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이틀 전 클린턴 장관이 미국 루이빌대학교에서 핵비확산을 주제로 한 연설 후 가진 질의·응답을 통해 북한이 1~6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을 고려해 볼 때, 비록 한미 양국은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불용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워싱턴의 분위기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a fait accompli)화하는 방향으로 정책 선회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 장관은 지난 3월 말 캐나다에서 개최된 G8 외무장관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도 북한을 이미 핵무기를 지닌 불량국가로 분류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추구하는 이란과 분명히 구분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유력지들도 북한을 더 이상 핵무기 제조 기술을 보유한 국가가 아닌 핵무기 보유국가로 표기하고 있다. 접두어처럼 따라 붙던 '사실상의'(de facto) 라는 용어도 사라진지 오래다. 이는 지금까지 두 차례의 핵실험을 한 북한의 군사적 실체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된다.
오바마 미 행정부는 지난 6일 발표한 핵태세검토(NPR) 보고서에서 핵비확산조약(NPT)을 준수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미국의 핵공격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 북한 외무성은 이에 대해 "미국의 핵위협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억제력으로 각종 핵무기를 필요한 만큼 늘리고 현대화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곧 재개될 것 같았던 6자회담도 당분간 개최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그럴 경우 북핵 문제가 자칫하면 표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사이에 북한의 핵무기 기술은 더욱 진화되어, 문제는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마땅치 않은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즉, 이제는 핵무기를 가진 북한이라는 거대한 코끼리를 '몰이꾼'이 된 나머지 5개국이 다루기가 더욱 어려워 졌다는 사실이다.
▲ 워싱턴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대화중인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청와대 |
코끼리와 코끼리 등에 타고 있는 사람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일치할 때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일치하지 않을 경우 더 위험한 쪽은 코끼리가 아니라 등에 올라 타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는 올라타기를 주저하고 있다. 대신 코끼리 근처에서 관망하면서, 등 위에서 초조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한국과 보조를 맞추겠다고 한다. 그 결과 코끼리를 목적지까지 이끌고 갈 1차적 책임을 진 한국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예측 불가능한 코끼리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코끼리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일단 사람을 등에 태운 코끼리는 대개 유순하다고 1차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맛있는 것을 주면 끌고 가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허기에 지친 코끼리를 장시간, 그리고 먼 길을 끌고 가야하는 몰이꾼들이 코끼리의 불만을 잠재울 유인책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코끼리 주변 몰이꾼들은 목소리만 클 뿐, 정작 코끼리가 필요한 것들을 내놓기를 주저한다. 게다가 배고픈 코끼리의 행동이 불안정하면 할수록 올라타고 있는 주몰이꾼의 위험수치만 올라갈 뿐이다. 코끼리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몰이꾼들간의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하지 않아 보인다.
어느 위치에 있건 간에 몰이꾼 입장에서는 비용 절감 차원에서 보면 코끼리에게 가능한 최소한으로 먹이고 대신 예리한 연장과 채찍으로 코끼리를 몰아가야 한다. 문제는 거대한 코끼리를 회유와 압박만 가지고서는 원하는 날짜에 목적지까지 이끌고 가기 어렵다는 점이다. 도중에 이런 저런 감정의 기복으로 코끼리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없다.
더군다나 지루하고 긴 여행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몰이꾼들간에 불협화음이 생겨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그럴 경우 몰이꾼들간의 결속력은 약해져서 코끼리를 제어하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그렇다고 주몰이꾼을 자청해서 대신 하겠다고 나서는 이도 없는 형국이다.
아래에 모여 있는 몰이꾼들간에는 주몰이꾼을 내려오지 못하게 하고서는 현 상황에서 어떡해서든지 코끼리를 몰고 가게 하려는 눈치다. 불안하게 위에 앉아 있는 주몰이꾼이 보기에는 아래에 있는 몰이꾼들이 느긋하게만 보여 야속할 뿐이다.
주몰이꾼은 그래서 몰이꾼들끼리 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코끼리를 끌고 갈 방향과 어디서 쉬어갈지, 먹잇감이 충분한지에 등에 대해 협의를 해야 한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지만 자칫 잘못 꺼내 들었다가는 혼자서 책임을 뒤집어쓸까 좌불안석이다.
사실 몰이꾼들간에 합의된 방향이 없으면 코끼리는 커다란 둥근 원만 그리면서 제 주위만 맴돌게 된다는 점을 코끼리를 몰아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북핵 협상이 그러했다. 답보 상태였다.
따라서 주몰이꾼과 보조 몰이꾼들의 역할에 대해서 심도 깊은 논의가 다시금 있어야 한다. 가능하면 다섯 명의 몰이꾼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 논의에는 주몰이꾼의 위험도를 감안해 그에 대한 보조 몰이꾼들의 세심하고도 일치된 배려가 포함되어야 한다.
이외에도, 코끼리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기 위해 몰래 먹잇감을 주는 행위는 비겁한 행동임을 공지해야한다. 이는 코끼리 몰이가 중단될 수도 있는 중대하고도 심각한 약속 위반이다. 옆에서 불쑥 던져주는 먹잇감에 익숙해진 코끼리가 이미 정해진 방향에서 자칫 이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코끼리에게 확실한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다. 자기가 가야할 길의 결과가 어떨 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 코끼리에게 어떻게 동기를 부여하는가가 제일 어렵고도 중요한 요소다. 우선 모든 몰이꾼들은 코끼리로 하여금 힘든 단계가 지나면 편히 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끔 일치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 나아가 코끼리가 지나가기에 편리한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코끼리가 건너가기에 불편한 장애물들을 그대로 둔 채 막무가내로 채찍질만으로 장애물을 통과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코끼리들'을 없애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코끼리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일은 한결 용이해 보인다. 워싱턴으로 각국의 몰이꾼들끼리 모여 '핵 없는 세계'를 논의했다고 하니 앞으로 이를 지켜볼 일이다.
사족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이 2011년, 2012년 2년 동안 6자회담을 통해 핵을 포기할 확실한 의지를 보이고 NPT에 가입해 합의된 사항을 따르게 된다면 기꺼이 (서울에서 열리는 2차 핵안보 정상회의에) 초대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북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주변 보좌진의 대북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낸 셈이 됐다. 북한이 핵안보 정상회담 참석에 안달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