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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갈의 안정'이 주는 역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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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갈의 안정'이 주는 역사의 의미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15>

인도사에 관한 오해 내지는 왜곡 가운데 하나가 무슬림 정권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인도사에서 흔히 말하는 '무슬림 시대'나 '이슬람 왕조' 등은 역사적 의미로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통치자의 종교가 무슬림이라 해서 인도 사회가 무슬림 사회 혹은 이슬람 사회로 바뀐 적이 없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속한 무슬림은 다수인 힌두의 카스트 사회 안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섞여 살았고, 무슬림으로만 독립적으로 구성된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의례나 축제 같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의 전통에 따라 행하였고 결혼, 이혼, 상속, 친족 간의 갈등 같은 경우는 각 종교가 규정하는 전통법에 따라 이행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나 시크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불교가 발생한 기원전 6 세기경부터 대승 불교가 발생한 기원 전후의 시기를 '불교 시대'라고 규정한 초기 학자들도 있는데 역사적 평가로는 온당치 못하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18세기 뻔잡을 거점 지역으로 하여 형성된 세력으로 시크 왕이 통치한 왕국을 시크 왕국이라 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이 경우 뻔잡 왕국이라 해야 한다. 통치자가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고, 그가 설사 그 종교를 전폭적으로 후견하고 상당수의 인민이 그 종교를 따른다고 해서 종교를 그 시대나 왕국을 한정하는 어휘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도사에서 통치자의 종교가 무슬림인 정권 가운데 규모가 전국적인 것은 13세기의 델리 술탄 조와 16세기의 무갈 조다. 델리 술탄조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에 터를 잡은 세력의 무함마드 고리(Muhammad Ghori)가 북부 인도를 침략한 후 마믈룩(mamluk)으로 데리고 간 꿋뜹 웃딘 아이박(Qutb-uddin Aibak)이 돌아와 1206년에 델리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를 이슬람 군주 즉 술탄이라 칭하면서 시작한 마믈룩 술탄 조를 필두로 시작한 세력이다. 델리 술탄조는 다섯 조가 바뀌면서 때로는 북부 인도를, 때로는 인도아대륙의 거의 전역을 300여 년 동안 통치하였다.

무슬림 정복 군주들은 어디든 정복을 하면 피정복민 가운데 건장하고 머리 영리하고 '종자'가 괜찮은 것으로 보이는 남자 청년을 본국으로 데리고 가 통치자 계급으로 육성한다. 이런 사람을 마믈룩이라 한다. 그런데 이 마믈룩을 영어로 slave라 번역하는데 그 slave라는 어휘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노예'라는 뜻이 아니다. 굳이 하면 '복속민' 정도인데 수십 년 전에 일부 일본인 학자가 이를 '노예'로 번역해 사용한 것을 누군가가 이를 기초로 델리 술탄조 가운데 첫 번째 조인 마믈룩 조를 노예 왕조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여 버렸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는 노예가 왕이 되었는가 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인도사 전공자가 너무나 적어 생긴,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는 해프닝이다.

델리 술탄 조의 통치자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전제 군주였다. 그리고 그들은 개종하지 않은 힌두에게는 지즈야라는 인두세를 징수하고 무슬림에게는 그것을 면제해주었다. 이 지즈야를 두고 해석을 잘못 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근거로 해서 그런 통치를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평가하는데,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만 종교에 대해서만 인두세를 면제해주었을 뿐, 종교 외의 사회나 문화에 대해서는 이슬람 방식을 고집하여 나라 운영을 하는 예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개종하지 않는 힌두들이 지즈아먄 납부하면 무슨 신을 믿든, 어떤 전통을 따르며 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통치자에 따라 우상 숭배와 같은 행위에 대해 상당한 압력을 행사한 경우도 있었지만 힌두 사원이나 사제의 종교 행위를 핍박한 적은 없었다.

그들의 이러한 통치 방식은 카스트에 관한 정책에서 무엇보다도 잘 드러난다. 그들은 카스트 구조 사회에 관해서는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이치다. 통치자로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 안정이었고, 인도에서 그 사회적 안정은 카스트 제도의 유지를 통해서 가능하지, 이슬람의 만민평등 사상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통치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경제적으로는 생산 체계의 안정적 유지와 그를 통한 안정된 세수 확보 및 노동력 확보이고, 사회적으로는 전통 사회의 안정적 유지라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마찬가지로 통용되는 보편사의 기본 원리다. 군주가 개인적으로는 특정 종교를 독실하게 믿고 따를 수는 있지만 그 종교를 나라 운영의 기틀로 잡아서는 국정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그들의 뒤를 이어 등장한 무갈 제국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무갈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몽골 제국과 티무르(Timur) 제국이 쇠퇴한 후 분할된 세 제국 가운데서 티무르의 후손임을 자처한 - 그 혈통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 바부르가 중앙아시아의 패권 다툼에서 밀리면서 인도로 들어와 세운 나라이다. 바부르는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군주 적통인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혈통을 모두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미 다른 경쟁 세력을 압도하였다. 게다가 바부르는 역경을 무릅쓴 후 성공을 해 백성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또 술과 사교를 좋아하고 시문에 능하며 예술과 학문을 사랑하는 등 아주 낭만적이고 백성과 부하에게는 어질고 자상한 군주였으면서도 귀족들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추상같은 무서움을 보여준 군주였다는 사실이 강한 카리스마를 만들었다.

무갈 제국을 건국한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의 패권 다툼에서 밀리면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주해와 자리를 틀고 있다가 기회를 잡아 인도아대륙으로 내려와 델리에서 제국 건설의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죽은 뒤 카불의 푸른 하늘을 보고 싶으니 그곳에 묻어달라고 해 그의 유해는 카불에 옮겨져 지금껏 묻혀 있다. 그의 아들 후마윤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프간 출신의 셰르 샤의 침입을 받아 이란으로 쫓겨났다가 권토중래하여 다시 인도로 돌아 와 제국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후 제국은 거침없이 200년을 달렸다.
▲ 30년이 다 되어 가는 아프가니스탄 내전 속에서 카불의 바부르 묘는 폐허가 되어 있다.

바부르는 델리 술탄 시대보다도 더 관용적인 정책을 썼다. 그 전통을 이어 바부르의 손자인 아크바르는 바부르의 힌두-이슬람 사이의 종교 융화 정신을 더욱 살려 지즈야를 폐지하고, 고위 관리직의 문호를 개방하여 그 자리에 많은 힌두를 기용하였다. 여기에 모든 종교의 사상을 존중하여 하나의 유일신 사상으로 묶어 보려는 정책을 택한 것은 이 시대 무갈 제국이 탈종교적이면서 사회 복지를 널리 추구하는 거대한 문화 융합체가 되는 초석이 되었다. 실제로 아크바르는 번역청을 설치하여 힌두 고전인 여러 베다, 《마하바라따》, 《라마야나》 등을 페르시아어로 번역시키기도 했다. 그가 이러한 행보를 한 것은 힌두 문화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는 제국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통합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무갈은 전체적으로 정치 세력으로서 각 집단끼리의 경쟁이나 싸움은 있었지만, 출신지나 출신 종족을 기준으로 하는 정체성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사를 전공으로 하지 않는 일부 동양사학자들이 가끔 무갈이 중국의 청나라와 같은 정복 왕조로서 피복속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이는 인도사의 기본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중국사에서는 한족을 비롯하여 종족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역사의 주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한족과 그 외의 북방 민족 사이에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나고 그 사이에서 '멸만흥한(滅滿興漢)'과 같은 구호가 표면으로 나타나지만 인도사에서는 전혀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종족 정체성 인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한 차원에서 민족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힌두와 무슬림의 공동체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전범으로 여기고 그와 유사한 다른 지역의 역사를 그러한 성격으로 비교하거나 비슷하게 이해하는 것은 그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거대한 세속적인 복합 사회로서의 무갈의 모습은 무슬림 군주가 통치하던 시대에 힌두교의 사회 체계인 카스트가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무갈 정부는 각 촌락의 사법 기구 역할을 하던 카스트 촌락 위원회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충분한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이를 토대로 카스트 촌락 위원회는 벌금, 참회, 추방 등의 방법을 통해 힌두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 규제의 대상이던 혼인과 음식에 관한 위반 행위를 강력하게 규제하였다.

이렇게 카스트 촌락 위원회의 권한이 막강해진 것은 무갈 정부가 카스트 체계가 가지고 있는 규제 기능을 통해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지즈야를 부활해 이슬람 근본주의적 통치를 한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 아우랑제브에 의해서도 유지되었으니 무갈 전체에 걸쳐 이슬람 교리에 관계없이 카스트는 정부에 의해 장려되었던 것이다.

이는 통치자 개인의 종교 성향에 관계없이 사회의 안정적 유지와 카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 체계의 효율적 유지를 통해 세수와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도 때문에서였다. 바부르 이후 무갈 정부가 브라만을 관직에 널리 기용한 것도 브라만 중심의 사회 문화 체계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힌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 통치에 필요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과부가 따라 죽는 사띠와 같은 것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못하게 하였고, 유아혼도 금지시켰다. 반면 과부 재혼을 합법화하였으나 이런 풍습은 워낙에 힌두 사회에 그 뿌리가 깊이 박혀 있어서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풍습을 강압적으로 금지하여 민의와 충돌하는 일은 벌이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아크바르 통치 아래에서 국가는 세속적이고, 종교적으로는 관용적인 성격을 갖추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도에서는 세계에서 성격이 가장 다른 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에 기초를 한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통합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갈 정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농촌 사회의 안정이었다. 정부는 한 마을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지주이자 그가 속한 지배 카스트가 무토지 임노동자나 장인들을 과도하게 착취하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관리하였다. 국가는 지주가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경작 규모를 확장하거나 대토지 소유 경영을 시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더불어 농촌 사회의 지배 계층과 적대 관계를 무릅쓰면서 정부의 경제력을 집중하는 따위의 일도 시도하지 않았다.

국가는 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여전히 지주 체계의 소농업 경영을 유지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았고 그 안에서 국가의 비호를 입은 여러 단계의 중개인들만 배를 불릴 수 있었다. 따라서 농촌 사회의 지배층은 중앙 정부와 밀월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현상 유지의 조화 상태가 유지되었다. 전체적으로 지배층은 중앙 정부에 종속되어 있었고, 농민은 지배층에 다시 종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가 입장에서는 유럽의 중세 말기에서와 같이 귀족에 대한 견제를 위해 상업과 수공업에 대한 투자를 통한 시민 계급의 성장을 장려할 필요가 없었다. 지배층은 생산 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았고 오로지 황제를 닮은 작은 왕으로서의 소비와 사치 향락 혹은 대금업이나 토지 저당 등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시가 발전하거나 자본의 축적이 대규모로 진행될 수 없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대지주가 국가 권력에 대해 독립적 관계를 유지하던 봉건 세력이었고, 그들이 국가의 규제로부터 벗어나 화폐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자본을 축적시킨 대상인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할 수 있었으나 인도에서는 지주가 국가 권력에 철저히 종속적인 위치였고, 농민은 지주에 대해 다시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사회 갈등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계사에서 그 유명한 소위 '무갈의 안정'(Mughal's stability)이 갖는 역사의 의미다.
▲ 무갈 시대의 귀족의 삶은 안정된 사회 위에서 사치와 향락으로 점철되었다.

왕조의 안정적 유지는 한국사의 경우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특히 조선 왕조 500년. 그 500년 동안 인민은 왕의 목을 단 한 번도 치지 못했다. 국가가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은 무능한 통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처단을 당하거나 왕조가 바뀌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나라가 전란에 휩싸이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도 그 정권을 책임져야 한다는 역사의 당위성을 부르짖는 경우는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이는 그 '조선의 안정' 때문이었다.

이러한 보수적 사회 분위기는 왕조가 망한 후 독립 운동기에도 여전히 유효하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겨 그 울분에 처한 나머지 자결을 한다거나 항일독립군에 가담한 사람들 가운데 다수의 목표는 왕조의 복원이었지, 평등 사회의 건설은 아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보수 왕조 유지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천명의 역할을 하였으니 일제 강점기를 지나 분단과 내전을 거치면서도 바뀔 줄을 몰랐고, 그 후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 독재 시기에도 여전하였다. 어떻게 그렇게나 많은 국민을 학살하고, 이후 국민의 힘에 의해 정권이 굴복하고 결국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그에 대한 처단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러한 역사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독재는 세습되어 김정일 독재로 이어지고 있지만 인민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한국사에서 그나마 유일한 처단은 김재규가 저지른 박정희 암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 항간에 떠도는 미국의 CIA의 사주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관계없이 -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개인 차원의 일이었다. 사회가 변화하려면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여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하여 저항하고 그 위에서 시대를 변혁시켜야 하는 건데, 김재규의 박정희에 대한 암살은 사회 변혁과는 연계될 수 없는 돌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근대 시민 세력이 성장을 해서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단을 하는 방식이든 영국에서와 같이 유혈 사태 없이 타협을 통해 왕을 권좌에서 물아내고 시민 권력을 이루어내는 방식이든, 새로운 세력이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내는 그런 역사는 조선에서든 대한민국에서든 북한에서든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 혁명 없이 새로운 시대가 오는 법은 없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노동자, 농민, 빈민이 경제적으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다. 가정 파탄, 가정 폭력, 자살, 기아, 노인 학대 등으로 이어진 사회 문제는 이 나라에서 항상 그렇듯 철저히 개인 문제로 치부되고 있다. 그만큼 이 사회는 안정되어 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사회로부터 방치되어 있는 계층이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나라는 없다. 이곳은 총기가 난무하는 5·18 때도 전당포 한 곳 털리지 않았고, 전국에서 100만이 모여 촛불을 밝히면서도 사건사고 한 건도 터지지 않았다.

갈등이 사회 변혁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시 안정의 기반이 되는 것은 퇴보로 가는 길이다. 그 만고의 진리는 16세기부터 17세기 유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반면에 인도의 무갈 제국과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한 번만 깊이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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