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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NGO' 평화네트워크 10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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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벤처 NGO' 평화네트워크 10년 이야기

[기고] 나는 왜 '한반도 평화운동'을 하게 됐나

9월 10일은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의 열 번째 생일날입니다. '10주년'이라는 무게감이 만만치 않게 다가오지만, 가급적 경쾌하고 진솔하게 이야기를 풀어가 볼까 합니다. 저와 평화네트워크에게는 소중한 성찰의 기회이면서 '새로운 시작'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여러분에게는 작게는 평화네트워크를 이해하고 보다 크게는 한반도와 세계 평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어쩔 수 없이 평화네트워크(평넷)에 대해서는 제 얘기부터 풀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평화네트워크를 만들고 대표라는 직함으로 10년간 상근자로 일해온 이유가 클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기도 합니다. '정욱식=평화네트워크'라는 관계를 깨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졌었는데, 아직까지 그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한솥밥을 먹은 평넷 식구들과의 소통과 나눔과 함께 성장하는데 부족하지 않았나 반성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평화운동을 하게 됐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10여년 전까지 이 일을 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대학 3학년까지 북한이나 평화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면, 노동 쪽에 가까웠고, 한 때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질적인 두통과 경제 형편으로 진로에 대한 방황은 계속되었고, 현실이 답답한 나머지 일탈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북한의 대기근 소식을 접했습니다. 신문과 방송, 또한 한 대북 지원단체의 탈북자 면담 자료를 보면서 깊은 슬픔을 빠졌습니다. 북쪽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흡수통일'을 꿈꾸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대기근을 외면하면서 '감상적 통일론'에 빠져 있는 것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양쪽 모두 통일을 말하면서 정작 거기에는 사람의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모금함을 들고 강의실을 돌기도 했고, 대북 사업을 추진하던 한 기업체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대기근의 북녘과 IMF의 남녘

북한과 관련된 일을 찾는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대기근과 IMF 경제위기로 고통받는 한반도 주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제가 다다른 결론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 군사력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원을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복지를 증진하는 데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였습니다. '평화군축'을 화두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뭔가 해야 한다는 '의욕'은 녹록치 않은 '현실' 앞에서 작아지기도 했습니다. "한반도 평화 이전에 가정의 평화부터 챙겨라"는 동생의 핀잔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저의 졸업을 '고생 끝 행복 시작'으로 기대하셨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에는 제가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단체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래, 단체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저의 인생관 '가난한 행복'을 실천해보기로 했습니다.

결심이 서자, 대학가 여기저기를 오랜 친구인 강준호와 함께 돌아다니며 벽보를 붙였고, 그래서 10명 가까이 모여 '북한 다시보기 모임'이 탄생했습니다. 무더웠던 1999년 여름, 서강대와 연세대를 오가면서 모임을 가졌고, '동호회로 유지할 것이냐, 시민단체로 갈 것이냐'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해 8월 대학 졸업을 앞둔 제가 백수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시민단체'를 고집했고, 다른 분들이 '그러면 네가 대표 해라'로 해서 얼떨결에 상근자 겸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상근은 제가 원했던 것이고, 대표는 외부 인사를 모실 생각이었는데, '상근자가 제일 그 단체에 대해 잘 알지 않느냐. 이왕 시작하는 거 새롭게 해보자'는 의견에 밀린 것입니다.

평화네트워크와 PEACE KOREA

99년 8월 하순에 서강대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와 맥주를 나누면서 단체 이름을 짓을 때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무엇을 지향하나? 한반도 평화!"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시민!"

"어떻게 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네트워크!"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장시간 논의 끝에 탄생한 이름이 바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민네트워크'였습니다. 약칭은 '평화네트워크'로 하기로 했구요. 그런데 정식 명칭이 길다보니 언론에서 '한반도 시민네트워크', '한반도 평화네트워크', '평화시민네트워크' 등 여러 가지 변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2002년부터는 약칭인 '평화네트워크'를 정식 명칭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명칭상의 편리함 이외에도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에도 기여해보자'라는 야무진 꿈이 깔려 있었습니다.

명칭을 정하고 다음은 홈페이지로 넘어갔습니다. 몇 분들이 홈페이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저는 '야, 이거구나!'라며 무릎을 쳤습니다. 일단 만들어놓으면 전세계 어디에서든 평화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고, 또 이메일로 뉴스레터를 보내면 구독자 수와 상관없이 비용이 '제로'였으니, 우리 같은 무일푼에게는 그야말로 '딱'이었습니다. 탄력을 받아 도메인 주소도 정했는데,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 기억은 안 납니다만, 'peacekorea.org'라는 멋진 주소도 정했습니다.

저희 단체 이름과 웹사이트 주소! 이거 탐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어떤 곳에서는 홈피 주소를 팔라는 제안까지도 있었습니다. 무일푼이었던 저희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지만, 정중히 거절키로 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추억도 생각나는군요. 당시 세계를 놀라게 한 길거리 응원전을 보면서 외국의 몇몇 지인들이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주된 내용은 '한국의 평화롭고 활기찬, 그리고 스포츠를 이용한 평화운동이 인상 깊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알고 보니 일부 외국인들이 '오 필승 코리아'를 '오 피스코리아'로 잘못 알아들었다는군요.

한국의 4강 진출은 평화네트워크도 꿈을 꾸게 만들었습니다. 일부 네티즌들이 공교롭게도 6월 25일 열리는 '통일된 독일'과의 4강전의 구호로 'PEACE KOREA'를 제안한 것입니다. 평화네트워크 홈피 주소와 일치하는 구호! 그러나 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떠돌이 생활

제가 상근하기로 결심했고, 단체 이름도 정했으며, 홈피 제작에도 돌입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사무실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으로 사무실을 구하는 것은 애초부터 머릿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정과 아이디어만 들고 '책상 하나만 주이소'라며 더부살이 할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며칠 동안 발품을 판 끝에, 평화통일운동에 오랫동안 몸담고 계셨던 선배님들이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기념사업을 하는 '통일맞이'에서 책상 하나를 사용할 수 있게 배려해주신 겁니다. 일면식도 없던 저희에게 큰 선물을 주신 것이지요.

드디어 99년 9월 10일,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 9층에 있는 통일맞이 사무실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날 저녁 술잔을 부딪치면서 '오늘이 우리 생일이야'라며 자축했습니다. 평화네트워크가 세상을 향해 걸음마를 내디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더부살이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2000년 3월 기독교연합회관의 갑작스러운 임대료 대폭 인상 조치로 통일맞이는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저희 역시 책상 하나를 찾아 떠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2004년 2월부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필운동 사무실로 오기 전까지 무려 10번을 이사 다녔습니다.

인사동 소재 민족정기수호협의회에서 3개월, 평창동 친구 자취방에서 2개월, 다시 기독교연합회관 민족회의 사무실에서 3개월, 종로 5가 한국인권재단에서 2개월 생활을 거쳐 신설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더부살이를 청산하고자 다른 단체와 함께 신설동에 사무실을 구했지만, 함께 들어가기로 한 단체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3일만에 계약을 해지하고 말았습니다.

때마침 한 불교단체에서 조계사 구석에 있는 창고를 사용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셨고, 감사한 마음으로 1년간 그 곳을 사용했습니다. 일제 시대 병원 입원실이었던 그 사무실은 2.5평 되는 공간에 화장실까지 딸려 있어서 여러 가지 해프닝이 많았던 '추억의 사무실'입니다. 인턴 모집공고를 보고 찾아왔던 여학생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2002년 6월에는 드디어 자립형 사무실을 구해 더부살이를 청산했습니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와 함께 서울역 뒤편 경주김씨 종친회관에 20평 크기의 사무실을 구한 것이지요. 이삿짐 무게보다 앞으로 감당해야 할 월세 부담이 더 크긴 했지만, 그 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20개월간의 그 곳 생활은 평화네트워크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일 좀 할 만하면 이사를 다녀야 하다 보니, 사람들은 평화네트워크를 '집시 NGO'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10년 동안 평화네트워크가 문 닫지 않고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꺼이 사무 공간을 내준 여러 단체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열 번째 생일을 맞이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위기의 평화네트워크, 부시가 살리다

툭하면 이삿짐을 싸야했고 월 단체 수입이 30만원 정도였던 2000년 가을, 저는 정말 심각하게 단체의 존폐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저 역시 단체를 처음 만들 때, '1년 해보고 안 되면 정리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리든, 비영리든 사업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문을 닫는 것은 여는 것보다 어려운 경우가 많더라구요.

1999년 9월 10일 창립 이후 평화네트워크는 몇 가지 분야에서 우리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2000년 들어 한반도 군축 문제를 제기하면서 인터넷 공간에서 활발한 여론전을 개시하자, 국방부 장관은 '평화네트워크의 군축 논리를 반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군사 마니아뿐만 아니라 국방부 전략가들도 저희 홈페이지에 의견을 적극 개진했습니다. 그러자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이 "국방부 극별 반미 단체와 사이버 戰"이라는 제하에 이러한 내용을 보도했고, 그 덕분에 평화네트워크의 대중적 인지도도 높아졌습니다. 국방부 장관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00년 3월부터는 <오마이뉴스>와 함께 '미군 없는 한국을 준비하자'라는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얼핏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평화네트워크는 친미 못지않게 반미에 내재된 '미국 중심주의'에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많은 논란을 야기하면서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그 결과 평화네트워크의 첫 단행본 '미군없는 한국을 준비하자'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출판은 평화네트워크의 주요 사업이 되었습니다. 대중과의 소통과 자료 축적, 그리고 재정적 기여의 방식으로 출판의 유용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이지요.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는 '승전가를 뱃노래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해 공동어로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1999년 6월 1차 서해교전이 발생한 서해를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화해와 협력의 바다로 바꿔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뒤늦게나마 2007년 2차 정상회담에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창설하기로 한 것에 환희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MD와의 만남

단체 활동 초기, 평화네트워크의 최대 히트상품은 역시 미사일방어체제(MD)였습니다. 여기에도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99년 단체 창립 준비와 함께 첫 사업을 한 것이 바로 한국과 미국 언론의 북한 보도에 대한 모니터링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미국 신문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영어 때문에 재수를 했다는 항변도 소용없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일간지에서 북한 관련 기사를 찾았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 관련 기사들이 나왔는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느닷없이 CIA 국장 등 정보기관 수장들이 등장해 '북한이 조만간 미국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내용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당시 북한 미사일 문제가 최대 이슈이긴 했지만, 미국 정부 안팎에서 '북한위협론'을 부풀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유력 인사들이 언론에 '북한 미사일 위협론'을 제기하면 며칠 후에 어김없이 MD 관련된 법안이나 예산 심의가 나왔던 것입니다. 당시 생소하기만 했던 MD 문제에 주목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글을 쓰고 다른 단체와 시민들에게 알려나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2000년 여름에는 20여개 단체가 참여하는 'NMD-TMD 반대 네트워크'도 결성됐습니다. 참고로 NMD는 미국 본토 방어용이고 TMD는 해외주둔 미군과 동맹국 방어용으로, 클린턴 행정부 때까지는 구분되어 사용되다가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를 통합해 MD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차 남북정상회담과 북미관계의 급진전이 이뤄지면서 MD 문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남북정상회담, MD를 요격하다'라는 글을 쓸 정도로, 한반도 평화의 진척은 미국 강경파들의 MD 구상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부시의 당선과 심기일전

단체의 존폐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 조지 W 부시가 당선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체가 아니라 한반도의 운명에 대해서요. 당시 저는 군산복합체와 유착관계에 있고 '절대안보'를 신념처럼 받드는 부시 진영이 승리할 경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올스톱'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MD는 군산복합체에 막대한 이윤을 보장해주고 선제공격 능력을 갖춰 군사패권주의를 실현하는데 핵심 프로젝트입니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미국 국민의 혈세가 들어가는 '돈 먹는 하나'이기도 합니다. 미국 강경파들에게는 어디에선가 미사일이 날라올 수 있다는 겁박이 필요한데, 북한만한 존재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부시의 당선은 평화네트워크에게 위기감이 깔린 활력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라 안팎의 분위기는 달랐습니다. '대북포용정책 이외에는 대안이 없을 것'이라며, 부시 역시 클린턴의 대북정책을 계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MD 때문에, 부시의 미국이 북한과 관계개선을 할 리가 만무하다'는 평화네트워크의 주장은 '음모론'으로 일축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음모론'이 적중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2001년 2월말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결과로 터진 'ABM 조약 파동', 3월 초 DJ의 방미와 부시의 홀대, 부시의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 중단 및 MD 구축 선언이 잇따라 벌어지면서 부시 행정부는 대북 강경 기조를 분명히 했습니다.

평화네트워크의 발걸음도 빨라지게 됐습니다. 우선 MD 문제를 집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글쓰기, 강연회, 토론회 등을 했고, NMD-TMD 반대 네트워크를 확대해 'MD 저지와 평화실현 공동대책위'를 꾸리는 데 일조했습니다. MD 문제가 주목을 받으면서 평화네트워크 회원도 늘기 시작했고, 저 역시 원고료와 강연 수입, 방송 출연료 등으로 과외와 학원가를 전전하던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MD는 '하나의 프리즘'이었습니다. 빛이 관통하면 7가지 빛깔을 보여주듯, MD를 통해 미국 정부 및 의회와 군산복합체의 유착관계, 대북정책을 비롯한 대외정책의 성격, 한반도와 동북아 문제, 핵무기와의 관계, 미국-중국-러시아 삼각관계, 유라시아 지정학, 한미동맹 등 여러 가지 굵직한 사안들의 한 단면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MD를 이마에 새긴 부시 행정부의 등장은 존폐의 위기에 서 있던 평화네트워크가 살아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불길한 예감

평화네트워크의 성장은 한반도 위기 고조와 그 궤를 같이 했습니다. 우리는 2001년 하반기부터 2003년을 전후해 심각한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MD를 앞세운 부시의 대북강경책과 북한의 반발, 그리고 1994년 전쟁 위기를 종식한 제네바 합의를 '악행에 대한 보상'으로 인식해온 공화당의 입장을 종합해볼 때, 제네바 합의가 파기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상을 했습니다.

2001년 9.19 테러가 터지면서 불길한 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반테러 입장을 밝히면 북미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지만, 평화네트워크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9.19 테러로 위기에 처한 MD를 살리기 위해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더욱 부풀릴 것이고, 이에 따라 북미관계와 한반도 정세는 더욱 나빠질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다녔습니다.

불길한 예상은 적중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 1월 부시가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선제공격 대상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실 끝에 매달려 있던 제네바 합의도 2002년 10월 우라늄 농축 의혹을 둘러싼 북미간의 입장이 충돌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른바 '2차 한반도 핵위기'가 도래하고 만 것입니다.

이때부터 평화네트워크의 당면 목표는 '한반도 위기 예방과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되었습니다. 거창한 목표지만, 평화단체로서 피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시민사회와 국회의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며 연대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한국과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나름대로 해결 방안을 전달하는 한편, 직접 만날 수 없었던 북한 지도부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역사적 결단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결국 바위를 뚫어 물길을 만드는 힘은 물방울에 있다는 믿음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반도 핵위기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둡고도 기나긴 터널 속으로 들어간 느낌입니다. 아마도 20대 후반의 나이에 단체를 만들어 평화운동에 뛰어든 것도 '일희일비하지 말고 긴 호흡을 가지고 정진하라는 의미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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