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실무회담이 결렬된 핵심적인 이유는 고위급 회담 의제 합의에 실패한 데에 있다. 이는 고위급 회담 명칭을 둘러싼 신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북측은 첫날 '천안호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해소할 데 대하여'를 회담 의제로 제안했고, 남측은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와 재발 방지 확약'을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맞섰다. 회담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측은 고위급 군사회담 의제를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에 한정하려고 했고, 북측은 군사적 긴장 완화에 방점을 찍었다.
팽팽하던 양측의 입장은 이틀째에 약간 좁혀지는 듯 했다. 남측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대하여' 회담 의제를 수정 제의했는데, 당초 명칭에서 '도발'과 '책임 있는 조치와 재발 방지 확약'이 빠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 역시 '천안호 사건, 연평도 포격전, 쌍방 군부 사이의 상호 도발로 간주될 수 있는 군사적 행동을 중지할 데 대하여'로 변경했다. 군사적 긴장상태 해소가 상호 도발로 간주될 수 있는 군사적 행동을 중지하자는 것으로 바뀐 것이 눈에 띤다.
그러나 남측은 "연평도와 천안함을 먼저 논의하고 다음에 군사적 긴장 완화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북측 역시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하자"는 입장을 굽히지 않아 회담이 결렬됐다.
북측은 더 이상 대화가 어렵다고 판단한 듯, 천안함 침몰은 "철저하게 우리와 무관한 사건"이라며 "미국의 조종 하에 남측의 대북 대결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특대형 모략극"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연평도 사태와 관련해서도 "남측이 연평도를 도발의 근원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남측 수석대표인 문상균 국방부 북한정책과장(육군 대령)이 언론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이에 우리 측은 "남북 고위급군사회담에서 북측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해 밝히겠다는 내용이 명백히 드러났다"며 "동족의 머리 위에 포탄을 발사해 민간인이 사망하고 막대한 재산 피해를 발생케 해놓고 도발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고위급 회담 개최를 위한 진지한 협상은 사라지고 또 다시 격렬한 설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만 것이다.
재발 방지와 긴장 완화는 한 묶음인데
북한이 또 다시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회담장을 박차고 나간 것도 비판받아야 하지만, 이번 회담에서 드러난 남측 태도 역시 대단히 아쉽다. 우선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고 그 협상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제안에 열린 자세를 보이면서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남측은 대화 의제를 천안함과 연평도로 한정하려는 일방주의적 태도를 고수하고 말았다. 이들 사안과 함께 상호간 군사 도발 중지 문제를 한꺼번에 논의하자는 북측의 제안도 거부했다.
이처럼 남측이 한반도 군사적 긴장 해소 방안을 의제로 삼자는 북측의 제안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은 이유는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에 대한 초점이 흐려지고 연평도 포사격 훈련을 비롯한 북방한계선(NLL) 문제, 작년 5월부터 재개한 대북 심리전, 한미 합동 군사 훈련 등 북측이 자신에 대한 도발로 간주하는 문제가 의제로 부상할 것을 경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단견이다. 현실적으로 남측이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재발 방지 확약'은 상호간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해소되는 맥락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또한 북측이 제안한 군사적 긴장 해소나 상호간 군사 도발 중지는 남측이 북측에게 정전협정의 준수, NLL 이남 지역으로의 포사격 훈련 중지, 북한 함정 및 어선의 NLL 월선 금지, 남측 정부에 대한 비방 중단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었다.
▲ 지난 8~9일 개최된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 개최를 위한 대령급 실무회담은 성과 없이 결렬됐다. ⓒ뉴시스 |
또 다시 한반도 위기 오나?
군사회담이 결렬되면서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은 더욱 고조될 전망이다. 우선 당분간 군사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이 낮아졌다. 실무회담에서 현격한 인식 차이가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대화 제의를 해왔던 북측도 더 이상 대화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군사회담 북측 대표단은 10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공보'를 통해 "우리 군대와 인민은 더 이상 (남측과) 상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북한은 "겉으로는 대화에 관심이나 있는 듯이 흉내내고 속으로는 북남대화 자체를 거부해 6자회담 재개와 조선반도 주변국의 대화 흐름을 막고 대결과 충돌국면을 지속시켜 반공화국 대결정책 전환을 요구하는 내외여론을 무마해보려는 것이 역적패당의 속내"라며 남측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올해 들어 대남 비방을 자제했던 북측이 또 다시 "역적패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나선 것은 당분간 남북관계 개선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으로 해석된다.
문제는 앞으로이다. 남북 군사회담의 결렬은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에 부정적 연쇄 반응을 야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남북 적십자 회담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적십자 회담 제의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면서도 회담 개최 여부 및 시기는 군사 회담 결과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군사 회담이 결렬된 상황에서 적십자 회담을 비롯한 남북대화의 동기와 동력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6자회담 전망도 더욱 불투명해졌다. 안 그래도 이집트 민주화 운동의 폭발로 미국 대외정책의 초점이 또 다시 중동으로 맞춰지고 있고, 이에 따라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의 집중도도 떨어지던 차였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 군사회담의 결렬은 '선(先) 남북대화, 후(後) 6자회담'이라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또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미국 국무부는 남북 군사회담 결렬 소식에 "북한이 진정성을 보여줄 기회를 상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9일(현지 시간) 정례브리핑에서 "이번 회담은 북한의 도발에서 비롯된 남북 간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추진체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북한 입장에서는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며 이같이 말했다.
특히 회담 결렬의 구체적인 평가는 유보하면서도 "우리는 북한은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등 최근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리고 난 후에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는다"며 '선 천안함·연평도 해결, 후 군사적 긴장완화 논의'라는 이명박 정부의 입장을 지지했다.
올해 들어 조심스럽게 타진되고 있던 북일 대화도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일본의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지난달 24일 "납치자, 핵, 미사일 문제 등 현안의 포괄적 해결과 함께 국교정상화를 추구하겠다"며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남북관계와 6자회담 동력이 또 다시 위축됨으로써 북일 대화의 동력도 살아나기 힘들게 됐다.
이처럼 대화는 또 다시 멀어지고 있는 반면에,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킬 사안들은 다가오고 있다. 2월 말부터는 대규모의 한미 합동 군사훈련인 '키 리졸브'가 '독수리 훈련'과 함께 실시될 예정이다. 천안함 침몰 1주기를 맞이하는 3월에는 희생자 추모 열기와 함께 대북 규탄의 목소리도 높아질 것이다. 판이 커진 4월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정부·여당이 또 다시 '북풍'의 유혹에 빠져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노력이 실패했다고 판단한 북한이 어떤 무리수를 두고 나올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한반도의 기후는 사상 최악의 혹한을 딛고 봄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작년 한해 꽁꽁 얼어붙었던 한반도의 정세는 올해에도 차디찬 얼음장에 갇힌 신세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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