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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0세기의 민족주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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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0세기의 민족주의 발전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71>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⑦

프랑스혁명은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혁명을 통해 민족주권과 민족의 자율성이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이론상으로는 민족 전체가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 근대적 민족주의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주로 대외적인 전쟁을 통해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냈을 뿐 아니라 강화되었다. 프랑스가 1792년 4월부터 대외적인 혁명전쟁을 시작함으로써 프랑스뿐 아니라 그 상대편 나라들에게도 민족적 감정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이 시작되며 더 강해졌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정복했던 유럽 여러 나라에서 그 반발로서 저항민족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영국은 이 시기에 프랑스와 22년간이나 지속적으로 싸워야 했다. 또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잉글랜드 침공의 위협 등으로 인해 이 시기에 민족 감정이 크게 증대되었다.

독일에서도 1806년 이후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으며 민족주의가 발전했다. 피히테, 슈타인 같은 사람이 앞장서서 독일인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 당시 독일의 민족주의는 아직은 문화적 민족주의이다. 그것은 독일이 수십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어와 그 문화가 민족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이탈리아도 나폴레옹이 그 상당부분에 이탈리아왕국을 세우고 지배함으로써 많은 고통을 받았다. 또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많은 병사들의 징집, 이탈리아 예술품의 파리 반출 등에 분개했다. 그래서 일부 시인들이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외쳤으며 곧 지식인들이나 군사 엘리트들이 그 뒤를 따랐다.

빈회의에 의해 1815년에 확립된 메테르니히체제는 절대주의적인 구질서를 다시 복구하고 프랑스혁명이 열어 놓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힘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 이데올로기들이 전통적인 군주국가들을 붕괴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소수였던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에 대해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으나 어느 나라에서도 그 싹들은 아직 자라기도 전에 짓밟혔다. 그렇다고 민족주의 이념이 점차 유럽 각지로 확산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1820년대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중남미의 각 지역에서 식민지인들의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두 나라가 나폴레옹에게 오랫동안 지배되어 그것을 진압할 힘이 없었으므로 중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는 1826년까지는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유럽에서는 터키의 지배를 받던 발칸반도에서 1815년 이후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리스가 1830년에 독립하고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이집트가 자치를 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터키를 약화시키려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같은 나라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유럽의 중심부에서는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같은 중요한 나라들이 민족주의의 발전을 가로 막았으므로 그 운동은 느리게 진전했다. 그리하여 1848년의 독일 3월혁명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9세기의 민족주의 운동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다른 민족의 지배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 분열되어 있는 민족이나 국가의 통합, 또 이미 정치적 통일을 이룬 민족국가의 경우에는 그 발전과 팽창을 추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가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와 같이 다민족국가로 구성된 나라에서 소수민족들이 분리, 독립을 추구한 운동이다. 두 번째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분열되어 있는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운동이다. 세 번째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이 이미 형성된 민족-국가를 더욱 발전시키려 하는 움직임으로 이는 결국 제국주의와 연결되었다.

독일 3월혁명은 두 번째 경우이다. 독일은 중세 이래 분열되어 있었으나 이제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해진 근대세계에서 분열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멸을 의미했다. 나폴레옹의 통폐합에도 불구하고 31개 국가와 4개의 자유도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상태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혁명을 주도한 것은 대체로 부르주아 계급인데 그들은 민족통일과, 입헌군주제를 통한 국가의 자유화를 같이 추구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주도권 경쟁과, 또 아직 구지배계급이 완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통일은 당분간 뒤로 미뤄졌다.

혁명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던 마자르족, 여러 슬라브족들, 또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이 해방과 독립을 추구했다. 오스트리아황제도 이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우선 헝가리인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이 탄생했다.

이탈리아도 독일과 같이 중세 이래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고 북부지역에서 가장 큰 나라가 사르디니아-삐에몽트였다. 베네치아와 주변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었고 로마는 교황령국가였다. 또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는 시실리왕국이 있었다.

통일작업을 정치적으로 실천한 것은 사르디니아-삐에몽트의 수상인 카부르이다. 그는 통일전쟁을 일으켜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막아내고 1860년에 롬바르드 등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여 일차적인 통일을 완수했다.

그 해에 민족주의자인 가리발디가 천여명의 붉은셔츠 단을 이끌고 시실리왕국으로 쳐들어가 이를 사르디니아에 통합시켰다. 베네치아는 1866년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확보했고 로마는 1870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철수함에 따라 병합되었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미 1828년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 내 많은 나라들을 하나로 묶는 관세동맹이 맺어졌는데 이것이 통일을 위한 경제적 초석이 되었다. 통일과업을 떠맡은 것은 프로이센의 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그는 1866년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북부 독일 국가를 북독일연맹으로 묶었다. 또 1871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남부의 4개 국가를 더 합쳐 독일제국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하나로 합쳐짐으로써 통일이 완수되었다. 이는 독일이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 한편에서 중, 동부유럽의 많은 소수민족들이나 아일랜드 같은 억압민족들은 지배민족에게서 벗어나 독립을 추구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두 나라는 이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누르기 위해 억압을 강화하고 언어나 문화 등의 동화정책을 강행했다.

민족주의는 1848년에도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일부 대중이 혁명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대체로 교양 있는 부르주아계급에 제한되었다. 그러나 1870년 이후에는 점점 대중적인 현상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19세기 후반에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국가 사이의 다툼이 더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의 중요한 강대국들은 서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그 국민들의 충성심이나 통일성을 끌어내기 위해 민족주의 이념을 대중화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관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교육이 매우 중요했다. 독일의 경우 비스마르크는 통일 이후에 공립 초등학교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빠른 편에 속했다. 이 학교들에서 독일어 교육을 시킴으로써 문자해득자가 크게 늘어났다. 한 편에서는 덴마크어, 폴란드어, 알사스어 같은 소수민족 언어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러시아도 언어와 종교를 비롯한 문화적 통합을 국가의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비러시아계 민족들이 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폴란드의 카톨릭 교회, 우크라이나의 정교회, 발틱지역의 루터파 교회들이 그 종교정책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비슷한 정책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의 추구가 유럽에서 하나의 대세가 되었으며 19세기 말의 제국주의 팽창은 이러한 경쟁의 단순한 확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해외 식민지의 확보는, 특히 대중적 민족주의의 시대에는 민족적 영광을 나타내는 필수적인 징표로 보였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정책을 주로 추구해 나간 것은 우익세력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의 성격도 과거보다 보수화했다.

많은 국가의 우익 정치인들은 제국주의를 민족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 국내적인 긴장을 해외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족주의는 좌익과 싸우는 무기가 되며 보수화했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감정을 극단적으로 고취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역자로 몰아 붙였는데 이런 태도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인종주의, 반유대주의를 가져오는데도 기여했다. 이런 극우민족주의의 발전은 1920년대에 파시즘이 자라나는 온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좌익이 민족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다.

제국주의적 지배와 억압은 식민지에서도 점차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식민지인들은 민족의 자주성과 경제적 착취의 반대, 문화의 자율성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와 민족주의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된 이유이다. 특히 1950, 60년대는 민족해방운동이 식민지역 각지에서 일어나며 민족주의를 크게 강화시킨 시기이다.

그러나 1947년 이후의 냉전체제는 한 편에서 새로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의 자율성도 크게 제약시켰다. 미국은 한국이나 베트남, 중남미 지역 등에서 끊임없이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부심했다. 민족주의가 자기네의 세계전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소련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영토내의 민족주의적 요구를 무차별적으로 짓눌렀다. 그러나 1991년에 소련이 무너지며 상황이 달라졌다. 갑자기 구소련 각 지역에서 민족주의적 요구가 분출한 것이다. 이는 체첸의 독립요구 등 이 지역에서의 지속적인 분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뒤 보스니아에서는 대규모 종족학살까지 벌어져 세계인의 주목을 집중시켰다. 이는 민족주의적 요구라는 것이 매우 뿌리 깊은 것으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1세기가 합리성의 시대이고 지구화의 시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러나 종족이나 민족에 대한 요구가 종족성이라는 뿌리 깊은 힘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당연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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