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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시인, 이제야 맨얼굴을 보여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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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시인, 이제야 맨얼굴을 보여주네!

[프레시안 books] 이갑수의 <인왕산 일기>

모처럼 제대로 된 에세이를 만났다. 물론 '모처럼' 또는 '제대로'란 표현이 거슬릴 수도 있겠다. 쏟아지는 수필집을 모두 읽은 것도 아니고, 에세이를 보는 눈이 저마다 다를 텐데 단정적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인정한다. 그래도 이 책이 반가운 것은 반가운 거다. 일상에서 비상을 찾는, 책의 한 구절을 빌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렇지 않게" 보는 필자의 색다르고 따뜻한 시선 덕분이다. 이 책을 통해 좋은 시와 책을 만나는 것은 글쓴이가 시인이자 출판사 대표이니 그럴 법하다 치자. 그런데 지은이를 따라 국립국악원이며 인왕산·지리산, 그의 고향 거창과 전시회 등을 두루 다니다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천둥 같은 깨달음도 얻게 된다.

'내일을 믿다가 20년'이란 글에는 천상병 시인의 '편지'라는 작품이 소개된다. 함께 남한산성에 올랐던 지인이 "사람의 일생을 결정적으로 망치게 하는 두 글자가 뭔지 아나?"라고 물은 뒤 "내일"이라 자답한 사연에 지은이가 화답한 시를 귀띔한다.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스런 적도 없지 않았다. / 그걸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 배부른 내가 /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 나는 / 자네에게 편지를 쓴다네."

▲ <인왕산일기>(이갑수 지음, 궁리 펴냄). ⓒ궁리
좋았다. 시에 담긴 시인의 생각이 너무 맘에 들어 이 시를 안 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나치다 싶은가.

그럼 웃어보자. 지은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누가 서울에서 가장 가깝노!'를 접하면 누구라도 웃음이 나올 게다. 초등학생 시절 추운 겨울날 송판으로 만든 교사 벽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어느 동네가 좋은지를 놓고 핏대를 올리는 일이 벌어졌단다. 막터, 오무, 오류골, 완대 사는 아이들이 서로 자기 동네 자랑하느라 바쁜 판에 가장 북쪽인 돗골 아이들이 한 방에 평정해 버렸으니 "야, 씨바, 누가 서울에서 가장 가깝노!" 한 마디 였다나. 어릴 적 미국과 소련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를 놓고 입씨름 벌이던 일이 떠올라 절로 웃고 말았다.

중국 여행 중 장강 지류에서 잡히는 훼이위(飛魚) 튀김을 대하는 지은이의 감상은 웃음과 페이소스가 함께 깃들어 있다. 손님에게 생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 비어를 두고 "우리의 메기 비슷한 비어는 입맛을 다시는 우리 일행 앞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물고기는 강에서는 강도 모르고 물도 모르고 살다가 수족관에서 잠시 대기할 때 비로소 강의 존재를 알고 그리워했을 것이다…특별한 물고기라 생각했는지 카메라 플래시가 몇 방 터졌다…체념한 물고기는 별다른 포즈 없이 그저 눈만 껌벅거렸다…좀전의 비어는 죽어서 밀가루 수의를 입은 채 벌건 양념을 두르고 있었다. 튀김장(葬)을 당한 것이었다." 얼굴은 달아나고 없는 비어를 보며 "지금껏 나는 죽을 태세는 갖추었지만 아직 나의 죽음은 새까맣게 잊고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바삭바삭한 '수의'까지 함께 오드득오드득 씹어 먹었다는 지은이가 "맛? 글쎄, 그걸 굳이 내입으로 말해야겠냐?"라고 마무리하니 찡한 가운데 입가엔 웃음이 맴 돈다.

가볍게 넘길 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빈차'를 표시하는 빨간 등을 켜고 달리는 택시에서 슬픔을 본다. "그 빨간 등을 켠 사람은 젊은이가 아니다. 대부분 나이도 많고 식구들을 대롱대롱 거느리고 있는 가장들이다. 거친 인생을 헤쳐 나와 오늘, 여기, 택시 안에 존재한다. 그가 엄연히 타고 있는데도 차는 '빈 차'이다. 영업하는 동안의 그는 '없는 사람'인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런가 하면 지하철 경복궁 역 부근의 고급 한정식집 앞에서 '풍채 좋은 사람들'을 맞는 이들이 차문을 열어주는 광경을 보고는 "귀족은 태어나자마자 은퇴한 사람들"이란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을 떠올리며 '대리인생' '불구의 삶'이라 짚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열어야 할 문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이쯤에서 고백하자. 필자는 글쓴이를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란 표현이 어폐가 있다.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잊을 만하면 전화해서 "언제 밥 한 번 먹죠" 하며 1년에 두어 번 만나는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 더 알고 싶은 이란 생각은 늘 했다. 언제나 사람 좋은 얼굴에, 상대를 배려하는 조심스런 말투도 그랬고, 시속에 구애 받지 않고 뚝심 있게 펴내는 책에서 받은 인상도 그랬다. 이번 책을 읽고는 그의 참모습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겉보기보다 훨씬 재미있고, 생각이 깊은 글을 접하면서 '아, 내게는 속내를 보이지 않았구나' 하는 만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책을 평하는 데 사감이 작용한 것은 아니다. 글쓴이를 아는 만큼 글이 더욱 와 닿긴 했지만 글은 글대로 분명한 특장이 있다. 책을 읽으며 새롭거나 중요한 구절엔 밑줄을 긋기도 하지만 해당 구절이 있는 페이지의 귀를 접을 때도 있다. 이번 책은 후자였는데 읽고 보니 접어놓은 데가 하도 많아 책 두께가 두 배로 불어났을 정도니까.

▲ <빛으로 그린느 신인왕제색도>(이갑수 지음, 도진호 사진, 궁리 펴냄). ⓒ궁리
이유를 곰곰 생각해 봤다. 취향 탓이 컸다. 형용사와 부사로 범벅인 감상적 글은 꺼리는 취향이 작용했다. 그런 글은 글재주만 자랑하는 듯해 공허하게 느껴져서다. 남들이 못한 경험, 이를테면 오지 여행을 한 뒤 뭔가 혼자만 아는 듯한 글도 싫다. 시샘도 없지 않겠지만 사실 보기만 해도 글이 절로 나오는 경우라면야 남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 읽는 사람의 머리 위에서 한 수 가르치는 글도 마땅치 않다.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나도 나름 생각이 있는데…'란 거부감이 앞서는 탓이다.

그의 글은 다르다. 담백하고 솔직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주변에서 늘 접할 수 있는 현상과 사물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평소 보여준 성품대로 잰체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품격과 무게를 잃지 않으니 맘에 들 수밖에.

마지막으로 사족. 책 제목과 달리 인왕산에 관한 글이 아니다. 인왕산 이야기가 더러 나오긴 하지만 그보다는 인왕산 자락에 사는 지은이가 일상에 관한 단상을 모았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인왕산 이야기를 들으려면 지은이가 함께 펴낸 <신인왕제색도>(도진호 사진, 궁리 펴냄)를 보면 된다. 인왕산의 속살을 꼼꼼하면서도 정겹게 그린 에세이 모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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