이나 20명 정도야. 가게가 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냥 오는 사람도 꽤 많고, 일단 언제 방문해도 사람이 있으니까 부담 없이 올 수 있잖아. 그러니 친구 수가 굉장히 빨리 늘지.
책에서도 자주 언급된 무라카미 군(밴드 '펑크 록커 노동조합'의 보컬)도 처음엔 '아마추어의 반란'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아르바이트로 찾아 왔다가 합류해서 활약하는 케이스야. 도야마라는 시골 동네 출신인데, 상경해서 처음엔 도쿄가 엄청 지루했대. 그런데 '아마추어의 반란'에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데모에 나가면서 밴드도 결성했어.
2009년 중의원 선거 전날에 도야마에서 이벤트가 있어서 간 적이 있는데 이 때 걸작이었지. 이 녀석이 멋대로 양복을 쫙 빼입고 등장해서는 자기 이름을 쓴 어깨띠를 두르고 하얀 장갑을 끼고 트럭에 올라가서 있지도 않은 유세를 하는 거야.
"세금 전폐(전폐)! 노동 폐지! 모두에게 생활 보호! 여러분께 이 세 가지를 약속드립니다. 그런데 입후보는 안 했어용!" (<가난뱅이 난장쇼>, 118쪽)
이유 있는 난장쇼
프레시안 : 그런데 이 모든 행동의 이유를 묻자. 왜 가난뱅이가 반드시 모여야 하는 거야?
마쓰모토 : 가난뱅이의 삶은 사람과 사람의 인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부분이 참 많다고 생각해. 생계 문제에서부터 놀이까지.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부자만 많은 세상 속에서 가난뱅이들이 혼자 있다면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수밖에 없어. 가난뱅이라는 건 돈이 없어 먹을 것을 구하기 곤란한 사람뿐만 아니라 매일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워킹 푸어' 족까지 포함하는데, 이들이 모여 네트워크를 만든다면 삶이 더 잘 돌아가지 않을까. 만약 더 이상 일이 하고 싶지 않아졌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그래도 생계와 놀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프레시안 : 그렇군. 그런데 지금의 생각은 누구한테 영향을 받은 거야?
마쓰모토 : 딱히 누구한테 어떤 생각이나 사상 같은 영향을 받은 건 아니야. 아무래도 대학 생활에서 경험했던 게 컸어. 내가 다닌 호세(法政) 대학은 입학하던 당시(1994년)에 일본 중에서 굉장히 특수한 느낌의 대학이었어. 엄청난 자유가 있었다고 할까. 지상 8층, 지하 2층 정도의 건물이 있었는데 거긴 학교 정직원은 출입 금지였어. 학생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장소였는데 굉장히 재밌었지. 매일 여러 이벤트가 벌어지고 학생뿐 아니라 외부 아티스트들까지 들어와서 전시나 공연을 하곤 했어. 입학해서 엄청 놀랐지.
그런데 그걸 없앤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반대하기 시작한 거야. 그때부터 선배들로부터 '외국에선 장소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한다더라' 하는 얘기를 들었고, 내가 직접 그걸 실행하면서 중요한 일이라는 걸 실감해 나간 거지. 지금은? 호세 대학, 제일 '빡센' 대학이 되어버렸어. 수험생보다 대학 입학 정원이 늘어나니까 학교들끼리 경쟁이 심해져서, 호세 같은 중간 정도의 대학은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게 됐어. 그러니 학교가 점점 한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
프레시안 : 그런데 대학 가서 공부도 안 했다며. 왜 들어가려고 했던 거야?
▲ "책을 전혀 안 읽는다"는 마쓰모토가 추천한 유일한(?) 책. 에비 호프먼의 <이 책을 훔쳐라(steal this book)> ⓒameblo.jp/tsukiji14 |
공부는 흥미 있는 부분에 한해 조~금 했어. 그것도 놀이를 겸하는 공부였지만. 여행을 좋아했는데 돈이 없으니 주로 중국이나 한국, 동남아시아 등 가까운 나라들에 놀러갔거든. 그런데 거기서 사람들 얼굴이나 문화, 먹는 것 등이 일본과 공통적인 부분이 많더라고. 가깝지만 서로 잘 모르는 존재로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그래서 아시아의 역사라든가 전쟁에 대해 공부하곤 했어.
프레시안 : 부모의 영향은 없었어? 어떤 사람들이었어?
마쓰모토 : 하하하! 있었을 거라고 봐.
우리 아버지는-지금은 돌아가셨지만-작가였어. 내가 태어났을 때는 출판사를 하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더니 "자, 난 이제 작가가 될 거다. 수입이 없어진다" 이렇게 선언하는 거야. 그렇게 멋대로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뭐랄까…. 재밌었지.
우리 엄마는 아나키스트였어. 지금은 나가노 어디 산 구석에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고 있어. 둘 다 엄청나게 자기 멋대로였지. (웃음) 결국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혼을 했어.
보고 자라면서 어릴 땐 굉장히 화를 냈지.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가야 하나, 왜 저렇게 멋대로인가 싶었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본인들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걸 보여줬으니 좋은 교육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렴"이라는 말 따윈 안 했어. 그냥 내버려 뒀지. 아아, 물론 잘 곳이나 밥은 챙겨줬어.
가장 무거운 포탄은 마지막에
프레시안 : <가난뱅이 난장쇼> 월드 투어 중국 편에서, 중국에선 '반란'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이벤트 장소 찾기에 난항을 겪었다는 얘기가 있어. 겨우 찾은 장소가 벽에 마오쩌둥 사진을 떡 하니 걸어놓은 '사회주의 만세' 계열의 장소였다고?
아니나 다를까 "빈둥거릴 것이 아니라 모두들 힘을 내서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도록 하는 게 옳지!"라는 말이 나와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며. 한국도 마찬가지야. 이른바 386(486) 세대가 있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이 세대 중에는 마쓰모토 씨가 하는 활동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지. '난장쇼' 같은 방법에 대해 잘 이해가 없는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마쓰모토 : 일본도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들이 있어. 딱 내 부모 세대, 50~60대 정도의 사람들이지. 그런 이들로부터 가끔 '좀 더 진지하게 할 수 없어?' 하며 한 소릴 듣지. 그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안보투쟁 하던 시대가 그랬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나라면 음…, 그렇게 하면 좀처럼 운동이 퍼지지 않을 거라고 봐. 진지한 마음으로, 죽을 각오로 하는 건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해. 이게 정말 이기는가 지는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됐을 때 말이야.
기본적으로 늘 그렇게 죽을 각오로 해 버리면 일이 진행되지 못해. 누군가를 위한답시고 내가 죽 불행하게 사는 인생, 별로잖아. 우리들이 재밌기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도 조금은 즐거워야 해. 사람들이 다 즐거운 일을 하면 세상은 비교적 즐거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무리해서 참고 또 참고 하다보면 사람이 지쳐. 좀 더 장난스럽게 가는 것도 괜찮아.
프레시안 : 그런데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더라도 취직과 승진, 수입이 보장된 안정된 길을 가고 싶어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도 많아. 일본도 취업난이 심하다며. 한 번 '취직 낭인'이 되어버리면 평생 어디서도 나를 고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거지. '남들과 다른 길,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 준다면?
마쓰모토 : 해보면 안다고 생각해. 이쪽이 훨씬 재밌거든! 그런데 여전히 마음은 있는데 망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건, 역시 우리가 아직 약하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앞으로 좀 더 제멋대로 날뛰어야 할 것 같아. '보통의 삶의 방법'과 '좀 이상한 삶의 방법'이 아니라, '사는 방법'이 그냥 두 가지, 아니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러면 당연히 이쪽이 훨씬 더 재밌으니까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을까. 이제 곧 이라고 봐. (웃음)
▲ 마쓰모토가 인터뷰가 진행된 '빈 가게'에 기증할 '고엔지 신문'을 그리고 있다. ⓒ프레시안(안은별) |
프레시안 : 일본 경제가 안 좋지. 그럴수록 사람들 생존 욕구가 절박할 텐데 요즘 그 동네 어떻게 봐?
마쓰모토 : 일본은 자잘한 데 집착하는 사람이 많아졌어. 우리 활동과 관련해서 보면 담배꽁초 버리기나 포장마차, 가게 밖에 물건을 두는 것을 강하게 금지한다든가. 엄청 쪼잔해졌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일과도 같아. 금지가 많은 건 무엇보다 재미없는 일이지.
'적당히'와 '대충' 이런 것이 늘어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봐. 그러니 일본은 오히려 더 기회야. 경제가 엉망이 되어가는 중이니까, 자잘한 데 집착하지 말자고! 어떤 의미로는 대기업도 그냥 망했으면 좋겠어. 세상은 좀 더 엉망이 되어도 좋을 것 같은데.
프레시안 : 이거 아주 위험한 사람이군! 한국에 남길 마지막 한 마디를 부탁해.
마쓰모토 : 나는 나라로 무언가를 못 박는 걸 아주 싫어해. 일본은 이렇다, 한국은 이렇다, 다른 나라는 어떻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서로 'OO놈이니까…' 하면서 국민성이 어쩌고, 경제가 어쩌고 하잖아.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는 사실 우리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야. 꼭 고엔지의 기타나카 골목이 아니더라도 자립적인 경제 사이클을 여러 곳에 만들 수 있게 된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든, 누가 미사일을 쏘든 그런 건 관계없어진다고 봐. 그러니 비슷한 녀석들, 분발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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