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보니 이번 북미 양자 대화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다. 보즈워스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6자회담의 필요성, 9.19 공동성명 이행의 중요성에 대해 '어느 정도'(some) 공통의 이해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정부 고위당국자도 "6자회담과 비핵화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는 말 앞에 "다는 아니지만"이란 수식어를 힘주어 붙였다.
미국은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9.19 공동성명의 이행을 강조했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북측은 평화체제와 미북관계의 정상화에 대해 얘기한 것 같다"고 전했다. 양측이 예상했던 말을 주고받은 것이다. 고위당국자는 또 "북한이 의외의 말을 하지는 않은 듯하다"고 했다. 북한이 종종 하는 '깜짝 제안'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미국의 평가에 부정적인 부분이 없었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사태 전개를 조심스럽게 낙관했다. 북미 양자 대화가 1~2회 더 열리고,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도 대화 국면이 펼쳐지면 결국 입장차를 좁히고 6자회담이 재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위당국자는 "북한도 나쁘게 보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북한에 다녀온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 일행이 한국 정부와의 협의를 위해 외교통상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
이처럼 북한과 미국이 대화 국면의 한가운데로 발걸음을 뗀 가운데 동북아 각국의 움직임이 부산해지고 있다. 한반도 정세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전 포석이다.
일본 여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간사장이 10일 600명이라는 대규모 수행원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한 게 가장 눈에 띈다. 일본은 중국을 지렛대 삼아 미국과의 관계를 조정할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을 매개로 북한에 손을 내미는 시나리오가 각론으로 포함됐을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화폐 개혁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결정이다. 최근 불거진 김 위원장의 방중설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김 위원장은 한반도 평화체제가 논의될 것에 대비해 중국을 안심시키고 협조를 요청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북미 대화는 6자회담 복구로 가는 첫 걸음에 불과하지만,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각축전은 이미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보즈워스 대표의 방북에 관한 전문가들의 논평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북한과 미국이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 이행에 '어느 정도' 공통의 이해에 도달했다"는 대목이 핵심이다. 완전히 합의하지는 못했다는 얘긴데, 9.19 성명의 이행 순서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북한은 평화체제 문제를 먼저 논의하자고 했지만, 미국은 그 문제는 원래 남·북·미·중 4개국이 별도의 포럼에서 얘기하기로 했으니 중국하고도 협의를 해봐야 하고 포럼에 참여하지 않는 나라들(일·러)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는 논리로 피해가면서 진전된 답변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은 '공통의 이해'라는 느슨한 결론까지만 도출하고, 다른 나라들과 협의를 해서 평화체제 문제의 순서를 앞당기는 문제를 협의할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북미 양자 접촉을 한 번 쯤 더 할 것 같다.
정부가 북한의 신종플루 대응을 위해 타미플루를 보내겠다고 발 빠르게 나왔는데, 북미관계가 빨리 갈 수도 있는데 대한 조바심에서 나오는 행동 같다. 남북관계도 그렇게 하나씩 풀어갈 필요가 있다.
■ 전직 외교·안보 고위 당국자(익명)
북미 대화가 2차, 나아가서는 3차까지 갈 것으로 본다. 이번 대화는 북미 대화의 형식과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보즈워스 대표가 미국의 입장을 직접 설명하고, 강석주도 북한의 입장을 말하면서 대체로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공통의 인식"이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양자회담 결과를 보고 다자회담·6자회담에 나간다고 했으니까 북한은 '9.19 공동성명 반대한 적 없으니 논의해 보자'는 태도로 나왔을 것이다.
그래도 "유용한 대화"라고 평가한 건 중요하다. 대화가 잘 안 됐으면 보즈워스 대표의 말 어딘가에 부정적인 표현이 섞여 나왔을 텐데, 그게 없었다. 스타트로서는 좋아 보인다. 첫 스타트부터 진전이나 합의가 있으리라고 서로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9.19 공동성명의 유효성에 동의했다는 말이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 9.19는 북한의 핵 폐기와 다른 참여국들과의 관계 정상화, 경제·에너지 지원을 규정했다. 그에 대한 필요성에 공감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가 준비했던 포괄적 패키지에 대해 보즈워스가 충분히 설명했다는 것이다. 북한도 핵 군축 주장 대신 9.19 성명에 따라 본격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협상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보즈워스는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언젠가는 대체된다는 점을 다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평화체제 문제에 대해서도 공감했다는 말이다. 평화체제 문제는 9.19 성명에 포함됐지만 6자회담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는 못했다. 앞으로 이 부분이 쟁점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위상과 역할이 중요한데, 평화체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비전과 방법론이 없다. 한국 외교에는 중대한 도전이다. 이에 대한 입장 정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이다.
6자회담이 재개될 환경이 조성된 것인데, 과거처럼 기술적인 쟁점에 대한 토론으로 들어가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북미가 여전히 불신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신뢰를 다지는 과정이 좀 더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앞으로 다양한 양자 접촉이 활발해질 가능성이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설도 나오고 있고, 일본도 움직이면서 다양한 양자 회담이 열릴 것이고, 그런 과정을 거쳐 6자회담이 열릴 수 있으리라 본다. 북미가 더 만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 있다.
■ 외교 전문가(익명)
아무 준비 없이 6자회담을 열고 그 때부터 협의를 하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후속 협상이 있어야 한다. 북미가 다시 만난다면 6자회담의 합의 틀이 깨지기 전의 단계로 어떤 식으로 돌아갈 것인가에 대해 더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논의가 있을 것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미국의 부시 행정부, 일본의 아소 내각, 한국의 이명박 정부가 망가뜨린 지점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는 과정이다. 그런데 망가뜨린 것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계획을 사전에 듣고 결과도 들었다고 모양새만 갖추는데, 실은 따라가고만 있는 것이다.
■ 김근식 경남대 교수
미국이 원하는 6자회담 프로세스의 재개에 대해 원칙적 공감대 있었다는 건 상당히 긍정적이다. 보즈워스가 평화협정 논의도 합의 사항에 들어 있다고 말했는데, 평화체제 문제는 북한이 관심을 갖는 분야이기 때문에 양측이 원하는 걸 확실히 담보해 준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6자회담에 돌아가고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원칙적인 공감대를 상호 교환했다.
김정일 위원장도 안 만났고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도 없었지만, 협상의 진입단계라는 측면에서는 평균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북미 대화는 앞으로 1~2회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북한은 6자회담 복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미국은 평화체제 문제에 대해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어조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6자회담 복귀 수순으로 갈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