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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까, 기득권에 도전하고 좌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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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까, 기득권에 도전하고 좌절하다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8>

북부 인도에서 국가가 발생한 기원 전 6세기로부터 약 200년이 지나면서 최초의 통일 제국이 등장하였다. 마우리야 제국. 개조 짠드라굽따 마우리야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인도아대륙의 남쪽까지 대부분을 무력으로 통일하여 명실상부한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그렇지만 짠드라굽따 마우리야에게도 눈엣가시처럼 걸려 있던 게 하나 있었다. 인도 동부 지금의 오릿사 주와 비슷한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깔링가 왕국이었다.

깔링가는 짠드라굽따 마우리야 때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자 2대 왕인 빈두사라 때도 건재하였다. 그렇지만 짠드라굽따 마우리야의 손자이자 빈두사라의 아들이면서 3대 왕으로 등극한 아쇼까는 이곳을 가만 두지 않았다. 아쇼까는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깔링가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그 전쟁으로 인해 10만 명이 죽고, 15만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그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 다민족으로 구성된 현 인도공화국은 단일한 국민국가 건설이 최대의 국가 과제다. 최초의 통일 군주 아쇼까가 각지에 세운 돌기둥의 머리를 국가 상징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깔링가를 복속시킨 후 아쇼까는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다고 했다. 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해야 하는지 가슴이 미여진다고 했다. 자기 일에 열심히 살던 그 많은 보통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다고 했다. 그러한 아픔이 또 다시 일어나면 그 슬픔과 고통은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이니 이제 북소리 (즉 전쟁)에 의한 정복을 버리고 다르마 (즉 법과 도리)에 의한 정복을 하겠노라고 만방에 고했다. 아쇼까는 이런 심정을 깔링가를 정벌하고 그 자리에 세운 돌기둥에 새긴 왕의 칙령을 통해서 공포하였다.

이를 두고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아쇼까를 평화주의자라고 치켜세웠다.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만의 위대한 인물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아쇼까는 진정으로 폭력을 후회하고 그래서 그것을 멀리 한 가슴이 따뜻한 군주였을까? 아쇼까는 진정 그 전쟁에서 충격을 받아 삶의 태도를 바꾸었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겪고 정말로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을까? 진정 그는 깔링가 전쟁으로 인한 충격으로 전쟁을 포기한 평화주의자가 되었던 것일까?

아쇼까는 깔링가 전쟁을 치른 후 더 이상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이 사실만 보면 위와 같은 해석이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쇼까에 의해 인도아대륙의 모든 지역은 제국 정부 손 안에 들어 와 더 이상 정복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바깥 지역은 더 이상 영토 확장을 위한 무력 정복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만 해도 중앙으로부터 너무나 떨어져 있는 지역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제국의 효율적 통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영토 내의 모든 백성에게 통일된 사상과 이념을 확립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국정의 과제로 삼았다. 기원전 6 세기경 인도판 '전국시대'와 '제자백가'가 요동을 치면서 2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처음으로 통일 제국을 이루다 보니 그 시절 제국 정부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통일된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였던 것이 기득권 층이 유지하고 있던 사회 이데올로기를 깨고 그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사의 진시황의 경우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이룬 진시황이 사상을 통일하고 분서갱유를 통해 유가 사상을 분쇄하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인 것이다. 아쇼까나 진시황이나 모두에게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이루고 기득권 세력을 누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던 것이다. 같은 목표를 두고 진시황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강공책을 사용하는 방식을 택했으나 아쇼까는 그들에 대한 탄압을 이이제이의 방식을 통해 실행에 옮겼다는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진시황이 강력한 법가 사상을 통해 사상 통일을 꾀하면서 유가 사상을 압박했다면, 아쇼까는 당시 인도의 모든 사상과 종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다르마 즉 법과 도리를 통해 브라만의 독점적 지위를 약화시키려 했다. 아쇼까는 왕은 아버지고 백성은 자식이니 백성은 왕을 믿고 그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그것이 다르마 즉 도리라고 했다. 모든 백성은 브라만뿐만 아니라 불교 승려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사제를 똑같이 섬기라고도 했다. 즉, 브라만에게만 물질을 바치지 말고 다른 스승에게도 물질을 바치는 것이 도리라고 한 것이다. 종은 주인을 섬기고, 각 카스트는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바로 법과 도리라고 했다. 그 안에는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되 브라만을 견제하고자 하는 뜻이 강하게 담겨 있었다.

이러한 아쇼까의 다르마 정책의 핵심은 제사 금지였다. 그는 살생을 금지하고, 불살생을 주창하면서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폈다. 그것이 곧 다르마의 정신 즉 법과 도리에 따르는 것이라 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브라만교의 제사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제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제사란 브라만에게 살아 있는 제물을 바쳐 그것을 희생시키고 절차에 따라 사제에게 신도들이 공물을 바치는 창구다. 그 공물은 단순한 옷이나 음식뿐만 아니라 소, 돈, 토지 등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규모의 재물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제사는 브라만의 경제적 원천이다. 그리고 그 브라만은 통일 제국이 만들어진 그 당시 사회 제1의 기득권자였다. 그 브라만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였으니 브라만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쇼까의 불살생을 기반으로 하는 제사 금지 정책은 브라만들에게 심한 타격을 주기 위한 브라만 억압 정책이었다.

아쇼까가 불살생을 천명하면서도 전쟁 포기를 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쇼까는 한 번도 군대를 해산하였다거나 무력 포기를 한 적이 없다. 만약 그가 깔링가 정복 후 칙령을 통해 밝힌 바와 같이 전쟁과 살육에 대해 후회를 하였다면 그곳으로부터 데려 온 15만의 포로를 풀어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60만 대군의 군대 또한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결국 그가 의도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외적으로는 더 이상 영토 확장 정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내적으로는 왕에게 대항하여 그렇게 가슴 아프게 죽거나 다치지 말라는 뜻이었을 뿐, 어떤 조건에서든 폭력이나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아쇼까는 제사 금지의 정책을 확실하게 이행하는가를 감시하기 위해 정부 관리와 많은 첩보원을 두어 브라만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의 정책 시행 여부를 감시하였다. 그리고 그 정책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자는 심하게 처벌하였다. 아쇼까가 운영한 중앙 첩보 체제는 고대 세계에서 어떤 제국도 따라 오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조직이었다. 아쇼까는 이 조직을 통해 이 정책을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심한 형벌을 가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브라만이라는 기득권자에 대한 재갈을 물리고자 하는 최초의 통일 군주가 갖던 절박함 심정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쇼까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마우리야 제국은 멸망했다. 도처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서였다. 진시황이나 아쇼까나 똑 같이 통일 군주이면서,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제국이 멸망한 것은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을 썼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은 항상 정부를 등에 없고 득세하는 탐관오리들이 득시글거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국민들은 그들로 인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한 백성들의 마음에 평소 왕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기득권 세력이 불을 지핀 것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실제로 마우리야가 멸망하고 그 뒤로는 브라만이 왕이 된 왕조가 연거푸 세워졌다.

아쇼까가 불살생을 앞세워 브라만에게 제사를 못하게 한 것은 요즘 같으면 과세 평등의 원칙을 앞세워 종교인에게 세금을 부과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에서 대형 교회가 이미 기득권 세력의 중심부에 서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들의 힘의 원천인 물질에 대해 세금을 매긴다고 하는 것은 거대한 기득권을 견제하겠다는 의미일 수 있다. 지난 노무현 정권 시절에 개혁 시민 세력 사이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 문제가 단순한 과세 문제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포장은 그렇게 되었지만 실상 그 의도는 유신과 5공을 거치면서 25년 이상 지켜온 기득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대형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 대해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꼈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그 운동의 배후라 생각하는 정부와의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그 기득권자들은 그 권력을 쓰러뜨리고 결국 다시 권력을 손에 쥐었다.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에서 한국에서의 지난 10년 정부 시절에 개혁 진영이 실패하였듯 아쇼까의 경우도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 그 때 당시나 지금이나 결국 그 두 권력이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자와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그 이데올로기 만드는 일을 담당하는 자는 당시 인도에서는 브라만이었고, 한국에서는 조중동과 세력화된 대형 종교 권력이었다. 그 브라만 이데올로기는 이미 500년 넘게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있었고, 조중동과 대형 종교 권력이 분단과 내전 그리고 독재를 거쳐 오면서 만든 국가주의, 민족주의, 반공주의, 지역주의 그리고 그 위에서 만들어진 영웅 중심주의가 짧게 잡아도 1945년 이후 이 땅에 굳건히 뿌리 내리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한 이 시대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겉으로는 작게 보이지만 그 의도의 뿌리는 엄청난 그 싸움에 기득권자의 승리는 불을 보듯 훤하다.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 그대로이다.

아쇼까는 브라만 기득권자와 싸우다 패배한 철저한 현실 군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그를 고도의 평화주의자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그가 남긴 1차 사료를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하지 않고, 액면으로만 해석한 결과다. 사료를 액면으로만 분석하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통해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자, 때가 때이니 만큼 1980년 5월 광주로 한 번 떠나 보자. 본격적인 사료 분석에 앞서 한 가지 가정을 먼저 해보자. 앞으로 500년이 지난 후,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자료로 당시 발행한 어떤 관제 신문의 기사 하나밖에 없다고 가정해 보자. 고대 인도 사회에서 남긴 자료는 보통 이런 식으로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 관제 신문 기사는 전두환 장군이 광주에서 흘린 피를 보고 너무나 가슴 아파 하고, 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는지에 대해 괴로워하며 그래서 이 땅에 '민주'와 '정의'가 강같이 흘러내리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 한 몸 평화의 제단에 바쳐 이 땅을 바로 지켜낼 결심을 하였다고 써내려갔다고 가정해 보자. 자, 이 자료 하나를 액면으로만 해석하여 전두환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전두환은 뛰어난 평화주의자요 민주와 정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고뇌한 철인 군주다.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 조선일보는 8월 28일자 「새 시대의 개막-전두환 장군의 대통령 당선에 제하여」라는 사설을 통해 "... 전 대통령의 취임으로 바야흐로 새 시대 새 역사는 개막되고 있으며 국민들은 전 대통령 정부에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걸고... "라고 했다. 이 자료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역사를 읽어 낼 수 있을까?

그 사료를 가지고 전두환이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 것에 대해 슬퍼하였다고 보는 것은 몰역사적 해석이다. 역사적 해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유혈 사태의 원인 제공자가 본인임을 밝히고 그에 대한 죄과를 치르는 것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는 그 짐을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에 있는 검증되지 않은 '지역 감정'에게 그 짐을 떠넘겼다. 비열한 짓이다.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학살을 자행하였으면서 그 죄를 국민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전두환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그 작당이 이미지 조작을 매우 능수능란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는 '깡패'를 다수 엮어 삼청교육대로 보내고, 국민들에게 원성의 대상이던 부정부패 정치인들을 족쇄에 묶어 구국의 결단을 한 단호한 통치자의 인상을 심어주었다. 올림픽을 유치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발전하는 '우리나라'의 긍지를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그를 통해 그는 더러운 피의 권력을 전 세계로부터 추인 받았다. 금강산 댐 사건을 통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면서 동시에 정부를 중심으로 국민 통합을 이루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함께 보았다. 대구와 광주 사이에 고속도로를 뚫어 자신은 '지역감정'을 해소하고자 애쓰고 고민하는 따뜻한 지도자임을 국민에게 널리 심어주었다.

전두환이 구국의 결단 운운하고, 동서 간의 화합 운운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내자고 그 세치 혀를 휘두를 수 있었고 그 현란한 조작에 국민이 쉽게 말려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언론을 장악하고, 정보 조직을 강화하여 한편으로는 조작과 숙청을 감행하면서 또 다른 편으로는 기득권자와의 일심단결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대오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그 현란한 사술의 생명력은 의외로 끈질기다. 그래서 21세기 한국에서 아직도 전두환의 위세는 당당한 것이다. 29만원밖에 없다고 전 국민을 농락하고 있는 그의 위세는 결국 기득권자와의 권력 분점을 통한 사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국민이 역사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 사술에서 깨어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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