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3시 30분 이화여대 포스코관 259호 강의실. 석연찮은 이유로 이 학교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정치외교학과 이성형 교수가 '열린 강의'를 시작했다. 과목 이름은 에너지의 지정학. 이날부터 시작해 7~8주 동안 매주 수요일 이 시간에 수업이 있다. 누구나 무료로 들을 수 있다.
이성형 교수는 국내 최고의 남미 전문가다. 이 교수를 잘 아는 한 학자는 "가장 현지화된 연구자"라는 말로 그를 규정했다.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 문화 등 남미의 모든 것을 문헌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수많은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체화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 등 남미의 정치·경제를 다룬 그의 저서들은 현재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의 사유화가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를 경고하는 역작이다.
이 교수 본인은 모르지만 <프레시안>에는 그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다. 몇 년 전 남미 문제를 다룬 기사와 관련된 얘기다. 한 독자가 기사 안의 사진 설명이 잘못됐다는 댓글을 하나 남겼다. "저 사진의 배경은 ○○가 아니라 △△입니다."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그 곳을 대체 누가 아는 것일까. 남미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 한결같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그런 댓글을 달 사람은 한국에서 이성형밖에 없다."
하지만 '석유 고갈의 정치경제'라는 주제로 이뤄진 이날 강의는 이 교수가 비단 남미에 국한된 지역전문가만은 아님을 보여줬다. 석유의 생성에 관한 자연과학자들의 논쟁에서부터 유가급등의 원인에 관한 다양한 학설들, 석유를 둘러싼 국제정세, 전력 민영화 문제까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다양한 이슈들로 2시간을 채워나갔다.
심지어 북한의 에너지 공급 부족에 따른 전쟁수행능력 문제에서 최근 촛불시위까지 그야말로 세계의 모든 현상을 석유라는 단일 변수로 설명하는 그의 수업은 정신을 딴 데로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세계화와 정치변동론', '민주주의 정치론', '제3세계와 시민사회' 등 이대에서 그가 진행했던 강의의 면면을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란이 핵개발을 하면 미국이 걸프만에서 누리던 항해 통제권이 사라지게 된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어서 이란을 칠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방관할 수도 없다. 미국의 전략가들이 후회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란-이라크 경쟁구도를 그냥 두고 핵 통제만 하면 됐는데, 이제는 이라크가 위축됐기 때문에 미국의 중동 전략가들은 더욱 어려운 선택을 하게 됐다."
"자원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집에 먹을 게 많으면 그냥 쓰면서 엉망으로 사는 것처럼 석유가 많아 달러가 많이 들어오면 자국 산업이 성장하지 않는 것이다. 자국 통화가 비싸니까 모든 걸 다 수입한다. 베네수엘라에 가면 세계 최고의 스페인 와인과 아르헨티나 고기를 아주 싸게 먹는다. 스테이크가 5달러 밖에 안 한다. 석유 달러를 가지고 보조금을 주기 때문이다. 적당히 먹고 살게 해 주고 대학은 공짜다. 그런데 대학을 나와도 갈 데가 없다. 국내 산업이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최고급 경질류로 뜨는데 북한에는 그게 없어서 조종사들이 연습비행을 못한다. 에너지는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2차 대전에서 독일이 진 것도 석유 때문이다.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하면서 바쿠 유전지대를 먼저 깨고 갔어야 하는데 성급하게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바람에 공방이 계속되면서 석유 공급이 안 됐다. 소련에서는 트랙터에다가 포를 싣고 와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았는데, 그 역시 석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강의 내용뿐만이 아니었다. 수업에 사용된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로 써진 최신의 그림과 도표들을 모아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화여대가 2005년부터 3년간 비정년 교원으로 있던 그를 작년 말 임용심사에서 탈락시킨 비공식적인 이유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강의는 그것이 이 교수를 탈락시키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관련 기사 : "이화여대에는 상아탑의 정의가 있는가")
이 교수는 3년 동안 9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교에서 요구하는 연구 실적을 900% 충족시켰고, 강의 평가에서도 6학기 동안 과내 1위를 차지했다. 이대 정외과가 BK21 사업을 유치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등 학과 기여도에서도 탁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용 탈락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결과를 받아든 이 교수는 지난 2월 교육과학기술부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재임용 거부처분 취소 청구'를 제기했다. 그러나 소청심사위원회는 지난 5월 19일 이 교수의 청구를 기각했다. 교육부가 봉건적인 학내 정치의 희생자 대신 이대의 손을 들어줬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난 5개월 동안 정치학계에서는 430명이 이 교수의 복직을 요구하는 서명을 하는 등 그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서는 복직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져 19일 현재 1889명의 네티즌들이 서명했다. 교수단체들은 16일 '이성형 교수 복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교육부 소청위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는 지켜보자는 이 교수의 당부 때문에 속으로만 불만을 품고 있던 이대 정외과 학생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조만간 이 교수 복직을 위한 오프라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이날 강의를 들으러 온 4학년 채정원 씨는 "시험기간이 끼어 있어 서명운동 얘기만 나왔었는데, 선생님의 수업을 다시 듣고 싶다는 학생들 차원의 활동을 할 것"이라며 "정외과 학생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정외과 학생들이 드나드는 싸이월드 게시판에는 "교수님께 배운 책, 교수님 음성 등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한데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교수님 못 뵐까봐 너무나도 걱정이다", "도움이 못 돼 답답하다", "계절학기 중간에라도 (1인시위에) 나오겠다"는 등의 글들이 올라와 있다.
이날 '열린 강의'는 복직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이 교수의 뜻과 학생들의 지지가 모아져 시작된 것이다. 방학 후 첫 번째 주이고, 계절학기 기간이기 때문에 첫 수업에는 10여명의 학생들만 출석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한 학기만에 수업을 하니 감개무량하다"고 짤막하게 소감을 말하며, 다음 주부터는 많은 학생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4학년 김은지 씨는 "선생님의 수업을 다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열린 강의를 하시는데 자리에 있는 게 힘이 될 것 같아서 왔다"면서도 "하지만 그런 걸 떠나서 강의가 여전히 재미있다는 게 가장 인상적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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