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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의 인도 침략, 그 신화와 역사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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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의 인도 침략, 그 신화와 역사 만들기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14>

아프가니스탄 가즈니(Ghazni) 출신의 술탄 마흐무드(Mahmud)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상당한 영역을 통치하였다. 그는 11세기 초가 되면서 인도아대륙의 북부와 서부로 말머리를 돌려 부유한 사원들을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왜 사원이었을까? 사원은 지금 신도들의 눈에는 예배를 드리는 성소이겠지만, 당시에는 돈이 몰려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안에서는 계(契)와 같은 자본주의 이전의 금융 행위가 성행하던 곳이었다. 7세기에 불교 사원인 날란다 같은 곳은 주변의 200 개의 마을에서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 엄청난 돈이 모두 사원 안에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돈을 거둬들이기만 한다. 물론 세금도 내지 않는다. 대원군이 서원을 -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사원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다 - 철폐한 것도 그로 인하여 국고가 비기 때문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마흐무드가 인도 북부와 서부로 치달려 들어와 약탈을 한 것은 군자금이 필요한 그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약탈하는 자가 점잖게 돈만 빼앗아 가는 것은 없다. 그런 건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역사상 모든 경우에 약탈자들은 그곳에 불을 지르고 파괴를 한다. 그렇지 않은 예는 없다. 무슬림의 약탈에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인 유럽의 기독교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도가 '성전(crusade)'이라고 미화한 '십자군전쟁'이 그 좋은 예다. 1차 십자군전쟁 때 40일 간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차지한 기독교도들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도망치지 못하고 성안에 남아 있던 무슬림과 유대인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 모든 전쟁은 학살과 파괴가 뒤따르는 잔인한 일이다. 그것은 무슬림의 전유물이 아니다. 침략 전쟁인 십자군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이슬람 사원은 불에 탔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사원을 불 지른 자의 입장에서는 적의 종교를 유린함으로써 적의 기를 완전히 꺾고 두려움을 퍼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우상 파괴자로서 자기 종교의 영광을 만방에 선포하였음을 자처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랬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그들이 예배 중에 있던 팔루자의 이슬람 사원을 파괴한 것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침략자의 우선적인 목표는 사원인 경우가 많다. 같은 불교도였지만 미얀마가 태국 아유타야를 침략했을 때나,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모두 마찬가지의 이유로 사원을 침략했다. 모든 침략은 돈을 빼앗고, 불을 지르고, 사람을 학살한다.

마흐무드 또한 이런 범주에 놓인 군주였다. 그런데 그가 행한 여러 약탈 가운데 하나가 최근 인도 정치의 첨예한 문제의 한 가운데에 등장하였다. 바로 그가 행한 1026년 구자라뜨 주의 소마나타에 있는 사원에 대한 약탈이다. 기록은 마흐무드가 소마나타 사원과 주변의 사원들을 연이어 대대적으로 약탈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록에 대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약탈을 기록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투르코-페르시아 계열의 문서로 가즈니 조와 그 이후 인도에 세워진 술탄 (즉, 무슬림 왕)조(朝)의 궁정 연대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록들에 의하면 그렇게나 엄청난 규모로 벌어진 소마나타 사원의 약탈 사건에 대해 그 지역의 토착 왕국 궁정 기록이나 기종 비문이나 전설 등에는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모든 침략 세력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떠벌이고 과장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무슬림은 우상 파괴라는 관점에서 자신이 행한 약탈을 사실보다 더 크게 떠벌이거나 과장하고 특히 그것을 우상 파괴라는 관점에서 기록을 남길 가능성이 크다. 가즈니 궁정에서 기록을 담당한 자는 자신이 믿는 알라를 찬양하고, 그 차원에서 자신들의 업적을 치켜세우고자 하는 차원에서 자신들이 행한 일을 훨씬 크게 떠벌임으로서 자신들을 매우 신실한 우상 파괴자로 자처하고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단순한 약탈이었던 사건이 기록을 남긴 자 손 안에서 '적들이 그 위용에 놀라 그 트라우마로부터 헤어 나오질 못했다'는 식으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스끄리뜨나 토착어로 된 사료들은 그 마흐무드의 약탈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약탈로 인해 힌두들이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언급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이 나중에 인도사를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데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발단은 식민주의 역사학자들로부터 시작하였다.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은 인도의 역사를 고대 힌두와 중세 이슬람으로 설정해 놓았고, 따라서 이슬람 문명의 시작은 뭔가 엄청난 사건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목적에 딱 들어맞는 것이 가즈니의 침략을 그린 투르코-페르시아 계열의 기록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기록들에 대해서 면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그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는 차원에서 역사적 사실로 재구성을 했다. 따라서 그 사건은 실제로는 인도 서부에 국한된 한 사원에 대한 약탈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 전체의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으로 과장되었다.

역사학자가 가져야 하는 첫 번째 의무는 사료 검증일 것이다. 역사학자가 사료를 가지고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할 때는 그 사료는 기록한 자가 누구인지, 그 사료를 기록한 목적은 무엇인지, 그 사료를 접하는 대상은 누구였는지 등에 대해서 반드시 최우선적으로 면밀한 검증을 해야 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소마나타 약탈에 대한 투르코-페르시아 계열의 기록이 사건에 대한 진정성 있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한 목적을 띤 기록일 수 있는지에 대해 보다 진지한 고민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인도의 역사를 처음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의 태도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우선 그들은 무슬림이 정복 군주로서 인도를 통치하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개 산스끄리뜨와 그 계통의 지역 언어로 쓰인 사료들을 활용하고, 무슬림이 통치자로 자리를 잡은 1200년 경 이후부터는 정복자로 들어 온 투르크어, 아랍어 혹은 페르시아어로 쓰인 사료들을 활용하는 전통을 스스로 만들고 고착화시켰다. 12세기 이후에도 분명히 산스끄리뜨나 인도의 토착 언어들로 쓰인 자료가 계속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료를 가지고 역사 재구성을 하려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12세기 이후의 인도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항상 무슬림의 시각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식민주의자들의 이러한 역사 해석과 재구성으로 인해 이 사건은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내재된 적대감의 맹아로 투사되었다. 영국 식민주의자는 인도를 통치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인도 민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규정하지 않고, 인도 사회는 힌두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종교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공동체가 따로 있어 서로 분리되어 살고 있다고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리고 그 시발로 무슬림의 인도 침략과 약탈을 들었다. 그것은 무슬림의 침략으로 인해 힌두 사회에서 심한 트라우마가 발생하였고 이 트라우마가 근대 힌두와 무슬림 간의 공동체적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론으로 연결되었다.

그러한 식민주의자의 역사 재구성에 의해 결국 의도대로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이전에는 없었던 종교 공동체가 만들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공동체를 중심으로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그 결과 인도-파키스탄의 분단이라는 비극이 발생했고, 그 후 두 나라에서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억압과 핍박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인도에서는 1990년대 이후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종교 공동체주의를 적극 이용하여 무슬림을 학살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이에 대해 무슬림은 불특정 힌두에 대한 테러를 끊임없이 벌이고 있다. 어느덧 정사로 인정된 식민주의자들의 바로 그 독해가 한 가상의 역사를 창조해냈는데 그것이 실제 역사에서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책임을 식민주의자들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는 식민주의자들의 상상적 독해를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 아래 있던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은 무슬림을 배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족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다수의 공통 분모인 '힌두'를 강조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 안에서 민족주의와 종교 공동체주의가 겹치게 되었고, 그러한 진행 과정이 속도를 낼 때 그 견해를 뒷받침하지 않는 다른 목소리들은 일제히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도가 독립을 달성했을 때 독립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민족주의자들과 동일한 견해를 가진 힌두 민족주의자 진영에서 소마나타에 사원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당시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종교 공동체주의와 일정한 선을 긋고자 했다. 종교 공동체주의로 인해 나라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대 수상 네루는 독립된 인도 공화국의 국가 건설 목표를 세속 국가로 두었고, 그 연장선에서 소마나타 사원을 재건축하는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세속주의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 정부의 힘은 약화되었고, 힌두 민족주의의 힘이 강해졌다. 그러면서 소마나타 사원이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힌두 종교 공동체주의자들이 힌두교의 신화에 나오는 이상 군주인 라마(Rama)의 탄생지로 추정하는 아요디야를 다시 복원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곳에 서 있는 무슬림 모스크를 다 부숴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규모 군중 운동을 조직하였고, 급기야 북부 인도의 주요 부분을 돌고 난 후 아요디야에 도착하는 대장정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출발지가 소마나타였다. 소마나타 사원이 힌두 민족주의 부활의 한 상징이 된 것이다.
▲ 소마나타 사원은 힌두 근본주의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은 아요디야를 향해 대장정을 떠나면서 16세기 무갈 황제 바부르(Babur)가 모스크를 세우기 위해 원래 있던 라마 사원을 파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 바바르 모스크는 당연히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선동에 군중은 심하게 요동쳤다. 모스크는 결국 망치를 든 힌두 보수 집단들의 손에 의해 처참히 파괴되었고 그 과정에서 500 명이 넘는 무슬림이 학살당했다.

이제 역사는 더 이상 과거의 사실을 기술하거나 규명하는 학문의 한 장르가 아니다. 정치 전면에 활용되는 이데올로기 무기로 자리 잡은 지 꽤 오래 되었다. 역사는 더 이상 과거의 실체를 파악하는 학문으로서 머물러 있지 않고 이제는 현재의 지배 관계를 '과거의 힘'으로 정당화하는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기능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세력 관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갈등은 기존의 역사 시각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바꾸려는 세력 사이에 충돌을 필연적으로 야기한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유독 과거사 문제가 크게 불거진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학의 성격 변화와 관계가 있다. 정권 초기부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등에 의해 정부 차원의 과거사 진상 규명이 본격화되면서 학계와 시민사회의 논쟁이 뜨겁게 달궈진 것은 바로 역사학이 정치 행위에 대한 정당화 이데올로기로서 갖는 힘 때문이었다. 정권 탈환에 사활을 건 보수 진영에서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등을 통해 과거사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모두 역사학이 현실을 통제하는 정치 무기로 자리 잡았다는 막중한 사실을 깨닫고 잇다는 증거이다.
▲ 역사학을 둘러싼 충돌은 이미 정치의 중심 현상이 되어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홉스봄(Eric J. Hobsbawm)이 역사학을 핵물리학만큼이나 위험하다고 했다는 말은 역사학의 이러한 정치 무기로서의 잠재성과 그 폭발성을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한 역사 전쟁은 인도아대륙에서 이미 진행 중에 있으니, 종교 공동체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인도 내부에서의 이러한 역사 전쟁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존재하는 핵전쟁에 대한 위협 못지않게 남아시아의 평화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사실상 현재의 종교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과 갈등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무슬림의 침략과 힌두 사원에 대한 약탈이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그들은 이미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은 그 역사를 활용하여 치르는 전쟁의 정치 공학 뿐이다. 그러므로 이 종교 공동체 간의 '역사 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구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것은 아니다. 역사가 전쟁의 촉매 역할을 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우리가 인문학의 일부로서 이해하고 있는 그 역사가 아니다. 역사가 이미 역사학자의 손을 떠난 버린 상태다. 답답할 뿐이다.

역사가 무기로서 현재를 구성하는 일은 한국 사회의 언론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신문이나 뉴스에 나온 기사나 보도는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실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인 동시에 현실이 아니다. 과거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때만 해도 언론은 사건 자체를 왜곡하면서 거짓으로 보도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치졸한 방법은 쓰지 않는다. 최근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보도하는 조중동의 태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른바 조중동은 사건 자체의 중심 진상은 보도하지 않고 그 주변의 자질구레한 것만 계속 보도하는 방법으로 사실을 왜곡한다.

그런데 그러한 방식의 사건과 기록의 역학 관계는 그 언론의 막강한 힘에 굴복한 정치인들에 의해 더욱 강력해졌다. 그 어떤 사건일지라도 기록과 전달에 있어서 전대미문의 막강한 힘을 가진 언론이 기사화 해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없고, 별 의미도 없는 사건이라 할지라도 언론에서 크게 다뤄 주면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목숨 걸고 그렇게 열심히 '쇼'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기를 쓰고 언론 장악에 매진하고자 하고 야당은 또 기를 쓰고 그 시도를 분쇄하려는 것 또한 바로 언론이 갖는 이러한 무기가 된 역사로서의 막강한 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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