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대, 이 남자보다 18년 연하인 한 여자가 있었다. 성실한 아버지와 교육을 잘 받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고, 유전 지역에서 뛰놀며 성장했다. 지적 호기심이 넘쳤으며 당시 여성으로선 드물게 대학 교육을 받았고 파리에서 유학했다. 아내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저널리스트의 길을 걷던 중, '한 남자'의 부도덕한 기업 경영을 폭로한 기사로 사회를 뒤흔든다.
남자의 이름을 대면 누구나 무릎을 칠 것이다. 최초의 석유 재벌이자 사후 한 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위용을 떨치는, 전설적 인물 존 데이비드 록펠러다. 그 자체로 한 시대와 부(富)의 상징이 된 남자다. 그러나 여자의 이름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에는 대부분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는 록펠러를 쓰러뜨린 유일한 저널리스트다.
그녀의 삶을 다룬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스티브 와인버그 지음, 신윤주·이호은 옮김, 생각비행 펴냄·이하 <아이다>)이 나왔다. 책은 석유가 가치관의 판도마저 바꿔가기 시작한 격변의 시대, 한 여성이 펜대 한 자루로 거대 기업과 맞서 싸우는 과정을 숨 가쁘게 다룬다. 씨실(타벨)과 날실(록펠러)로 엮어진 서사는 촘촘하면서도 웅장하다.
재미 1 : 뛰어난 저널리스트가 주는 교훈
▲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스티브 와인버그 지음, 신윤주·이호은 옮김, 생각비행 펴냄). ⓒ생각비행 |
19세기 말 스탠더드 오일은 일찍이 트러스트 형태를 확립해,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다른 석유 기업 경쟁자를 탐욕스럽게 제압했다. 일부 석유 생산자들이 조합을 만들어 인수·합병에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같은 업종의 기업이 경쟁을 피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결합한 트러스트는 "산업 너머의 산업", "법 테두리 바깥의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과의 무모한 싸움을 앞두고 타벨이 걱정한 것은 록펠러로부터 날아 올 공소장이 아니었다. 그에게 포기를 권유하거나 반대로 응원을 던지는 이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되뇐다.
"우리는 정당한 역사적 작업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옹호자가 아닐뿐더러 비판자도 아니었다. 우리는 모든 독점 기업 중에서 가장 완벽한 기업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탐구하려는 저널리스트였을 뿐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타벨의 용기는 신문방송학과 학부생들에게 소개되는 '바람직한 기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 기자상이 완전히 붕괴된 지금, "언론의 본령을 깨닫고, 타벨과 같은 영웅적 저널리스트를 본받도록 하자!"는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한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게 다가 아니다.
책 표지엔 <아이다>가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일깨워"주고, "언론학 수업에서 다뤄도 좋을 매력적인 책"이라고 소개돼 있다. 사실이지만,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는 속담을 상기시킨다. 이 책은 저널리즘이라는 열쇳말로만 재단할 수 없는, 대단히 입체적인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재미 2. '기록의 연쇄'라는 구조
금전에 맞선 '펜'의 완승을 기대했다면 이 실화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타벨의 기사는 어마어마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와 결국 스탠더드 오일이 기업 해체 명령을 받게 만들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록펠러와 그의 동료들은 각 자회사의 이름만 바꾸되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으로 독점을 계속했다. 판결 뒤 주식은 급등했고, 록펠러의 자산은 5배나 불어났다.
그렇다면 타벨은 헛일을 한 것인가? 언론의 힘이란 결국 여기까지인가? 저자 스티브 와인버그는 물론 역자도 이 질문을 놓고 고민한 흔적을 엿보인다. 이들의 결론은 돈 문제만으로 타벨의 역할을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타벨은 평생, 그리고 후대까지 록펠러 일가를 '신경 쓰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역사 속에 어떻게 '기록될지'에 대해서 말이다.
고발 기사로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신화를 해체한 타벨은 이제 록펠러 그 자체에 대한 인물 연구를 시작한다. 록펠러의 후광을 끄는 작업이었다. 덕분에 록펠러는 자신과 자신이 돈을 번 과정을 정당화하고자 죽을 때까지 자선 활동과 기부에 열을 올렸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산산조각난 명성이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
'기록과 평가', 인간 행동에 커다란 변인이 되는 두 활동이 이 책을 풀어나가는 또 다른 열쇠다. <아이다>는 록펠러를 추적하는 타벨 위로 그의 뒤를 쫓는 와인버그(저자)가 겹쳐지는 독특한 구조다. 타벨이 록펠러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는 과정을 훑으면서, 와인버그 본인도 타벨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저자는 반론을 할 수 없는 역사 속 인물들이 선 혹은 악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균형에 공을 들여가며 방대한 자료들을 재조립한다. 이런 작업은 저자의 탐구 대상인 타벨이 매달렸던 일과 같다. (타벨은 전 세대 인물인 나폴레옹과 링컨에 대한 전기 기사를 쓰기도 했다.)
타벨과 록펠러가 기록하고 기록되는 과정은 저자 자신의 '전기 쓰기 투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타벨은 록펠러의 삶을 조사하면서 한 개인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록펠러를 오직 선한 존재나 혹은 악하기만 한 존재로 한정하는 일은 전기적인 죄악 그 자체였다"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자신에 대한 다짐, 독자들에 대한 당부로 읽힌다.
재미 3. 개인이 사회를 바꾸는가?
타벨과 록펠러 바로 "한 사람의 개인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실제로 둘 모두, 개인이 세상을 움직인 좋은 예다. '아담과 이브가 매일 500달러씩 저축해 왔어도 못 쌓았을 부'를 거머쥔 자와, 그 골리앗의 신화를 무너뜨린 자이니까. 저자도 두 인물이 당대에 어떤 파장을 미쳤는가를 부각시켜 서술하고 있다.
전기의 특성상 스포트라이트가 한 곳에 집중되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저자와 타벨, 록펠러의 믿음이 아주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는 영웅도 거물도 좀처럼 도래하지 않는 시대에 사는 독자에게 한 가지 커다란 질문을 안긴다. 위대한 개인이 사회를 바꾸는가,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위대한 개인이 탄생하는가?
사업가로서 록펠러는 확실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꼼꼼함과 숫자 감각, 돈에 대한 집착도 남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적인' 대부호가 되었던 건 그 시대에 석유와 석유 활용 기술이 발견·개발되었다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또 정부의 적절한 규제가 있었더라면 석유 산업 독점도 일찍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타벨도 기사에서 "(록펠러는) 1860년대 말까지 클리블랜드에서 경쟁하는 사람들보다 특별히 나은 점이 없었다"고 서술한다. 또 록펠러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부추긴 신문을 비판하면서 이 같이 말하기도 한다. 영웅의 소환도 결국 시대의 욕망에 불과한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다.
"록펠러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 록펠러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의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흠모하기 때문이고, 또한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열정, 즉 '돈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타벨도 마찬가지다. 그가 '전설' 반열에 오른 데엔 열정과 능력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수개월에서 2년 가까이의 취재 시간을 허락받았기에 누구보다 깊이 있는 기사를 생산할 수 있었고, 식자층의 폭발과 함께 매체 영향력이 높아져 있었다.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린 업적 역시, 당시 완숙 단계였던 반트러스트 운동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찬사만 따른 것도 아니었다. 타벨이 스탠더드 오일 비판 기사에 이어 연재한 록펠러 인물 탐구 기사는 공정성보다는 공격성이 두드러졌다. 애초부터 그의 평판을 무너뜨리려는 악의적 시도이기도 했다. "타벨은 처음부터 총을 쏘았다. 사람을 죽이려고 총을 쏜 것이다. 잉크로 싸우는 전투방식은 매우 비윤리적이다"라는 비난도 받아야 했다.
어느 시대나 '위대한 개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위대한 개인이 반드시 록펠러나 타벨이 되어야 할 필연적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사회를 변혁하는가, 사회가 사람을 길러내는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이긴 하지만, <아이다>는 관점을 정리할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재미 4. 불편한 진실
"스탠더드 오일의 간부 아치볼드는 스탠더드 오일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태도로 일관했죠. 그는 스탠더드 오일이 미국 산업에서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비판을 받을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삼성 주요 계열사 사장과 구조본 팀장들 중에는 자신들이 실제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다." (<삼성을 생각한다>(김용철 지음, 사회평론 펴냄), 131쪽)
<아이다>는 가학적이다. 자꾸 '지금, 여기'의 문제를 찌르기 때문이다.
역자 후기에서 재인용한 <아이다>와 <삼성을 생각한다>의 문장 속에서 '그'들의 사고방식은 너무도 닮았다. 자신들은 '국부'를 책임지므로 비판이나 법의 제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역자처럼, 기자도 <아이다>를 읽는 내내 삼성을 생각했다. 정경유착, 부정부패 등의 모습이 굳이 100년 전 스탠더드 오일의 사례를 꼼꼼히 읽지 않아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점은 타벨처럼 용기 있는 저널리스트가 없다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 월마트나 마이크로소프트를 해체하거나 샘 월튼 혹은 빌 게이츠에게 덧씌워진 신화적인 명예를 실추시킨 폭로 기사는 아직 없다"는 저자의 지적처럼 이는 21세기의 보편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제 또 다른 타벨의 도래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이 질문에서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의 경우 내부 고발자라는 다윗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주류 언론이 그를 외면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삼성과 관련한 의혹 제기 기사가 나오기는 하지만, 대중의 관심을 오래 잡아 놓지 못한다.
107년 전 타벨의 기사를 실은 <매클루어 매거진>은 서문을 통해, "법을 지켜낼 이는 과연 누구인가? (…) 이제 남은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밖에 없다. 대중이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이들, 특히 언론인이 <아이다>를 읽고서 배울 것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개인이 사회를 변화시키느냐, 사회가 개인을 길러내는가' 하는 논쟁점이 다시 한 번 제기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대가를 치르자'는 말은 두 관점에 모두 해당될 수 있다. 어쨌든 많은 '한 사람'들이 움직인다면 사회가 조금씩 바뀌든. 위대한 개인이 등장해 타벨과 같은 글을 발표하든 선순환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오늘날 공정하지 못한 사회를 폭로하고 들추어낼 '한 사람'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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