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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조세피난처는 미국과 영국"

[화제의 책]"불법과 합법 넘나드는 역외탈세 중심국"

유로존 위기가 대공황에 버금간다거나, 자본주의 종말을 예고한다는 섬뜩한 경고가 국내 금융 고위관계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요즘 세계 자본주의 경제와 관련된 신간 중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 있다.

니컬러스 색슨이 쓴 <보물섬>(이우영 옮김, 부키 펴냄)이다. 색슨은 <파이낸셜타임스>와 <로이터> 등 세계적인 경제전문 매체의 필진으로 활약하는 조세 전문 저널리스트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현재 세계 최대의 조세피난처는 스위스나 리히텐슈타인 같은 소국이나 버진 아일랜드와 케이맨제도 같은 섬나라처럼 '유명 조세피난처'가 아니다. 바로 케이맨제도와 버진 아일랜드를 소유한 본국, 바로 미국과 영국이라는 주장이다.

색슨은 조세피난처를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으로 조세를 회피할 수 있게 하여 역외의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치적으로 안정된 비밀주의 사법체계'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정치적으로 안정된'이란 의미는 이상하리만큼 역외금융에는 민주정치의 감시나 규제가 무력화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 '금융의 세계화'가 사실은 '역외금융의 세계화'이며 미국과 영국이 최대 규모의 조세피난처라는 충격적인 폭로를 담은 <보물섬>.
역외탈세 근절 외치는 OECD 중심국들이 '본거지'?

바로 이 점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역외탈세에 대한 규제가 국제적인 공조체제로 강화되고 있다는 뉴스들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가 앞장서고, 미국이 힘을 앞세워서 스위스의 '비밀주의'를 깨는 등 역외탈세 규제에 획기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이 왜 잘 알려지지 않았는가? 바로 비밀주의로 무장한 '역외 금융'의 속성 때문이다.

역외 금융 전문가들의 모임인 조세정의네트워크(TJN)가 집계하는 '금융 비밀주의 지수(Financial Secrecy Index)'에 따르면, 미국·룩셈부르크· 스위스 ·케이맨제도· 영국 등이 1∼5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역외금융의 최대 제국은 영국이다. 저자는 금융의 세계화는 영토 개념의 식민지를 '영국계 조세파난처'라는 금융식민지로 바꾼 것일뿐 '대영제국'은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조세피난처는 현대적 형태의 식민주의라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그 중심지는 영국의 월스트리트 격인 '시티 오브 런던'이다.

그렇다면 영국에 이어 현대판 제국이 된 미국은 어떤가? 대공황 이후 미국의 월스트리트에서는 스위스처럼 '세계의 검은 자금'이 몰려든 중심지가 미국이 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흔히 말하는 외자 유치 경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비결이 바로 '역외 탈세'의 불법적· 합법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2005년에 이르자 미국 은행들은 범죄 자체가 외국에서 발생하는 한 그 범죄에 연루된 수익금을 자유롭게 수신할 수 있게 됐고, 이것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합법적이게 됐다. 지금은 일부 법적 허점들이 규제되고 있지만 색슨은 "미국에서 더러운 돈에 문호가 완전히 열려있다"고 단언했다.

마이애미, '라틴아메리카의 월스트리트'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플로리다 주의 최대 도시 마이애미를 '라티아메리카의 수도'라고 소개하는 기사에서 "마이애미는 라틴아메리카의 월스트리트, 아메리카의 홍콩"이라고 표현했다. 1950~1960년대부터 플로리다는 라틴아메리카의 헤로인이 터키를 거쳐 프랑스를 지나 미국으로 연결되던 '프렌치 커넥션'과,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유입되는 대만 국민당 아편 밀매망의 주요 축이었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자금은 플로리다의 부동산 거래를 통해 세탁됐고, 콜럼비아 마약 자금은 바하마, 파나마, 네덜란드령 앤틸리스를 경유하며 세탁했다.

1980년대에 이르자 마이애미 소재 은행들은 예금의 40%가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해외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됐다.

역외 금융의 상당 부분은 합법적으로 이뤄진다. 역외 자금이 국내로 들여올 때 상당한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연법인세'다. 다국적 기업이 해외 자산 인수 등으로 자산이 증가해 올해 납부해야 할 세금을 몇 년에 걸쳐 분할 납부하거나 연기시켜주는 것이다. 이때문에 이연법인세를 "정부가 상환 날짜를 정하지도 않고 주는 무과세 대출금"이라고 꼬집기도 한다.

최근 애플이 세금을 줄이기 위해 세율이 낮은 지역에 이득을 몰아주는 수법으로 본국에는 세금을 충격적으로 적게 낸 사실이 언론에 집중 조명됐지만, '매국적 탈세'가 아니라 '합법적인 절세'라고 반박할 수 있었던 것도 역외 금융 기법이 '합법적'이라는 포장 속에 얼마나 만연됐는지 잘 보여준다.

국내에서도 삼성전자는 '이전가격'을 이용해 해외법인에 이득을 이전시켜 사실상 탈세한 혐의로 무려 4700억 원의 추징을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두 나라에서 활동하는 다국적 기업이 두 곳 모두에서 세금을 내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중과세 방지 조약'은 제3의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역외금융의 보호막으로 전락했다. '이중과세 방지 조약'이 아니라 '이중 비과세 보장 조약'이 됐다는 것이다.

'먹튀'의 보호막으로 전락한 '이중과세방지 조약'

세금이 없거나 극히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세워두고 사실상 어느 쪽에도 세금을 내지 않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이중과세 방지 조약'이다. 최근 국내에서 '먹튀' 논란을 일으킨 미국계 론스타 펀드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미국이 영국의 런던시티에 도전하는 역외금융중심지로 급성장하게 된 계기는 IBFs라는 역외금융시장이 출범한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한지 불과 반년도 안된 시점인 1981년 6월이었다.

IBFs가 출현하면서 미국은 카리브해를 비롯한 역외 금융시장으로부터 자금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영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금융 규제의 해방구가 펼쳐지면서 도대체 역외시장과 역내 시장의 구분이 어려워진 그야말로 '역외금융의 세계화'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색슨은 1989년 일본의 부동산 거품 붕괴의 배경에 역외금융도 하나의 변수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IBFs를 모델로 일본도 1986년 역외시장을 개설했는데, 2년만에 4000억 달러의 역외자금이 몰려들어 부동산 거품을 급팽창시켜 붕괴에 이르는 결정적 동력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역외 금융 전문가 로넌 페일런은 미국과 일본 등 선진경제국에 역외시장이 자리잡은 변화에 대해 "역외 금융이 글로벌 정치 경제 체제에 완전히 자리잡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본유치 경쟁에 동원된 '역외 금융기법'

역외 금융이 왜 미국 등 선진국에서 정치적으로도 용인된 것인가? 바로 '국익' 차원에서 자금 유치 경쟁에 필요하다는 '현실론'이 득세할 때 이런 환경이 조성된다.

책에 따르면, 1980년대 미국 기업들이 자금난에 시달릴 때 유럽의 자금을 유치하길 원했지만, 미국의 채권에 투자하면 수익의 30%를 원천징수 당하는 반면, 유로본드는 비과세였다는 점에서 자금 유치에 애를 먹었다.

이에 따라 미국 국세청은 역외에 자회사를 차려 유로본드를 발행해 자금을 본국의 모기업에 보내는 위장거래를 눈감아주었다. 하지만 이런 위장거래 수법에 당국이 눈감아주는 기회를 미국의 부자들이 놓칠 리 없었다. 이들도 '역외 비밀주의'의 망토를 걸치고 해외투자자인 것처럼 동참해 '절세'에 나선 것이다.

<타임>은 "미국은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거나, 어쩌면 가장 매력적인 조세피난처가 됐다"고 지적했다.

미국 정부가 자국민의 역외탈세를 눈감아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외국 금융기관에 미국인 역외탈세자 정보를 요구하다가는 외국 투자자들도 놓칠 위험이 있다. 이때문에 1990년대말 클린턴 정부 재무장관을 지낸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의 로버트 루빈은 기만적인 법령을 도입했다.

이른바 QI(적격 중개기관) 제도다. 외국계 은행들에게 미국 시민에 대한 정보만을 미국 당국에게 제공할 것을 요구하면서 외국인에 관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게 한 것이다. 이런 규정은 조세조약 상 알고 있는 정보를 해당국에 제공하는 의무를 피하기 위한 꼼수다.

델라웨어가 거대기업의 법적근거지로 각광받는 비결

미국은 연방국가로서 주마다 주법이 따로 있다는 점도 미국의 역외금융 시장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게 한다. 미국에서 비밀스러운 역외금융이 활발한 주로는 델라웨어가 대표적이고, 네바다와 와이오밍 주는 불투명하기로 가장 악명 높은 주다.

네바다와 와이오밍은 2007년까지만 해도 폭력조직이나 마약 밀매자들이 특히 선호하는 수단인 무기명 증권이 허용되었고, 회사 임원들을 명의자로 내세워 실제 소유주를 감출 수 있었다.

네바다는 세금 관계나 회사 설립 관련 정보를 미 연방 정부와 공유하지 않으며, 주에 등록된 기업들에게 영업 소재지를 보고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미국 국세청은 네바다에 설립. 등록된 회사가 연방 정부에 세금 보고를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아칸소와 오클라호마, 오리건 주 또한 동부 유럽과 러시아 인들이 사기 행각을 위해 자주 이용하는 곳이며, 텍사스와 플로리다 주는 라틴아메리카 부자들의 피난처다.

'죽음의 상인'으로 악명 높은 빅토르 부트는 영화 <로드 오브 워>에서 니컬러스 케이지가 배역을 맡은 실존 인물로 탈레반을 비롯해 전세계 각지에 무기를 공급하는 사업 상당 부분을 텍사스와 델라웨어, 플로리다에 기반을 두었다.

이들에게 위장회사를 제공하는 주 정부들의 경쟁은 '막장을 향해 달리는 경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비밀주의에 빛을 잃은 부패지수

비밀주의로 악명높은 스위스는 비밀을 누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이 있다. 하지만 와이오밍 같은 미국 여러 주에서는 비밀주의 위반에 대한 스위스 식의 금지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유출할 정보 자체를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회사기록이 와이오밍 주 밖에서, 미국 연방 당국이 알아내기도 힘든 어떤 지역에 유지되고 있다.

델라웨어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작은 주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게 등록돼 있다. 미국 전체 상장 기업의 반 이상과 <포천> 선정 500대 기업 중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기업이 델라웨어에 법적 근거지를 갖는다. 2007년 미국에서 이뤄진 기업공개 중 90% 이상이 델라웨어에서 이뤄졌다.

이른바 '친기업'적인 델라웨어의 허술한 법 규정과 기업의 비밀 유지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델라웨어의 법체계에 따른 것이다.

금융 비밀주의 앞에서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지수는 빛을 잃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패로 측정할 때 미국은 물론, 영국과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에 속해 있다. 하지만 색슨은 "부패 지수 상위 20개 국 중 절반에 이르는 국가들이 대표적인 비밀주의 국가"들이라면서 "그중에서도 미국은 금융비밀지수에서 영예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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